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우석 문화평론가 |
87년 이후 헌법에 올라간 ‘평등주의라는 함정’
역시 불평등을 용인하지 않는 구조, 평등주의와 경제민주화로 돌아선 경제정책이 문제인데, 이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확인하려면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의 변화를 훑어야 한다. 즉 ‘87년 체제’의 문제다. 그 해 개정된 헌법은 경제 균형발전, 소득 적정분배, 경제민주화를 명문화(119조 2항)했다. 공정거래법에 등장하던 경제력 남용규제 문제가 헌법으로 격상되며 재벌규제가 정부 경제정책으로 등장한 것이다.
▲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는 유사 사회주의, 혹은 명백한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헌법적 가치인 시장경제와 거의 동격이 되면서 재벌규제 등 온갖 규제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뉴시스 |
경제 포퓰리즘의 출발은 전두환 정부 시절부터
즉 5공은 박정희 시절 가장 혜택을 많이 본 집단으로 재벌-대기업과 수도권-대도시를 설정해 이들을 때려잡겠다고 선언했다. 그걸 ‘정의사회 구현’이라고 저들은 설명했는데, 실제로 30대 재벌에 대한 각종 규제가 그때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정희 시대와, 5공은 경제 패러다임 자체가 달랐다.
당시 공업발전법도 제정했는데, 이야말로 박정희 불균등-불균형 성장방식의 포기였다. 정부가 큰 그림을 그리고, 대기업을 최전방에 배치하는 전략적 관계를 포기했다. 그걸 정경유착이라고 딱지를 붙인 저들은 모든 기업에 대한 균등한 기회 보장을 선언했다. 기업이 잘 하건 못하건 n분의1씩 나눠 지원하는 것이다.
이런 5공의 경제개혁을 국내 경제학계는 성공작이라고 평가한다. 박정희 반대로 했으니 무조건 잘했다는 소리인데, 그들은 화려했던 3저 호황을 근거로 든다. 이에 대한 좌 박사의 비판은 신랄하다. 5공의 경제정책은 한국경제에 지뢰밭을 깐 것과 다름없으며, 때문에 당시의 반짝 호황은 해외여건 호전에 힘입은 반짝 경기다. 그건 축복이 아닌 저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성공하고 유능한 기업에게만 개방되었던 산업정책의 문이 (모두를 향해) 활짝 열렸다. ‘작은 나라 큰 기업’의 첨병인 중화학공업육성책과 같은 차별화 정책(과 불평등 경제발전)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작은 나라 수많은 작은 기업’으로의 길이 열렸고, 이와 동시에 중복투자와 외형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로비와 (새로운 방식의) 정경유착의 길도 더 크게 열렸다.”(좌승희-김창근 지음 <이야기 한국경제>)
한국경제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실은 제헌헌법과 1962년 제3공화국 헌법에도 경제민주화 용어만 없을뿐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를 한다는 선언적 조항이 있었다. 박정희가 재임 18년 간 성장과 차별화 그리고 불균등 성장으로 이 조항을 정면돌파했다면, 전두환 정부 이후와 87년 체제는 그걸 깡그리 잊기로 작정했다.
우파 경제정책 30년, 좌파경제 30년인 지금 우리의 선택은?
▲ 좌승희 박사는 "평등주의 87년 체제야말로 한국경제에 망조(亡兆)였다. 평등과 분배정의, 균형발전은 사회 모든 부문에 스며들어 국가적 자살을 유도했다.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수도권보다 지방, 성장보다 분배, 기득권층보다 비기득권층을 우선시하는 포퓰리즘이 암덩어리로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사실 1987년 이후론 세상 모두가 그쪽으로 줄달음쳤다. 사회, 교육, 복지를 가릴 게 없이 그랬다. 수도권 집중을 해체하여 모든 지역이 평등하게 발전한다는 명분 아래 이른바 지역균형발전을 추구했다.(이게 훗날 노무현의 수도 이전 추진으로 이어진다) 서울 강남이 영호남에 하나씩 생기게 하는 거점화 전략이 박정희의 불균등 성장이었다면, 이제 모든 지자체가 n분의 1씩 지원비를 나눠 먹고 끝냈다. 그리고 그걸 지역균형발전이라고 우겼다.
평준화 교육과 보편복지도 그 맥락이다. 전국 200개가 넘는 4년제 대학이 다 같이 발전하자면서 끝내 학문의 수월성(秀越性)을 포기하니 미친 짓을 지금껏 해오고 있다. 박정희 시절에는 새마을운동과 취로사업 등 일을 시키고 성과가 높은 사람을 골라 돈과 물자를 나눠줬는데, 지금은 누구에게나 쌈지돈을 나눠주는 짓거리를 보편복지라고 호들갑이다.
누가 새마을운동을 쉽게 말하는가? 그건 철두철미 균등지원과 나눠먹기 식지원과 담을 쌓았기 때문에 성공했다. 그래서 불균형 성장의 위력을 증언하는 위대한 금자탑으로 남아있다.
일테면 새마을운동 2차년도인 1971년 당시 길전식 등 공화당 5인방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차등지원은 정치적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했다. 이때 박정희는 “정권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전국 3만 여 개 마을에 차등지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박정희 경제는 평등주의의 포퓰리즘 극복이 핵심이다. 그리고 그 끝판왕이 유신인데, 지금 아무도 그 가치를 모른다.)
왕고집 박정희 “정권 내줘도 새마을운동 차등지원을 하겠다”
결국 좌승희 경제학으로 보자면, 그걸 모두 내다버린 87년 체제야말로 한국경제에 망조(亡兆)였다. 평등과 분배정의, 균형발전은 사회 모든 부문에 스며들어 국가적 자살을 유도했다.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수도권보다 지방, 성장보다 분배, 기득권층보다 비기득권층을 우선시하는 포퓰리즘이 암덩어리로 자리 잡았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은 크게 보아 우파 경제정책 30년(1960~87년), 좌파경제 30년(1987년 이후)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답답하다. 2012년 대선 때 집권여당 후보가 경제민주화 구호를 들고 나온 것은 포퓰리즘이 우리의 국시(國是)로 자리 잡은 듯한 느낌까지 줬다. 지금 한국경제가 저성장에 목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까?
얼마 전 “개혁이 밥 먹여준다”고 선언한 경제 수장(首長)의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신년 메시지에서 “이제 물러설 자리가 없으며, 백년대계만 생각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공공, 노동, 교육, 금융부문의 구조개혁을 언급했다. 그건 연말 대통령이 주재한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확정한 정책과제인데, 필자는 궁금하다.
그들이 대한민국 개발연대의 성공방정식을 제대로 꿰고 있는 걸까? 87년 체제의 한계를 알긴 알까? 87년 체제의 청산 문제는 지난 달 한국경제신문 사설이 언급했지만, 아직은 소수의 목소리다. 또 궁금하다. 박근혜 정부가 87년 체제 청산의 큰 그림을 가지고 구조개혁을 말하는 것일까? 좌승희 박사는 어떨지 몰라도 이 사안에 대해 필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그럼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좌승희 경제학에 다시 기대어 답을 구해볼 일이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