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훈 시사교양지 바이트 대표 |
2011년 전면적인 무상급식 찬반여부를 물었던 서울시 주민투표를 시작으로 하여 ‘무상(無償)’ 보따리를 풀어놓아 도떼기시장이 되어버린 19대 총선 그리고 선심성 복지공약 남발의 하이라이트였던 대선 등을 거치면서 한국은 무상 복지라는 허울 좋은 허상만을 좇고 있다.
1970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의 이론 경제학자 폴 새무얼슨의 명언 ‘공짜 점심은 없다’가 우리 생활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았음을 부인할 이는 없다. 당연히 복지도 공짜 점심이 될 수 없다. 그 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실 국가정책은 일정 정도의 강제성을 동반할 수밖에 없어서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국가의 복지 정책 역시 복지 재원의 원천인 세금 납부라는 강제성이 뒤따르기 때문에 국민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영역이다.
작금의 한국 역시 복지정책을 실현시킬 재원마련 방법이 난제다. 국민들이 복지의 확대는 반기면서도 복지비용 각출은 외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도중에 경상남도(이하 경남)는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했다. 다시금 ‘선별과 보편’의 갈래에서 복지논쟁에 불이 붙을 전망이다. 중앙정부보다 상대적으로 재정이 열악한 지방정부가 무상복지에 갖는 부담은 비단 경남만의 일이 아니었다.
복지정책이 폭발하던 시기부터 예산문제에 관한 우려는 복지정책의 양만큼 많았고, 그 우려는 적잖게 현실이 되기도 했다. 2013년에는 경기도가 14년도 무상급식 예산을 전액 삭감한 바 있고, 당시 타 지자체들 사이에서는 무상급식 재검토 바람이 불었으며, 무상보육 비용 부담을 두고 서울시와 정부는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복지는 ‘다 주거나 혹은 안 주거나’ 등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닌 굉장히 복잡하고 고려돼야 할 변수가 많은 영역이다. 사회발전수준, 경제발전수준, 사회성원들의 의식수준, 사회전반에 각종 경향 등 분배정의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게 ‘복지’다.
더불어 복지는 자칫 사회구성원 사이에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 수혜자와 재분배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복지는 양 측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로 연결될 수 있으며, 이해관계 충돌은 사회 역동성을 가로막을 수도 있기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복지 대상자에서 탈피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복지이며 무릇 복지는 사회 구성원이 자립과 자조 정신 즉, 스스로를 책임지려는 정신을 지니고 강화하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 /사진=자유경제원 |
다양한 변수가 고려되지 않는 복지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번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과한 복지정책은 생산성을 약화시켜 사회 전반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개개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세부담이 큰 기업들은 고용을 줄이거나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고, 복지비용의 각출 파이가 크게 되면 개개인들도 생산 활동의 의욕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지정책이 지나칠 경우 수혜자 역시 자립과 자조의 정신이 약화되어 인간 본연의 특징인 ‘자주성과 창조성에 의거한 발전을 꾀하는 존재’로서 살지 못할 수도 있다. 전면적인 복지는 오히려 복지 혜택이 꼭 필요한 이들에게 집중되지 못하는 정책적인 실책을 범하게 할 수도 있다.
공짜 점심 먹으려다가 삼 시 세끼 다 굶게 될 수도 있는 게 ‘복지’임을 우리는 인류사를 통해 확인했다. 수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국가라는 공동체에서 구현해야 하기 때문에 복지정책은 합리적이면서도 냉정하게 접근해야 할 영역이다.
감성에 호소할 게 아니다. 하지만 무상 복지 프레임에 대해 제동을 걸라치면 아직도 ‘어린 아이 밥그릇 빼앗으려고 한다’면서 감성에 매달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말이 고스란히 먹혀든다는 게 아쉬운 한국의 현실이다.
절대적인 평등 주장! 개인의 자유권을 제약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이에크는 저서 ‘노예의 길’에서 “인류는 절대적인 평등이 아니라, (지금보다는) 더 정의롭고 더 큰 평등을 바라왔다”면서 “사람들이 절대적인 평등을 바람직하다고 여긴다는 주장은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절대적인 평등을 많은 사람들이 옹호한다고 으레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해 타산적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스트 계획자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사회 구성원 각자의 욕구를 하나의 통일체로 묶어낼 수 없다’는 진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포퓰리스트 계획자들은 과업 내용이 분명한 절대적인 평등을 주장한다.
설령 절대적인 평등이 모래 늪이라 할지언정 말이다. 절대적인 평등에 모든 국민이 동조할 것이라는 착각이 국민은 자신과 직결된 이해관계 중심으로 국가 정책을 재단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계획자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은 허점이 없다면서 무지가 충만한 오만을 부린다.
▲ 2011년 전면적인 무상급식 찬반여부를 물었던 서울시 주민투표를 계기로 시장에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연합뉴스 |
계획자의 이 같은 오만은 ‘국가 만능주의’로 전화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별안간 ‘복지는 국가의 의무’라는 목소리가 세를 확장하고 있다. 한국의 헌법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소위 행복 추구권에 ‘인권’을 덧칠해 국민이 원하는 게 있으면 국가는 모두 들어줘야 한다는 주장들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 같은 주장들은 ‘행복 추구권’을 사회권(국가에게 요구한다고 해석)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권의 범주에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이해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행복은 본디 욕구 충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욕구는 개개인마다 양과 단상이 다르기에 행복도 천편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따라서 국가가 사회 구성원의 행복 찾기를 일괄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개개인의 자유권을 제약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복지 대상자에서 탈피시키는 게 '진짜 복지'
진정한 복지정책은 한 번의 패배가 평생에 걸쳐 패배자라는 낙인이 되지 않는 사회시스템 구축과 생산 활동이 곤란한 이들을 향한 사회적 보호 수단을 강구하는 데 집중돼야 한다. ‘모두를 위한 것’보다는 ‘필요한 이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한국의 복지 메커니즘은 큰 틀에서는 제도나 질적 수준이 높은 편이지만 복지 수혜의 긴요함이 절실히 요구되는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많이 가지 않는 특징이 있다(바이트 2012년 10월 호 잡지 중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는 사람 없게 해야’ 기사 中).
복지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향후 복지는 ‘선별과 집중’이라는 영역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복지는 자선과 기부, 개인의 이타심 등에 기초해 이뤄지는 게 옳다. 복지정책의 효과성을 감안할 때 작금의 국가 주도 형태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복지의 원천적인 공급자는 국민, 정확히 말해서는 국민이 내는 세금인 만큼 국가 주도의 복지정책은 이해관계 충돌 가능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면 복지정책이 오히려 사회 역동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될 수 있기에 국가가 주도하는 경향은 앞으로 줄어들어야 한다.
복지는 사회 구성원이 자립과 자조 정신 즉 스스로를 책임지려는 정신을 지니고 강화하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책임지려는 의지 없이 의존성만 높이게 되면 그 사회는 쇠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국가는 국민이 자립과 자조 정신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 더불어 정말로 국가차원의 복지 혜택이 필요한 구성원들에게 국가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복지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복지 대상에서 탈피시키는 것”이라고 미국의 전 대통령 레이건이 말한 바 있다. 현 한국의 복지논쟁과 교차해 보면 이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철훈 시사교양지 바이트 대표
(이 글은 20일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에서 주최한 '청년, 복지와 증세 문제를 말하다' 청년토론회에서 이철훈 시사교양지 바이트 대표가 발표한 주제 발표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