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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갈등과 분열정치 대권주자답지 않다

2015-04-11 10:47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박종운 연구위원
<특권경제 없애자는 취지 맞지만, 법 앞의 불평등을 더 가중시키자는 것은 오히려 약탈특권을 더 확대시키자는 것>

문재인 대표는 9일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취임 후 처음 이루어진 대표연설 일성으로 특권경제를 없애자고 하였다. 당연히 특권경제가 있다면 그 특권을 철폐하여야 한다. 그러면 철폐하여야 할 특권으로 그가 말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가 든 특권의 사례는 이런 것이다. 그는 부자감세를 반대한다고 하였다. 마치 부자에게 세금을 덜 낼 ‘특권’을 주었던 듯이 말한다. “대기업들에게 세금 깎아”준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그는 대기업을 부자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발 더 나아가 “대기업 사내 보유금은 540조입니다”라고 하는 말로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국민들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하고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로 저 돈을 털어야겠다는 마음까지 들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가 변호사 경력의 법조인이기 때문에 우선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즉 기업은 자연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인격일 뿐이다. 기업이 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은 아니다. 법인격으로서의 기업은 따라서 자연인인 부자와는 다르다. 기업은 자연인들의 법적 결합일 뿐이고, 따라서 결국 그 소득은 그 기업으로 힘을 합치고 있는 자연인들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고용 있는 성장을 추구하고자 또 외국인 기업을 유치하여 대한민국을 동북아시아의 허브로 만들고자 법인세율을 25%에서 22%로 인하한 것에다 대고 ‘부자’감세라고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법조인답지 않은 용어 사용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로 법인세율을 올리는 것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는 농부의 우화와 다를 바 없다. 그간 기업을 통한 시장봉사는 개인들 각각의 시장봉사보다도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기업을 통한 사람들의 결합은 더욱 확대되어왔다. 합명회사, 합자회사, 유한회사에서 이제는 주식회사로 규모도 커지고 돈도 모이는 등, 더욱 많은 사람들이 협력을 증진시켜왔다.

그 결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장경제 속에서 기업활동이 계속해서 황금알을 낳자, 안타깝게도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기업을 잡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져왔다.

기업을 위축시킬수록 사회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이 세계사적 경험이었다. 외국기업을 국유화했던 나라들이 더 이상의 외국인 투자를 받지 못해서 소탐대실의 결과를 낳았음이 입증되었다. 대한민국의 수출입국 경험, 수출자유지역을 통한 외국인 직접투자 허용 등이 성과를 보인 것과 대비되었다. 오히려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고용도 늘리고, 국부도 증진시키는 길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지금은 나라들마다 법인세를 인하해주더라도 공장을 유치할 수 있다면 바로 고용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그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표의 부자감세 반대 주장은 이러한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다. 세금을 올릴 때 외국 기업들이 더 잘 들어오고, 우리나라 기업이 사업을 더 잘 할 유인이 주어지는가?

세 번째로 기업의 이윤은 결국 관련자들의 소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소득이 늘면 세수가 증대된다는 점을 그는 무시하고 있다. 현재의 법제도를 보면 어떤 면에서는 법인소득세보다는 개인소득세를 징수하는 쪽이 훨씬 더 많은 세금이 걷혀질 수 있다. 개인소득세는 최고 세율이 38%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친시장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 때 35% 최고세율을 38% 최고 세율로 올렸다.

이렇게 해서 오히려 세법에 관한 한 법 앞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부자 감세 7년”이 아니라 부자증세가 이루어진 기간이었다. 근대 법정신인 법앞의 평등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가 이것을 외면하고 특권경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특권경제를 없애자는 말이 문맥상 맞으려면, 그는 오히려 이러한 세법 앞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법 앞의 평등을 세우자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부자 감세를 반대한다고 하면서, 안타깝게도 역으로 세법에 관한 한 법 앞의 불평등 대우를 더욱 심화시키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업이 과연 사람들의 돈을 수탈해가는 존재인가?

문재인 대표는 또 “돈이 특권층에게만 몰렸”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서민들이 모은 돈을 모두 대기업이 가져갔”다고 했다. “대기업규제완화의 결과는 더 처참합니다. 커피숍, 빵집, 치킨집, 떡볶이집까지 우리 골목상권이 다 무너졌습니다.”라고 했다.

시장경제의 본질을 이 이상 더 왜곡하기도 쉽지 않다. 시장경제에서는 조폭집단이 폭력으로 강매를 하지 않는 한 소비자가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경제다. 조폭집단이 폭력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현재의 북한이나 과거 소련과 같은 배급경제에서나 볼 수 있다. 시장경제에서는 소비자들이 한 푼 한 푼으로 매일매일 투표를 한다. 이 돈으로 하는 투표를 많이 받은 시장봉사자가 이윤을 많이 얻고 부자가 된다. 시장봉사자인 기업가는 따라서 소비자들이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쪽으로 찾아다니며 시장봉사를 하고자 한다.

만일 소비자들이 어떤 시장봉사자가 만들어낸 '좋은 것들(goods)'을 사지 않는다면 그 시장봉사자는 원가도 건지지 못하고 파산해버릴 것이다. 문재인 대표는 시장경제의 원동력이 이처럼 소비자 주권, 소비자 민주주의임을 보지 못하고 있다.

   
▲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지난 9일 국회연설에서 부자와 법인세율 인상을 주장한 것은 분열과 갈등을 부채질하는 선동이다. 부자들은 이명박정부이후 7년간 증세 부담을 해왔다. 법인은 자연인이 아니며, 법인세를 인상하자는 것은 황금알을 낳은 거위의 배를 가르자는 것이다. 공정경제를 강조하는 것도 소비자와 국민을 무시하고 생산자특권을 보호해주려는 반시장적인 발상이다. 문대표가 4.29재보선에 나서는 서울 관악을에 출마하는 정태호후보사무실에서 선거지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골목상권이 무너져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대기업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대기업이 잘못하고 있는데 소비자들이 사랑을 하고 편애를 보내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 빵집이 파리바게트에 밀리는 것은 어제까지 동네빵집에 가던 이웃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파리바게트에 가기 때문이다.

골목시장이 종합양판점(대형마트)에 밀리는 것은 어제까지 골목시장에 가던 이웃이 마찬가지로 주차가 편리하고 구매시간도 구애받지 않을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물건 환불조차도 자유롭고, 심지어 배달조차도 가능한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 가난한 소비자들의 선택 때문이었고, 소비자에게 더욱 높은 수준의 충성봉사를 하는 기업가가 소비자의 사랑을 받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간 골목시장 캐노피 씌우기, 주차장 만들기 등 많은 노력이 있어왔다. 그리고 정이 흐르고 특색이 있는 시장 만들기 등의 노력도 있었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시장현대화 외에는 방법이 없다. 재래시장들에 가면 과거 70~80년대 유통현대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마이카 시대가 되자 좁은 주차장과 복잡한 통행로가 과거 현대화시장을 소비자들이 애용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과거 현대화시장의 내부는 쇠락하고 길목에 있는 가게들만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새로운 변신을 하는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종합양판점이 생기자 소비자들이 여기로 몰리면서 유통의 주된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충성봉사를 막고, 유통현대화를 반대하고 ‘재래’시장을 고집한다고 이 추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다. 냉장고와 자동차 소유의 발전은 국가간섭주의적 의무휴일제를 사실상 무효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서민들이 모은 돈을 모두 가져간 적이 없다. 만일 서민들의 의사에 반하여 돈을 빼앗아 갔으면 그 대기업은 형사처벌 대상이다. 문재인 대표가 법조인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범죄인가도 특정해낼 지식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둑질이라고도 강도질이라고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 대기업이 돈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가난한 소비자들이 그들이 만들어내는 좋은 것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서비스에 돈을 주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치 서민들이 돈을 빼앗긴 것인 양 말한다면, 이는 정치인이 국민대표기구인 국회에서의 마이크를 잡고 국민들을 속인 것이 된다. 또 그렇게 말함으로써 시장경제 봉사자인 기업을 수탈자로 억울하게 몰아가고, 급기야는 반기업정서를 부추기는 것이 된다. 결국 시장경제의 주요한 원동력인 기업가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반시장경제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을 위한 ‘성전’? - 그는 대기업 귀족노조의 입장을 대변하는가?

문재인 대표는 “부채주도가 아닌 소득주도 성장으로 대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맥락에서 뚝 떼어내어 이 말만 본다면 정말 맞는 말이다. 부채주도 성장에 대해 케인스주의적으로 부채를 통해 소비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그는 제대로 이해한 것이고, 이것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했다면 올바른 주장을 한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반드시 소비자를 만족시킴으로써 소득을 얻는 길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면 올바른 주장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효수요 부족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야기되었다고 하고 유효수요 창출을 위해 은행권을 더 발행하고 재정확대를 하자는 케인스의 주장은, 소비자를 위해서 기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업을 위해서 소비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 경제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소비를 늘릴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부채 때문에 소비여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경제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와 같은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이미 1970년대에 폐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최근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과거 노무현 정부 때 주택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사람들이 빚을 내어 집을 장만하다가 이명박 정부 때 집값이 안정화되고 심지어는 떨어지면서 사람들이 고통을 심하게 느끼고 있는 경우에서 비롯된 측면도 크다. 소득의 상당 부분이 원리금 상환에 들어가다보니 다른 곳의 소비여력이 없어지기도 했다. 부채를 통한 소비는 후환이 두려운 것이다. 

근본적으로 부채주도의 성장은 한계가 있다. 이점을 지적했다면 그의 지적은 맞는 것이다. 그래서 이자율 인하가 경제회복의 원인인 양 하는 '초이노믹스'(최경환부총리 경제정책)는 방향이 어긋난 것이다. 일시적으로 이자 부담 경감을 가져오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더 큰 부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표가 말하는 소득주도 성장론의 방법론을 살펴보면, 안타깝게도 번영의 길에서 빗나가고 있다. 그는 “국민들은 불공정한 경제로 지갑이 비었”다고 한다. 그는 “‘소득주도성장’만이 내수 활성화를 통해 서민과 중산층을 보호하고 새로운 성장의 활력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얼핏 보아서는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소비자들의 선호에 잘 부응한 덕분에 기업이 규모가 커진 것이고, 그것도 세계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잘 봉사한 덕에 대기업이 만들어진 것이다. 기업들이 소비자들의 돈을 수탈해갔기 때문에 지갑이 비게 된 것이 아니다.

또 근본적으로는 오히려 중국 월남 인도네시아 등 신흥국들이 대한민국의 성장모델을 따라 배우고 품질 면에서 가격 면에서 더 좋은 것들을 세계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중소기업들이 활력을 잃게 된 측면이 더 크다. 국내에서는 임금인상으로 더 버티지 못하고 외국으로 나가거나, 낮은 임금에 와서 일할 우수한 내국인 노동자가 없어서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게 된 측면이 더 크다. 통일 독일처럼 더 노력하여 우수한 기술력으로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는 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과거 60~70년대에는 수출입국이 국가적 표어였고, 크게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70억 시장이 여전히 5000만 대한민국 시장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표의 말처럼 ‘내수 활성화를 통해 서민과 중산층을 보호하고 새로운 성장의 활력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새로 도래하고 새로운 경제법칙이 탄생한 것이 아니다.

국내는 시장이 너무 좁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 앞에 파리바게트가 생겨서 인기를 끌자 뚜레주르가 생긴다. 그러면 시장이 반토막이 난다. 거기에 던킨 도너츠가 생기면 시장은 1/3이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어렵다고 느낀다. 이것은 제한된 시장에서 다수 진입자가 봉사경쟁을 벌일 경우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이윤율 저하현상이다. 커피집도 치킨집도 모두 이런 경로를 통해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내수를 통해서 자생적으로 성장하자는 ‘민족경제론’은 과거 수출입국 시대에 DJ가 이를 주장했을 때나, 지금 선진국 시대에 문재인 대표가 그 비슷한 주장을 할 때나 여전히 틀린 경제이론이다. 결국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문재인 대표는 오히려 소득주도성장을 위해서 저축을 중시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자고 하고, 세계 시장에서 ‘샌드위치’에 치인 신세를 한탄하지 말고 소비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자고 이야기했어야 한다.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뉴딜 정책의 예를 들면서, 소득분배를 하면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루즈벨트의 말을 빌어 소득분배의 ‘성전’을 간접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 주장은 수출입국과 같은 대한민국 번영의 길에서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국민들을 이간시키고 싸움을 붙이는 것으로서 대한민국 정치가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왜 지금은 해외를 바라보지 않는가? 왜 지금은 정치지도자들이 70억 시장이 아니라 5000만 시장이 서민과 중산층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그릇되게 이야기하는가? 세계 소비자의 선호변화에 더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자고 해야 할 판에, 또 혁신을 위해 더 노력하자고 이야기해야 할 판에, 왜 고개를 돌려 국민들 간의 대립을 부추기는가?

그의 ‘성전’ 주장은 시장봉사자인 기업가들이 시장 민주주의의 결과물인 시장임금율로 사람들을 고용한다는 점도 무시하고 있다. 그의 소득주도 성장론이 임금인상이라면, 지금도 삼성전자 현대차 노동자들의 임금이 대한민국에서 최고수준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그들의 곳간에 540조 원이 있고, 그 돈을 나누어주자고 해도, 그것은 이미 높은 임금을 받고 있는 대기업 노동자의 소득만 올릴 뿐이지 중소기업 노동자의 소득을 올릴 길은 없다.

이처럼 사실상 대기업 노동자들의 소득을 올리자는 주장은 그래서 국민들 속에서는 시장임금율보다 훨씬 많이 받고 있는 귀족노조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의 ‘성전’ 주장이 국가에 의한 강제적 재분배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것 또한 잘못이다. 법조인 출신의 국회의원이라면 근대 시민사회 번영의 기초인 소유권을 존중해야 한다. 평등한 세법을 적용하는 것이라면 모르되, 가뜩이나 불평등한 세법을 더욱 불평등하게 만듦으로써 세금을 더 거두자고 하는 것이라면, 이는 국가에게 소유권을 경시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권력 이양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다.

오히려 가능한 한 법을 평등하게 적용하는 쪽으로 바꾸되, 자발적인 자선행위를 칭찬하고, 또 거두어진 세금을 사용할 때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회부조를 실시하는 것이 맞다. 불평등한 세법을 더욱 가중시키기보다는 형편이 나은 사람들에게 나가는 복지비용을 다이어트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국가가 그런 권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위임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조세와 정부의 사회적 지출을 통해 분배를 개선하는 것”만 이야기한다. 나아가 “서민의 지갑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불공정한 분배”라고 대립을 선동하는 이야기만 한다.

문재인 대표는 자신의 소득주도성장론이 서민들을 위한 것인 양 최저임금 인상이 그 핵심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말 법령 하나로 그런 천국이 올 수 있다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왜 이왕이면 더 화끈하게 평균임금수준으로 올리자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러나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경제외적 강제가 경제적으로 일자리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경제학의 연구결과들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시장경제에서 임금에 대한 정보교환과 직장이동 때문에 임금이 인상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국민들을 이간시키지 말고, 시장의 것은 시장에게 맡기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위임된 일들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경제라는 말만 많이 이야기한다고 경제정당이 아니다 - ‘공정한 경제’는 생산자독재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문재인 대표는 “2013년 전체 49만개 법인이 벌어들인 당기순이익 중에서 삼성전자, 현대차, 기아차 3개 법인의 이익이 37.3%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경제는 세계적으로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수출대기업을 지원하는데 국력을 소모”했다고 한다.

현상을 지적하는 데는 어느 정도 그럴듯하다. 그러나 인과관계 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대기업들은 국가의 지원에 의해서 성장한 것이 아니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휴대폰 시장에서, 자동차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세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아 성공한 것이다. 오히려 국내에서는 시장임금율 이상의 임금인상, 그리고 수도권 규제와 같은 온갖 규제 속에서 시너지효과를 더 낼 길을 차단당한 채 이루어진 성공이었다.

이들은 해외에 진출할 때도 유관 중소기업과 함께 진출한다. 물론 이들이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같은 느낌을 주게 하는 일을 종종 했다는 것은 맞다. 그래서 대기업 직원들의 구두 상 주문과 임의적 취소와 같은 반시장경제적 반계약적 행태는 극복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대기업이 연관 기업에게 중국이나 동남아와 같은 가격을 요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수준의 가격을 위해서 경영진단을 해주고 경영합리화를 해주면서 납품단가를 인하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함께 가자는 결의’의 소산으로 볼 수도 있기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냥 입찰을 통해서 기존 거래관계를 임의로 끊고 동남아 제품을 쓴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표가 나라를 이끌어갈 큰 정치인이라면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측면도 세심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문재인 대표가 경제정당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전환이다. 그러나 ‘새경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좁은 시야에서만의 ‘공정한 경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시장민주주의를 무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느 시대에나 생산자들이 원가와 적정 이윤을 바탕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생산자들의 그런 주장을 무시해왔었다. 소비자는 시장에서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였기 때문에, 생산자들은 원가와 자신들이 생각하는 적정 이윤도 포기하고 반값 세일을 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것이 시장경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경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시장에서 권력의 힘으로 생산자 주도성을 확립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과거 협동조합의 연합이 시장을 지배하려고 한 경제체제가 있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페이비안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이었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에서 실현했던 파시즘의 조합주의(corporatism) 경제였다.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공정한 경제’가 아니었고, 끔찍한 생산자 독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참혹한 2차 세계대전과 비극적인 사회주의 실험이라는 고난의 과정을 지나 이제는 소비자민주주의의 시장경제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있는데도, 우리가 특정 정치인의 관념적 이상에 입각한 선동 때문에 이미 실패했던 그 끔찍한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야할 이유는 없다.

또 문재인 대표는 ‘새경제’의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돈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인 나라로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얼핏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돈 때문에 문제라면 돈을 폐지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돈을 폐지하면 사람들은 무거운 물건을 들고 다니며 물물교환을 하는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돈이야 말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편리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말 좋은 매개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시장경제야말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만들어놓고 명령(주문, order)이 있을 시 즉각 대령하는 ‘이타주의(利他主義)’적 경제이고, 공공의 복리를 가장 증진시킬 수 있는 경제임을 알아야 한다. 시장경제처럼 사람이 먼저인 경제는 역사상에 없었다. 시장경제에서는 소비자가 많이 원하는 것이 포착된다면 그곳으로 돈이 몰린다. 그럼으로써 그 돈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더 잘 공급할 수 있는 공장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시장경제에서는 사람이 먼저이기 때문에, 돈이 더욱 중요해졌다.

문재인 대표는 “정부의 예산은 이제 물적 자본의 형성이 아니라 인적 자본의 축적을 위해 집중 투자되어야 합니다”라고도 했다. 일견 미래지향적인 발언으로 보인다. 인적 자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러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녀들 교육에 앞장서왔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돈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돈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조차도 소비자들이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인적 자본의 축적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천막치고 살 수는 없다. 건물도 도로도 스마트화되는 것은 함께 가는 일이다. 어느 것을 그만 두고 다른 것을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적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 싱가포르의 예처럼 ‘지식 기업(knowledge enterprise)’이 되도록 시장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국가가 대학 정원을 정하고 국가가 학과 통폐합을 인준하는 시대가 계속된다면 탄력적인 지식기업의 운용이 되기 힘들다. 우선 대학들이 제대로 된 지식기업으로 변모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한다.

그래서 시장경제의 충성봉사경쟁에 합당한 인재들이 길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적 자본 축적은 ‘우수한 노동력’을 길러내는 것만이 아니다. ‘우수한 기업가’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그를 위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속에서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의 인적 자본 축적론에는 아쉽게도 이런 미래지향적인 인적 자본 개념이 없다. 오직 “복지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며 동시에 강력한 성장전략입니다. … 사람에 투자하면, 생활비는 내려가고 삶의 질은 높아질 것입니다. … 소비가 진작되고, 투자는 확대될 것입니다”라고만 한다. 결국 그가 말한 인적 자본의 축적, 그리고 사람에 대한 투자는 복지혜택을 늘리자는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복지수혜자들의 수를 중산층과 상류층에게까지 늘림으로써 표를 더 얻기 위한 선거전술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결국 ‘새경제’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국가가 소유권을 무시하고, 시장봉사자에게서 봉사의 결과들을 더 약탈하여 돈을 마구 나누어주자는 이야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하지 말라.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지원에는 여야 간에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보편적 복지라는 무분별 복지에 대해서만 이견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제1야당 대표의 대표연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박종운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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