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나오는 할머니 대사 한 자락이다. 이 작품은 이른바 다양성 영화로서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깨면서 장면 하나, 대사 한 줄, 뒷이야기 뭉치 모두 황급한 뉴스 메이커가 되고 있다. 이미 기록이 성대하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지난 12월 29일 88,909명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3위를 차지했다. 누적 관객 수 363만9434명까지 왔다는 영화진흥위원회 집계다. 개봉 25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한 이 영화는 지난달 25일 역대 다큐멘터리 최고 흥행작이었던 <워낭소리>(2009, 이충렬 감독, 누적 296만2897명)의 기록을 넘고 흥행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역시 같은 다양성 영화 범주로 치는 외화 <비긴 어게인>의 누적 관객 수 342만 7520명을 뛰어 넘고 역대 다양성 영화 1위에 등극하는 저력을 과시했다는 점도 단연 화젯거리다. 을미년 첫날에 400만도 돌파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다. 우선 파고드는 느낌은 한국인의 괴이함이다. 무슨 콘텐츠를 좋아하고 어떤 문화와 미디어 자극에 반응하느냐에 관한 컬처 코드(culture code)가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불규칙적임을 이번에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영화 <명량>에서는 애국주의와 우러러 볼 지도자상이 흥행 코드였고 <국제시장>에서는 계몽적 노스탤지어가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이번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뭔가 뿌연 느낌을 준다. 장르는 그 흔한 휴먼 다큐멘터리이고 76년 해로한다는 어느 시골 노부부 일상만으로 담은 큰 자극 없는 스토리인데도 블록버스터로 끓어올랐다.
더구나 TV 「인간극장」에서 먼저 다루었던 그 테마 그대로여서 처음 접하는 참신함도 없는 채였다. 정작 영화를 보고 나서도 많은 이들이 너무나 잔잔하고 단조롭고 평범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았다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왜 이번 이 영화는 이를테면 단박에 ‘작두’를 타게 되었는가?
열쇠는 아주 모순되었지만 강력한 ‘다양성’에 숨어 있다. 흔히들 다양성영화 또는 독립영화라고도 부르고 영화산업 관점에서는 저예산 상업영화나 예술영화라고도 부르는 이 문화게릴라는 사회 질환의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2009년 <워낭소리>가 단 돈 1억짜리 영세한 콘텐츠로 나와 대통령까지 끌어당긴 초대박으로 솟구쳤을 때 대한민국 숨은 병증은 상실감이었다. 고향을 잃고 고향집 누렁이 농우도 잃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 메트로폴리탄 시티즌의 씻김굿과 같은 의식이 치러졌던 현장이 컴컴한 극장이었다.
또 하나 뒷담화도 있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때 <워낭소리>를 먹잇감으로 내세운 정치마케팅도 크게 작용했었다. 예술 창작으로 만든 감독의 영화를 좌우 격전지로 얼룩진 문화정책 전선으로 끌어와 대결과 대립, 정쟁 구도로 돌려 세운 그룹이 있었다. 그 때 명분이자 구호가 바로 독립영화였고. 인디 음악처럼 순수한 예술 창작이 유명해지고 흥행이 된다는데 힘을 실어줘야 된다는 공감대를 이끈 것도 독립영화라는 표현이 갖는 위력 때문이었다.
자본의 예술로 너무 심하게 얼룩진 영화산업 편식과 독식을 제어해야 한다는 부채의식도 정치마케팅 포인트였다. 아무튼 <워낭소리>가 얻은 것은 독립영화라는 브랜드 힘과 높은 위상이었고 잃은 것은 만드는 손이었다. 감독과 창작자들은 이후 악독한 대박 징크스 탓이었을까... 경제적 보상도 충분히 얻지 못하고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싸움질 유발했던 용어 독립영화가 이제 다양성영화로 변신해 와 있다. KBS를 비롯해 거의 모든 언론들이 다양성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고 부른다. 정치는 탈색하고 표현은 순화되었지만 다양성영화 또한 우스꽝스러운 이름표로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부끄러운 자화상이 되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똑같음’에 쪽 팔려하는 우리들 한국인을 놀려주는 듯하다.
왜냐면 다양성영화라는 말 자체가 부자연스럽고 모순된 개념 이어서다. 글로벌 무대에서 아프리카 문화도 아마존 문화도 숭상하자는 문화적 다양성(cultural diversity)을 늘 부르짖지만 영화산업에서 다양성영화라고 따로 분류하는 접근은 기본적으로 비정상적이다. 다양성영화가 따로 있고 비다양성 영화, 즉 주류문화 영화나 지배이데올로기 문화 영화가 따로 있다는 생각 자체가 신기루라는 지적이다. 본래 문화는 다양하지 않은가? 문화라는 개념만 전 세계에 6만개가 넘게 존재한다.
그런데 왜 우리 언론과 사회는 다양성영화를 굳은 실체로 알고 있는가? 이건 바로 독립영화로 각인시킨 정치마케팅, 이념 장사 여파가 그토록 심했다는 반증이 된다. 사회적 약자로 포장하고 문화적 선봉으로 둔갑시키고 작위적인 갈등과 대립 구조로 설정했던 독립영화라는 지독한 유산이 거대한 앙금으로 남아 있어서다.
<워낭소리>가 본의 아니게 정치마케팅에 휘말려 착한 독립영화와 저 너머 악한 자본 영화, 대기업 계열 영화라는 대결구도에 강제 동원된 이후 어느새 한국사람, 한국 사회 전체가 문화시민 콤플렉스에 젖어들어 버렸다. 독립영화에 이은 다양성영화라는 특구에 뭔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자칫 무시하고 불경 하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을 거라는 압박감이 뇌리에 박혔는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 미디어 언론부터가 다양성영화라는 모순된 실체에 원죄의식을 품게 되어버렸다.
이제라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명작에 대해 다양성영화로 붙인 이름표를 떼어내야 할 일이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분류와 명명은 우리 사회 다양성 콤플렉스 또는 다양성 질환을 토로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 하지 않는다면 한국인이 드러내 보인 지독한 행복 콤플렉스까지 겹치고 더해져 부각된 다양성영화라는 레이블이 너무 안쓰럽고 못난 표식으로 남게 될 뿐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영화 작업도 대기업 계열 홈쇼핑 채널 출연기관인 방송콘텐츠진흥재단(BCPF)이 발굴, 투자하고 CGV가 서비스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사례다. 이른바 거대 자본과 기성 체제와도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어 만들어진 작품 중 하나다. 별유세계 다양성영화 독립영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그대로 자연스럽게 휴먼 다큐라고 수식하는 것도 좋겠다. 아무 것도 붙이지 말고 그 영화라고만 해도 나쁘지 않다. 우리가 다양성영화라고 이름 하고 아낀다고 나설수록 쓸데없는 대결과 대립 긴장 구도와 불필요한 정치마케팅 전선이 그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립영화라는 구호나 다양성영화라는 모순된 표현들도 실상은 문화에 자신 없고 뭔가 쭈뼛쭈뼛한 경제동물 한국인의 반증이고 고백임을 직시할 때도 되었다. 저예산 상업영화나 예술영화라고도 분류 가능하지만 이 또한 중언부언이지 싶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콘텐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그냥 영화라는 이름 그 자체로만 아로새겨야 할 사소하지만 중차대한 책무를 우리가 품게 된 현실이다. 언론부터 달리지기 바란다.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