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와 무관한 사람들이 수도권 규제 해제를 반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 박종운 미디어펜 논설위원
최근 서동원 규제개혁위원장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수도권 규제도 큰 틀에서 불합리한 것이 나타나면 적극 해소하는 쪽으로 검토해야 … 국가 전체의 이익을 따져본 뒤 필요하다면 완화해야”라고 했다.(한국경제신문, 2014.12.22.) 그는 공정거래위 부위원장을 거친 사람으로서 수도권규제가 공정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신년기자회견에서 "수도권 규제는 종합적 국토정책 차원에서 합리적인 방향으로 올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서동원 위원장의 말대로 현행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른 수도권 규제는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이를 제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로운 영업이야말로 공정의 첫걸음이다.
오염물 배출 때문에 바로 이웃에서 항의한다면, 혹은 직접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항의한다면 그것은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한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항의이고, 이를 받아들여서 오염물 배출 시설을 하든지 가동을 중지하든지 해야 한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심지어 이해관계 있는 당사자의 의뢰를 받은 (변호사 등) 대리인도 아닌 사람이 규제를 주장하려고 든다면 이는 법적 당사자 적격 원리에도 맞지 않다.
현행 수도권정비계획법이 바로 이런 신세다. 당초 수도권의 과밀을 해소하여 주민의 쾌적한 삶을 추구하겠다고 만든 법인데, 이제는 수도권을 옥죄는 법으로 변질되어버렸다. 그런데다 더 나아가 주민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수도권주민이 원하는 규제해제를 반대하고 나선다. 그래서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수도권 대 비수도권의 대결의 수단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참 고약하게 되어버렸다.
<수도권정비계획법이 보여주는 우스꽝스런 현실>
수도권정비계획법이 가져다 준 우스꽝스런 현실은 경기도 인접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지대가 발전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경기도 청평 자라섬과 강원도 춘천 남이섬,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홍천, 경기도 양평과 강원도 원주, 경기도 이천과 충북 음성, 경기도 안성과 충남 천안 사이의 차이이다. 경계선을 좌우로 하여 소비지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이 더 발전하는 기현상이 보이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입구 안내판에는 음식점과 펜션 상호들만 있고, 10분 정도 더 가는 거리의 원주시 문막읍 안내판에는 40여개 기업의 상호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고 한다.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 읍에는 공장이 21개인데, 맞은 편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는 공장이 98개가 입주해있다. 북한강의 남이섬과 자라섬의 경우에도, 남이섬에는 호텔과 음식점 각종 문화체험장이 있으나, 자라섬에는 매점 하나 들어갈 수가 없다.(조선일보 2015.1.26.)
여러 지역들이 골고루 발전하는 것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규제로 인해 기업들의 비용이 더 증대되는 쪽으로 바뀌었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보통 기업의 입지조건 선정시 고려할 요인으로 소비지, 노동력공급지, 원료 공급지를 드는데, 규제가 기업의 이러한 입지조건 결정들을 왜곡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람은 이동이 가능한 존재다. 산업화 과정에서도 이촌향도가 문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발전의 계기였다. 아직까지 농촌 인구가 80%가 되었다면 그것이 균형일 수는 있어도 발전의 모습일 수 있겠는가? 지역 간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발전의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발전이 우선이고 균형이 우선은 아니며, 사람이 우선이고 지역이 우선은 아니라는 것, 사람들에게는 지역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수도권규제해제반대는 이 시대의 러다이트운동>
▲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에서 "수도권 규제는 종합적 국토정책 차원에서 합리적인 방향으로 올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뉴시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정비계획법을 수정해서 규제를 완화할라치면 비수도권 지역에서 반대가 심하다. 이미 이달 19일 전국 14개 시도지사와 지역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지역균형발전협의체가 공동성명서를 내고, 규제완화에 반대하였다. 이것은 수도권이 발전함으로써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반대한다면, 그것은 국가발전을 멈추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발전을 멈춤으로써 내 이익을 추구하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비슷한 논리를 내세웠던 예가 있다. 과거 영국에서 러다이트 운동이란 것이 있었다. 1811년-1817년 사이에 영국의 중부와 북부 직물공업지대에서 일어났던 기계파괴운동을 말하는 것인데, 러드라는 정체불명의 지도자가 직물기계가 수공업에 대해 경쟁 우위를 가지게 되어 수공업 종사자들을 실업으로 내모니 기계를 파괴하여 실업위기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자는 운동이었다. 기계화가 영원히 실업을 만들어낸다면, 아마 그 기계화로 만든 물건을 팔 곳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직물의 기계화로 인해 사람들이 풍요로와지자, 그간 수공업으로 옷감을 만드느라 다른 일을 못했었지만, 이제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겨났고, 직물 수공업 대신 다른 일자리들이 많이 생겨났다. 결국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발전이 결코 경제의 황폐화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시적으로는 그런 듯이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전체의 번영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또 비슷한 예가 하나 있다. 영국에서는 증기기관과 엔진이 처음 발명되었다. 그러나 자동차가 만들어지자 우마차를 끌던 사람들이 실직을 당한다고, 자동차 운행에 각종 규제를 설치하였다. 1865년 붉은 깃발법(Red Flag Act)으로 자동차 앞에서 한 사람이 걸으면서 붉은 깃발이나 붉은 등으로 사람들에게 신호를 하도록 했다.
의사들이 나서서 빠른 속도는 건강에 해로우므로 자동차가 우마차 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하게 규제했다. 100km씩 달리는 지금 상황에서 보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단지 코미디로만 끝나면 다행인데, 이로 인해 자동차 산업은 독일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뒤늦게서야 1896년에 그 법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 전체적으로 손해를 끼친 뒤였다.
새로운 창조는 간접적으로는 낡은 것에 대한 파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낡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게 뒷다리를 잡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는 창조경제는 공염불에 불과하게 된다. 국민 모두가 ‘창조적 파괴’에 관용적인 풍토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래야 혁신이 가능하다.
창조경쟁 속에서 수도권 외의 부산권, 광주권, 대전권, 강원권이 살 특화된 방도를 찾으면 반드시 길이 보일 것이다. 만일 새로운 창조 속에서 길을 찾지 않고, 뒷다리잡기로 일관한다면 러다이트운동의 교훈에서 전혀 배우지 못하는 것이 된다. 붉은 깃발법으로 인한 영국 자동차 산업의 후진성에서 교훈을 전혀 배우지 못하는 것이 된다.
수도권 주민의 운명은 수도권 주민이 결정하도록 하자. 그것이 진정한 지방자치 아닌가? /박종운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