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2007년 제17대 대선을 위한 당시 한나라당 경선은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였다.
‘샐러리맨의 신화’를 휘황찬란한 보검으로 삼고 국회의원과 서울 시장 등 최고의 정치 스펙을 쌓아온 이명박 후보에 대해, ‘대한민국 보수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라는 후광을 입은 박근혜 후보가 맹추격하는 모양새가 당시 한나라당 경선의 구도였다.
후속 주자인 박근혜 후보는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이명박 후보의 목덜미 하나를 잡고 있었다. ‘도곡동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냐’는 것과 ‘BBK의 실소유주가 누구냐’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대선 판도를 뒤흔들 매우 치명적이고 강력한 이슈였다.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는 양손에 두 개의 떡을 쥐고 이명박 후보를 한껏 괴롭혔다.
이명박 후보는 “저의 삶을 견지해 온 것은 정직과 신뢰였다”며 박근혜 후보가 제기한 의혹에 결백함을 호소했고, 네거티브를 멈추고 정당한 경쟁을 하자고 호소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그냥 두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명박 후보는 전직 대통령의 영애였고,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후반기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까지 했던 것을 곧바로 공격했다. 최태민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국정 농단을 거론한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정치에 뛰어든 이후 최태민 문제는 심심찮게 박근혜 후보를 괴롭혔지만, 이명박 후보가 제대로 저격했고, 이는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박근혜 후보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그런데 결국 이명박 후보는 도곡동 땅과 BBK 주인 논란을 극복하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후보가 최태민 최서원 파문으로 정치적으로 사망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 본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무기였던 도곡동과 BBK 문제는 고스란히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의 손에 쥐어진 노획물이 됐고, 대선 내내 이명박 후보는 정동영 후보가 휘두르는 그 칼을 맞아 힘겹게 경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이명박 후보는 그 칼을 받아냈고, 당당히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 후보도 5년을 절치부심했지만, 2012년 대선에서 당명을 바꾼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고,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이 휘둘렸던 ‘최태민 최서원 칼’을 노획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 힘겹게 대항하다가 승리,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후보./사진=연합뉴스
다만 씁쓸했던 것은, 비록 이명박 전 대통령이든 박근혜 전 대통령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질러댄 ‘내부 총질’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됐지만 퇴임 후 바로 그 일들 때문에 지금 영어의 몸이 돼 고초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목을 움켜줬던 그 일들이 비록 그들이 권좌에 올라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들이 더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역사의 또 다른 한 페이지에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비단 우리의 정치사뿐 아니다. 최고의 정치 권력을 선거를 통해 뽑는 국가에서는 심심찮게 내부의 경쟁이 담장 밖을 넘어가 남의 무기가 돼서 돌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정치 논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부 경선의 과정에서 당 지도부 등은 과당경쟁하는 후보들에게, 특히 네거티브 경쟁을 하는 후보들에게 늘 자중자애를 강조하고, ‘내부 총질을 삼가라’는 말을 항상 한다. 이는 숱한 경우들을 경험한바, 당의 후보가 되기 위한 네거티브가 결국 본선 또는 그 이후에 자기들의 목을 죄는 부메랑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장기판에서 훈수 두는 사람들이나 생각하는 바다. 정작 장기를 두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단 이기고 봐야 하고, 이기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The winner takes it all’의 정치 생리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 제20대 대선을 위한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당내 경선은 흡사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을 보는 느낌이 강하다. 맹렬히 1등을 달리고 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해 2위로 따라붙은 이낙연 전 대표 측의 공격이 마치 당시 이명박 후보를 공격하는 박근혜 후보와 오버랩 되는 면이 없지 않다.
이 지사를 맹추격해 2강을 형성한 이 전 대표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실력만으로 1위 자리를 탈환할 수 없다는 정치 생리를 너무 잘 알 것이다. 어느 정치인의 “적절한 네거티브, 마타도어는 유권자들이 알아야 하는 정보이고, 이는 또 다른 정치력”이라는 말을 이 전 대표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경쟁은 내가 잘하는 것만큼 상대가 잘못하는 것도 중요하니, 상대가 잘못하는 부분을 통해 이겨야 한다고 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지사가 무료 변론을 받았다는 것은 이 전 대표에게 좋은 호재다. 그 호재를 묻어두고 모른 척하는 것은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책임방기이고, 직무유기다. 반드시 그 실체를 밝혀야 하고, 이 지사의 잘못이 명백하다면 국민들의 책망을 반드시 받게 하는 것이 ‘제 식구 감싸기’를 하지 않는 일이고, 또 정치 지도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지난 5일 충북·세종 민주당 순회 경선' 에서 1위를 차지한 더불어민주당 대권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왼쪽)가 5일 오후 충북 청주시 서원구 CJB컨벤션센터에서 이낙연 후보자와 인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이 전 대표가 오히려 곤궁한 위치에 처한 것은, 이렇게 해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 모를까 이 지사가 된다면 이 전 대표는 과거 박근혜 후보의 모양새가 된다. 혹여 이 전 대표가 경선에서 지고, 이 지사가 이 전 대표를 선대위원장이라도 시킨다면, 그래서 본인이 대통령이 되는 꿈은 잠시 접더라도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헌신하는 상황이 된다면, 자신이 제기했던 바로 그 문제를 노획해 무기 삼을 국민의힘 등 야권의 후보를 본인이 상대해줘야 한다. 눈앞의 문제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정치를 한다면 그런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 전 대표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이 지사를 공격하기 위해 꺼낸 칼이 이 지사는 물론 이 전 대표의 수장이기도 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이기도 한 ‘친문’의 수장인 문재인 대통령의 겨냥하기까지 했다. 이 지사 무료 변론이 문 대통령이 지명해서 임명한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만약 이 지사가 무료 변론 받은 것이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 이른바 김영란법 위반이라면, 이 지사는 공직자로서 금품을 수수한 것이고, 금품을 제공한 사람이 송 위원장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이 지사가 부당한 일을 행했다면 이는 이 전 대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것을 밝혀내고, 이 지사는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부 총질’이라고 폄하되든, ‘원팀을 해치는 행위’라고 비난을 받든 정치 지도자로서 정의와 도덕을 위해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일이다. 그래서 이를 그저 네거티브니 마타도어라고 폄하해서도 안된다.
다만 관전자 입장에서 마치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의 경선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우리 정치가, 특히 선거가 지니는 자극이 아닐까?
[미디어펜=이석원 정치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