[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다. 21세기 들어서 한 정당이 국회의 5분의 3, 180석을 차지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과반을 넘겼다고 해도 과반에 턱걸이를 했을 뿐이다.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의회 권력의 행사가 가능해지는 상황은 없었다.
투표일 직전, 일각에서 ‘민주당 180석’이라는 전망이 나왔을 때 아마 민주당 스스로도 놀랐을 것이다. 정치적인 상황이 결코 녹록치 않은데, 코로나 19 사태가 시간이 지날수록 문재인 정부에 우호적이고 그에 따라 여당에도 ‘악재는 아니다’는 쪽으로 방향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결코 여당에게 쉬운 선거가 되지 않을 것이 쉽게 짐작되는데 느닷없이 ‘180석’이라는 얘기가 도니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를 노리는 야당의 역선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5일 본 투표가 시작되고, 지상파 방송 3사와 JTBC가 각각 출구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오후, 선거 취재 중인 현장의 기자들에게서 잇따른 정보가 들어왔다. 민주당의 획득 예상 의석수를 최고 203석까지 보는, 다소 황당한 정보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민주당 170~180석, 통합당 80~90석’이라는 정보였다. ‘소문이 진짜였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심지어 몇몇 민주당 의원이나 후보들에게 물어보아도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리되겠냐?”는 반응이 전부 다 였다. 정치부 기자 생활 1, 20년이 넘어 수많은 선거를 취재한 경험이 있는 기자들도 대부분 “예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한 정당이 그렇게 의석을 가져갈 수 있는 정치 풍토가 아니다”고 얘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비현실의 상황이 말이 됐고, 현실이 됐다. 천지개벽을 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앞으로 4년간 21세기 의회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슈퍼 메머드’ 집권 여당이 펼치는 정치를 보고 살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정치공학적인 측면이나, 선거공학적 측면의 분석은 차치하고, 과연 우리는 앞으로 4년간 벌어질 이 정치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아니, 유권자인, 정치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준 장본인인 우리 시민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지 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들도 예상하지 못한 이런 상황에 놓인 여당, 즉 민주당이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대승을 거둔 민주당의 앞으로의 정치 행보는 명확하다. 오히려 150석 남짓의 과반 달성이나, 다른 진보 성향 정당과 연합하지 않으면 과반을 이룰 수 없는 처지가 됐을 때보다 2020년 4월 16일을 맞은 민주당의 입장은 훨씬 명료하다. 독점 가능한 의회 권력을 스스로 다른 야당들과 나눠 갖는 것이다. 누가 권력을 달라고 시비 걸고 고집부리지 않아도 민주당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그 권력을 야당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그 행위를 ‘협치’라고 부른다.
원내에 늘 7개 정도의 정당이 있는 스웨덴의 의회는 이른바 ‘연정 의회’라고 불린다. 1930년대부터 독점적인 의회 권력을 차지했던 사회민주노동당(사민당)이 최근에 와서는 독자적으로 의회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슷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다른 정당들과 연합해서 정부를 구성한다. 지난 2014년 총선 후에는 적록연대라고 해서 사민당이 녹색당(환경당)과 연정을 이뤘고, 지난 2018년 총선에서는 정치적 입장이 확연히 다른 보수 성향의 정당까지 합쳐서 연정을 이뤄 정부를 구성했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받은 180석의 의미는 보다 더 협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유권자들의 의지가 배어 있는 것임을 민주당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사진=YTN 뉴스 화면 캡처
그런데 80년의 세월 동안 스웨덴 의회를 사실상 장악하다시피한 사민당 정권을 봐온 스웨덴 시민들은, 과거 사만당이 독자적으로 정부를 구성했을 때보다 연정을 이루는 지금 스웨덴의 정치가 더 건강해졌고, 시민들의 만족도도 높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아무리 지향점이 비슷한 같은 진영의 정당이라도 정책이나 정치가 같지 않은데, 연정을 이루니 한 당의 독단적인 정치 행위보다 더 시민을 위하는 다양한 의지들이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처럼 정치 신념이 다른 정당이 연정을 하니 정책이나 정치의 다양성이 더 커지는 것을 스웨덴 시민들을 겪고 느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스웨덴의 정치 풍토는 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됐을 때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실상 일당 정치를 하던 1940년대부터 80년대까지도 사민당은 늘 다른 정당, 심지어는 보수 정당들에게도 자신들의 권력을 나눠줬다. 특히 1990년대 초반 스웨덴이 극심한 경제적 위기에 놓였을 때 사민당은 보수 정당들과 협치를 통해 그 위기를 극복했고, 그 때문에 시민들은 사민당에게 더 큰 애정과 신뢰를 보냈다.
정치 환경이 같지 않기 때문에 180석, 국회의 5분의 3을 차지한 민주당에게서 스웨덴 사민당과 같은 정치를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협치에 대한 우리 국회의 노력은 어제오늘 갑자기 있었던 일은 아니다. 실패가 거듭됐지만 늘 노력이 있었다. 이유는 분명하다. 협치가 존재하지 않는 한 양극단의 대결 정치는 계속될 것이고, 누구 하나가 아무리 잘나도 그 대결 만연의 구도 속에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 경제적, 대북 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 협치에 실패했다. 결국 20대 국회가 ‘최악의 국회’ ‘21세기 동물 국회’라는 오명을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협치의 호기가 왔다. 서로 비슷한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는 본능적으로 협력보다는 내 것 지키기에 급급하게 된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당만의 절대 권력이 가능해진 상황에서는 그 권력을 나누기가 더 쉽다. 힘들게 쥔 권력을 나누는 게 아깝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시민도 그 권력을 독점하라고 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시민들이 민주당에게 독점적인 권력을 준 것은 문재인 정부와 함께 수 많은 어려움을 타개하라는 명령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의 위기, 수출은 물론 내수의 위축으로 악순환하는 기업과 그로 인해 어느 때보다도 위험해진 고용 시장 등 경제 문제는 파국 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천문학적인 한미 방위비 분담금 압박을 가하고, 일본과의 갈등은 해결의 조짐이 전혀 없으며, 중국은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해 우리에 대한 압박을 멈추지 않는 것도 문제다. 금방이라도 비핵화를 이루고 대화의 무대에서 민족 동질성을 회복할 것처럼 굴던 북한도 대화 단절을 무기로 우리에 대한 압박의 고삐를 더 죄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난 20대 국회를 보니, 여당의 힘이 모자라서 이런 문제 해결이 잘 안된다고 생각한 유권자들이 여당에 힘을 실어준 게 이번 총선 결과의 성격이라고 봐도 된다. 힘을 줄테니 해결하라는 요구다. 그리고 야당과 그 힘을 잘 나눠 쓰라고 시민들을 명령한다. 자기 혼자 그 힘을 다 만끽하며 교만하지 말라는 게 시민들의 목소리다.
사실 180개 의석을 가진 ‘슈퍼 메머드’ 여당의 힘의 사용 시효는 4년이 아니다. 채 2년이 안 된다. 2022년 3월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가 바로 그 시효다. 시민들이 준 힘을 협치를 통한 해결 능력으로 잘 사용하지 않으면 시민들은 채 2년이 안 되서 행정부 권력으로 회수할 것이다. 만약 시민들이 국회에 실망하고 야당에게 행정부의 권력, 국가 최고의 권력을 준다면, 지금 받은 민주당의 권력은 반토막나고 정부와 의회의 극한 대결로 치달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에게 권력을 준 시민들은 기꺼이 그 혼란과 대결의 상황을 또 감내할 것이다.
협치는 민주당을 위한 것도, 통합당이나 다른 야당을 위한 것도 아니다. 권력의 주체이자 실체인 시민들의 삶, 그들의 운명을 위한 것이다. 180석 민주당의 권력은 민주당의 것이 아니다.
[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