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金堤)란 지명은 ‘금 제방’이란 뜻이다. 금 같이 귀한 둑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주곡인 쌀을 금처럼 여겼다. 도정하기 전의 벼도 금 같이 누런색이다. 이런 벼가 많이 쏟아져 나오는 제방이 있는 고을이 바로 김제다. 그 제방은 바로 벽골제(碧骨堤)가 틀림없다.
또 김제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는 ‘금으로 된 산’에 있는 사찰이다.
전북 최대의 절집 금산사를 품에 안고 있는 모악산(母岳山)은 ‘어머니 산’이다. 쌀로 쌓은 산은 금으로 만든 산이요, 곧 어머니의 포근함과 따뜻함을 연상시키는 산인 셈이다.
금산사 미륵전/사진=미디어펜
김제는 드넓은 호남평야(湖南平野)의 중심지에 있다.
끝도 없이 드넓은 평야가 대부분 벼를 심는 논이다. 그 너머 아스라이 지평선이 길게 뻗어 있다. 산은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벽골제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 100m도 안 된다.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地平線)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도시의 브랜드도 지평선으로 정했다. 매년 ‘지평선축제’가 열리고, 전국 최대 생산량을 자랑하며 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김제 쌀도 ‘지평선 쌀’이며, 이 곳 막걸리도 ‘지평선 막걸리’다.
당연히 이 곳은 ‘풍요의 고장’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김제의 풍요가 시련과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바로 일제강점기(日帝侵略期)에 당한 가혹한 수탈과 탄압 때문이었다. 김제의 조선 백성들은 고통스런 중노동으로 산더미처럼 쌀을 생산하고도, 단 한 톨의 쌀도 함부로 먹지 못하고 굶주려야 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깨달은 사람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북으로 떠났다.
그들이 찾은 곳은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만주와 연해주. 일제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다. 거기서 온갖 어려움을 헤쳐가면서 논밭을 일궜다. 또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떨치고 나섰다.
그 눈물겨운 이야기가 조정래(趙廷來) 선생의 대하소설 ‘아리랑’에 담겨있다.
이런 사연이 얼키고 설켜 있는 김제의 금산사, 벽골제, 아리랑문학마을 등이 오늘의 행선지다.
금산사 진입도로(進入道路)는 양쪽으로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조금 들어가니, 하천가에 모악성지(母岳聖地) 비석이 반겨준다. 금산사계곡에는 인공폭포도 있어, 시원스런 물줄기를 쏟아낸다.
좀 더 가니, 산문 대신 성문 같은 게 버티고 있다. 개화문(開化門)이란다.
길 오른족엔 모악산 등산로 안내판 옆에 용화사찰(龍華寺刹) 미륵성지(彌勒聖地) 비석이 보이고, 이윽고 일주문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法王) 원년(599년)에 처음 창건, 14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라북도 내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신라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금당에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법상종(法相宗)을 열어, 미륵신앙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담의 쿠데타로, 이 곳에 유폐되기도 했다.
고려 문종 때 전성기를 맞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처영대사(處英大師) 등 1000여 승병들의 훈련장이 되기도 했으나, 정유재란 때 왜군에 절이 전소됐다. 이후 수문대사가 복원,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주석하던 명찰이다.
이윽고 푸른 이끼가 잔뜩 낀, 멋진 아치형 돌다리가 나타난다. 해탈교(解脫橋)란다. 본격적인 사찰 경내로 진입하는 길목이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금강문(金剛門)이고, 이어 천왕문(天王門) 사천왕상 앞을 지나면, 2층 누각이 당당히 내려다보고 있다. 보해루(普海樓)다. 그 앞 왼쪽엔 연꽃 받침 2개 위에 ‘불두’가 하나 있고, 그 옆에 김제로타리클럽에서 세운 돌비석, 연꽃 모양의 석조우물 상징물도 있다.
오른쪽엔 금산사를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만든 진표율사(眞表律師)를 소개하는 비석이 서있다.
진표율사는 통일신라시대 대표적 고승으로, 김제 출신으로 12세에 출가해 금산사에서 계를 받았다. 변산의 ‘부사의방’에서 온 몸을 바위에 부딪히는 혹독한 수행 끝에 미륵부처를 친견하고, 영산사에서 점찰경(占察經)과 불과를 증명하는 간자 189개를 받았다.
이후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고, 미륵장육상을 조성했으며, 법당 안 벽에는 미륵에게서 계법을 받는 모습을 그렸다.
전해오는 설로는 연못을 참숯으로 메우고, 그 위에 큰 솥을 건 다음 미륵불을 세웠다고 한다.
보해루 밑을 통과하니, 비로소 금산사의 장엄한 전모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맨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오른쪽의 미륵전(彌勒殿)이다.
미륵전은 금산사의 상징 같은 건물로, 유일한 국보(제62호)다. 진표율사가 당초 창건한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고, 지금의 것은 인조 때 수문대사가 복원한 것이다.
전형적인 3층 목탑(木塔) 양식으로, 외부에서 보면 3층이지만, 내부는 천정까지 트여진 ‘통층’이다. 1층 처마 밑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 미륵전 현판이 걸렸다.
내부에는 가운데가 미륵장육상이고, 왼쪽은 법화림 보살, 우측에는 대묘상 보살 등 미륵 삼존상(三尊像)이 봉안돼 있다.
중앙의 미륵여래입상은 특이하게, 석고(石膏) 불상이다. 원래 있던 미륵불이 화재로 소실, 1936년 공모에서 당선된 ‘한국 근대조각’의 대표 작가 김복진(金復鎭)이 다시 조성한 것이다.
천천히 이 귀중한 문화재를 감상하며, 미륵전을 한 바퀴 돌았다. 빛바랜 나무 기둥, 화려한 공포(貢包)와 단청(丹靑), 외벽에 그린 불화들이 감동 그 자체다.
미륵전 앞에는 보물 제23호인 석련대(石蓮臺)가 손짓한다. 행사 때 불상을 올려놓는 연꽃 모양의 받침대다.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 사이의 것으로,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이다.
그 옆에 있는 것은 육각 다층석탑(六角 多層石塔)으로, 보물 제27호다. 역시 다른 절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탑으로 육각형 모양에 몇 층인지 헷갈리는, 검은 탑이다. 통일신라의 일반적 모양에서, 장식이 화려한 고려시대 양식ㅇ로 넘어가는 시기에 세워졌다.
원래 ‘봉천원’ 터에 있었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후 수문대사가 복원하면서 여기로 옮겼다.
대부분의 석탑은 밝은 회색의 화강암이 재료지만, 이 탑은 벼루를 만드는 점판암으로 제작돼, 색깔이 검다. 각 층의 체감 비례가 적절하고 조각이 섬세하며,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평이다.
절집 가운데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 버티고 있다. 규모도 가장 커서, 이 절의 중심 전각이 미륵전 같지가 않을 정도다.
원래 조선후기 건물로 보물로 지정됐으나, 1968년 화재로 전소돼 보물에서 해제됐고, 현재의 건물은 1990년 복원했다.
미륵전 위 계단을 통해, 윗 층으로 올라갔다. 뜰에 멋진 배롱나무가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 곳의 하이라이트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옆에 있어, 적멸보궁에는 불상도 불화도 없다. 대신 금강계단을 올려다볼 수 있는 창이 뚫려있다.
그 왼쪽 위에는 보물 제25호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우아하게 서 있다.
밑에 있는 육각 다층탑과 달리, 이 탑은 화강암이 재료다. 고려 경종~성종 연간의 작품으로, 본래 9층이었으나 5층만 남았다. 석가여래의 진신 사리 5과가 있었으나, 분실됐다고 한다.
그 옆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자리한다. 보물 제26호다.
진표율사가 처음 설치한 것으로, 고려 왕사 소현이 고쳐 지었다. 단 가운데 종 모양의 탑이 서 있고, 그 안에 부처님 진신 사리(眞身 舍利)가 모셔져 있다. 여기에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계 의식이 행해졌고, 미륵 십선계를 주었다고 한다.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대적광전 뒤쪽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 즉 아라한들을 모신 나한전(羅漢殿), 이 절 고승들을 봉안한 조사전(祖師殿)을 차례로 지난다. 한 층 더 내려와, 대적광전 앞으로 돌아나간다. 쓰레기를 태우는 ‘연화대’ 옆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비석이 인상적이다.
대적광전 앞 오른쪽은 명부전(冥府殿)이다.
그 앞마당에 있는 노주(露柱)도 보물 제22호로 지정돼있다. 그런데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없는, 특이한 석조물이다. 돌 좌대 위에 보주 형태의 돌기둥이 놓여 있어, 노주라고 명명했다고...아마 불상을 올려놓는 좌대로 추정된다.
조각이나 양식이 고려 초기로 보인다. 몸체 없이 바닥돌, 받침돌, 상륜부도 구성됐고 받침돌은 연꽃 모양으로 조각돼 있다.
명부전 옆 대장전(大藏殿)은 대장경을 보관하려고 만든, 목탑 양식의 전각으로 보물 제827호다. 지붕 위에는 금강계단과 오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 ‘복발’과 ‘보주’가 장식돼 있다. 내부에 있는 대장경이 유실되자 석가삼존상을 보관하고 있는데, 전북 유형문화재 제253호다.
대장전 앞 대형 석등(石燈)이 마치 날아갈 듯하다. 보물 제828호다.
조각이나 지붕돌 위 꽃 조각양식으로 미워, 고려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 받침돌, 중간 기둥, 위 받침돌의 3단을 쌓고,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었다. 단순한 형태지만, 받침돌부터 머리 부분까지 온전히 보전돼 있다.
그 옆에는 감로수(甘露水) 돌그릇과 벚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옆은 범종각이 보인다. 그 앞에 또 보리수나무 한 그루. 맨 외곽은 원통전(圓通殿)이다.
다시 찬찬히 경내를 둘러보며, 찬찬이 살핀다. 지금 나가면, 언제 또 와 볼 것인가? 다시 보해루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사찰 경내에서 벗어났다. 마침내 처음 버스에서 내렸던 곳 인근이다.
여기는 ‘모악산 마실 먹거리’다. 음식문화거리란 말이다. ‘비빔밥의 고장’ 전주(全州)가 지척이어서인지, 비빔밥이 대표 메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비빔밥과 파전, 그리고 ‘지평선막걸리’로 점심을 해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