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스스로 하노이회담의 훼방꾼이었다고 당당히 밝힌 그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에는 역설적인 진실이 담겨있다.
그가 진심을 다해 트럼프 대통령을 깎아내리기 위해 묘사한 대목에서 오히려 ‘비핵화 빅딜’을 향한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증명됐다. 볼턴이 외교적 춤판(fandango)이라 표현할 정도로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과감했고, 영향력이 컸다.
문 대통령은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다음날인 28일 즉각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해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을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세기의 회담이라 불린 1차 북미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결정된 뒤에도 문 대통령은 5월22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자신도 참여하겠다고 요구했다. 미국은 물론 북한의 반대로 1차 북미정상회담에 문 대통령은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적극적으로 간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볼턴은 공동성명 초안에 담겼다가 빠진 ‘종전선언’이 문 대통령의 의견이었다고 회고했다. 볼턴의 방해가 없었더라면 북미 비핵화협상은 ‘종전선언과 핵‧미사일 신고’라는 보다 구속력 있는 합의로 시작될 뻔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충격파가 컸지만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6월12일과 7월27 사이에 3차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을 적극 권유하며 판문점 또는 해군 군함 위 만남 등 아이디어도 제안했다.
사그라들던 협상의 불씨를 살리듯 6월 30일 판문점 북미 정상 회동이 성사됐을 때에도 문 대통령은 이를 남북미 3자 정상 회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대한민국 대통령이 현장에 없는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면 나중에 큰 비판을 불렀을 가능성이 컸다.
볼턴의 훼방은 싱가포르선언에서 ‘종전선언 대가로 핵‧미사일 신고’ 항목을 뺀 것 외에도 트럼프 대통령으로 하여금 ‘하노이 노딜’을 미리 결심케 했다. 당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에서 탄핵 위기에 몰려 있었으므로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과거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는 영상을 보여줬고, 아베 일본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해 ‘북한에 양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 30일 판문점 자유의집 앞에서 역사적인 남북미 정상 회동을 하고 있다./청와대
결국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문재인 대통령의 ‘빅딜’ 구상이 통하지 않았고, 볼턴을 비롯한 백악관의 강경파 참모들이 ‘스몰딜’을 나쁜 협상으로 몰아가면서 실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초 싱가포르선언에 포함됐다 빠졌던 '종전선언과 북핵 리스트'는 미국이 거부할 의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협상 의지도 의심된다.
문재인정부는 우선 ‘빅딜’을 성사시켜놓고 세부 논의로 들어가는 비핵화 전략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볼턴도 회고록에 “싱가포르 회담 전 문 대통령은 미 행정부에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간 ‘빅딜’을 이루면 구체적인 것은 실무선에서 논의하면 되고, 북한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비핵화를 완수한 뒤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썼다.
하지만 1차 북미정상회담 때 ‘종전선언 대 핵‧미사일 신고’ 합의를 반대했던 볼턴은 2차 북미정상회담에선 ‘영변 핵시설 폐기 대 대북제재 일부 해제’도 반대했다. 영변 핵시설 폐기 이상의 플러스 알파를 요구하면서 노딜을 계획했고, 특히 노딜 계획을 문재인정부에게는 비밀로 한 채 아베 총리에게만 사전에 흘렸다.
볼턴은 회고록에 일본이 북한에 ‘노딜’ 정보를 전달한 사실도 적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발표한 ‘새로운 길’은 볼턴과 아베라는 훼방꾼이 만들어낸 작품일 수 있다. 그동안 북미 대화의 실패를 남한 탓으로 돌렸던 김 위원장의 오해를 풀 시간이 된 것 같다.
‘하노이 노딜’은 미 행정부에 북한 문제에 무조건 부정적인 볼턴과 같은 강경론자나 회의론자들이 상당히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협상이 시작되더라도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반영한 세심한 전략이 필요하다. 볼턴의 저급함을 뒤로 하고 받아들여야 할 교훈이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