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이 1770년 집필한 역사 지리서 도로고(道路考)에 기록된 육대로(六大路)를 기반으로, 조성된 길이다.
이 중 지난 2015년 오픈한 영남길은 성남, 용인, 안성, 이천을 잇는 트래킹 코스로, 그 중 제3길이 ‘구성현길’이다.
구성현(駒城縣)은 삼국시대 때 백제 땅이던 용인이 고구려에 편입되면서, 처음 중심지가 됐던 지역이다. 즉, 원래 조선시대까지, 용인의 정치.행정.국방의 중심은 구성이었다.
전문가들은 ‘구성’이란 명칭은 고어에 ‘크다’, ‘높다’는 뜻을 지닌 ‘말(마루)’란 말을 한자음 ‘구’로 표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 때 구성을 거서로 고친 것도, 본래 같은 의미다.
즉 구성은 ‘큰 성’, ‘높은 곳’이라는 풀이다.
이렇게 용인의 최초 지명이자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기흥구(器興區)의 일개 행정동인 구성동으로만 이름이 남았다. 2005년 10월 기흥읍과 구성읍을 통합, 기흥구를 신설했기 때문.
그러나 길을 걷다보면, 지금도 옛 용인의 중심이었던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탄천을 거쳐 구성역을 지나면, 잘 보존된 마북동(麻北洞) 석불입상 앞에, 옛 원님들의 선정비가 즐비하다. 또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며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묘소도 있고, 조금 더 옛 용인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용인향교가 보인다.
그 앞 마북로를 따라가면, 현대 서양화의 대가 장욱진(張旭鎭) 화백의 고택도 둘러볼 수 있다.
이 구성현길을 따라 걸어본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 묘/사진=미디어펜
전철 수인분당선(水仁盆唐線) 죽전역에 내려 역 광장으로 나오면,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가 있다. 이마트 뒤로 돌아가니, 하천 변으로 내려가는 길과 작은 다리가 보인다.
바로 성복천이 탄천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성복천(星福川)은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 일대를 흐르는 하천이다. 길이 4km의 2급 하천으로, 광교산 형제봉 인근에서 발원, 정평천.풍덕천과 합류해 죽전동을 거쳐 탄천으로 흘러든다.
이 동네 이름 ‘죽전’은 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10리 정도 떨어진 모현면 능원리에, 포은의 묘소가 있다.
묘소는 처음엔 개성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 태조 때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죽전 인근 풍덕천(豊德川)에 이르자, 갑자기 돌풍이 불어 상여의 영정이 날아올라, 지금의 묘 자리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가보니 가히 명당이어서, 여기다 모시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게 선생의 상여가 지나갔다고 해서, 이곳을 ‘죽절’이라 불렀다. 대나무와 마디가 있는 나무이니, 충신을 의미한다. 그 후 언제부턴가 죽절이 죽전(竹田)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선조 때는 포은을 모시는 죽전서원이 세워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 후 충렬서원으로 바뀐다.
탄천은 수도권 주민들에게 익숙한 큰 국가하천이다. 탄천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돌다리를 통해 하천을 건너, 물길을 따라 걷는다. 물가의 백로 한 마리가 사진을 찍는 것도 아랑곳없이, 물고기 사냥에 집중하고 있다. 길 옆 풀밭에는 자주광대나물이 많다.
이 곳은 보정동(寶亭洞)이다.
이 근처 연원마을에 조선시대 역인 보수원과 큰 정자가 있었다 해서, ‘보’자와 ‘정’자를 따서 생긴 지명이란다. 여기에 한 선비가 홀로 정착했다고 해서 독정(獨亭)이었다가, 일제 때 ‘독’자를 쓰게 못하게 해서 바뀌었다는 설과, 가마터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탄천 너머에는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가 시원스럽게 내달린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남길은 서울과 영남 간 ‘길목’이다.
어느 새 수인분당선 구성역이 가까워졌다.
구성역 앞에는 전통사(傳通寺)란 사찰이 있다. 이름처럼 전통 있는 사찰 같지는 않은데, 맞배지붕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제법 볼 만하다.
영남길은 구성역 반대편, 탄천 너머 도로를 따라 이어진다. 경기동부보훈지청과 서울우유 앞을 지나, ‘용화마을’ 태영데시앙 아파트단지 옆 도로를 따라가면, 멋진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 500년은 족히 돼 보인다.
그 옆에 마북리 석불입상(石佛立像)과 석탑이 보인다.
석불입상은 전각 속에 봉인돼 있어, 미륵불이라는데 자세히 살펴보기가 어렵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조형 상 장승이나 묘지의 문인석 같지만, 동네 사람들이 미륵으로 신앙하고 용화전(龍華殿)이란 전각과 당집을 지었다.
석인상, 장승 등 본래 불상이 아닌 것을 미륵(彌勒)으로 예배, 치성하는 경향은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그 앞에는 남아있는 석재를 모아 건립한 탑 1기가 있는데, 기단부가 통째로 사라진 상태다.
옆에는 작은 보호수 또 1그루가 있고, 탑 앞에는 고을 원님들의 선정비(善政碑)들이 2열로 늘어서 있어, 여기가 구성현의 관아가 있던 마을의 입구임을 말해준다.
길을 따라 구성초등학교를 끼고 돌아 뒷길로 조금 더 가면, 마북근린공원이 나온다.
여기에 충정공 민영환(閔泳煥) 선생의 묘가 있다.
민비와 민씨정권은 ‘단군 이래 최악의 부패정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왕과 왕비를 앞세워 ‘국정농단’을 했고, 조선의 개화와 개혁을 봉쇄했으며, 동학과 독립협회를 탄압했다.
그리고 결국 민비를 배신하고,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다. 단 한 분, 선생을 빼고는...
선생은 독립협회를 지원해 개혁을 시도했고,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乙巳條約)을 체결하자,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다.
선생의 묘는 원래 수지구 풍덕천동에 있었으나, 1942년 후손들이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이장했다고 한다. 1959년 건립된 묘비의 앞면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썼다.
다른 민씨들처럼 일제와 타협했다면, 부귀영화를 누렸을 그다. 술을 한잔 따르고 재배를 한다.
장욱진 고택 입구/사진=미디어펜
근린공원을 나와 반대편으로 내려가, 마북교(麻北橋)를 건넌다. 구성동 주민센터 사거리를 지나 다음 사거리에서 좌회전, 조금 가면 용인향교가 보인다.
용인에는 전에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구교동’, 향교가 있어 ‘향교말’ 혹은 ‘교동’으로 불리는 마을이 각각 따로 있다. 용인향교(龍仁鄕校)는 구교동에 있다가 향교말로 옮긴 후, 다시 현 위치인 언남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약간 빛바랜 홍살문 너머로, 향교 정문이 당당하게 서있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잦은 이전에도 불구, 대성전은 17세기 경기도 향교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여기서 영남길은 법화산(法華山. 383.1m)을 넘어, 동백호수공원으로 향한다.
법화산은 용인시 기흥구와 처인구에 걸쳐 있는데, 이제학의 ‘용인의 산수 이야기’에는 불경인 ‘법화경’에서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동쪽으로는 레이크사이드컨트리클럽과 88컨트리클럽이, 북쪽에는 천주교 용인공원묘지가, 그리고 서쪽에는 단국대학교 용인캠퍼스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마북천(麻北川)과 마북로를 따라 올라간다.
건너편 구성동 주민센터 앞에는, 기묘한 느티나무 고목이 한 그루 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모르지만, 줄기 속이 텅 빈 채로 서 있다. 그러면서 용케도 푸른 잎들을 무성하게 피워냈다. 이 유서 깊은 동네의 불굴(不屈)의 기상을 대변하는 듯하다.
길을 따라 마북동 주민센터 가는 삼거리를 직진, 조금 더 가면 마북어린이공원이 있고, 그 옆으로 장욱진 가옥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404호인 장욱진 가옥은 우리나라 1세대 서양화가(西洋畵家) 장욱진 선생이 1986년부터 세상을 떠난 1990년까지, 5년간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한 곳이다.
장욱진은 초기에는 서양의 모더니즘 양식을 수용했으나, 1950년대 말부터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연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즐겨 그렸다. 동양적이고 순수한 그만의 작품세계를 완성, 마치 동화책의 그림 같으면서도 표현이 세련됐고, 조형적 구성이 치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장국진 가옥은 한옥(韓屋) 2동, 양옥(洋屋) 1동으로 구성됐다.
한옥은 1884년 지어진 초가집이었는데, 장욱진이 1986년 기와집으로 고쳐 지어 화실과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양옥은 1989년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었으며, 장욱진의 1953년 작품 ‘자동차가 있는 풍경’에 있는 벽돌집을 본 따,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입구의 아담한 찻집 ‘집운헌’을 지나면, 고택(古宅) 솟을대문이 정답게 맞아준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기품 있게 배치돼 있고, 토담이 둘러있다. 사랑채는 개방적인 반면, 안채는 부엌 등을 막은 판자들이 외부 인을 방어하는 느낌이다. 뒤뜰의 돌담과 장독대가 정겹고, 오른쪽 위 양옥은 유럽의 ‘미니 성채’처럼 당당한 모습이다.
특기할 것은, 안채 뒤 초가(草家) 정자다. 이엉을 얹은 1평 남짓한 작은 정자로, 대들보에는 병인년(丙寅年) 5월 13일 상량했다는 한자들이 선명하다. 이 곳에 앉으면 고택의 지붕들이 눈 아래로 보이고, 푸른 앞산이 마주보이는 경치를 자랑한다.
현판은 ‘쌍어문’ 같기도 한, 글씨인지 그림인지 헷갈리는 문양이 새겨져있다. 관어당(觀漁當)이라는 정자의 당호라는데, 장욱진이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살던 명륜동 집 연못 정자의 현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 이름은 국민학자 이희승(李熙昇) 선생이 지은 것이다.
고택 주위엔 문인석, 석등, 돌확 같은 석물과 추억 돋는 오래된 철제 펌프, 각종 꽃들, 나부(裸婦) 청동조각상, 정자 처마의 풍경과 물고기, 댓돌 위 흰 고무신 등 아기자기 볼게 많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고택을 나왔다. 왔던 길을 되짚어, 탄천을 따라 구성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