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60) 악마와 거래한 파우스트의 타락과 구원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태초에 뜻이 있었느니라!”,
“태초에 힘이 있었느니라!”,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
파우스트(Faust)가 삶의 원천을 궁구하고 하늘의 계시가 무엇이었는지 헤아리면서 계속 고쳐 쓴 잠언이다. 신은 인간의 말과 뜻, 힘과 행위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삶을 엮어나가는 원천으로 부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인생의 생존 도구로써 매우 상징적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까지 충분히 대변하기엔 왠지 허전하다.
<파우스트>를 읽고 나니 오히려 나에겐 마치 “태초에 유혹이 있었으니라!”라는 언명이 있는 것 같은 이미지가 퍼뜩 떠올랐다. 결국 파우스트의 실험적 삶의 궤적은, 신을 닮고자 노력하는 인간이 갖고 있는 신성(神性)과, 인간 자신의 욕망과 쾌락에 아무런 제약 없이 충실하고자 하는 악마성(惡魔性) 사이의 유혹과 갈등의 순례가 아니었던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파우스트>는 무한한 욕망과 쾌락에 탐닉하고자 하는 보편적 인간이 겪는 유혹과 갈등을 잘 대변한 것 같다. 파우스트는 학문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지와 무력감에 사로잡히고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다. 이는 내면 깊숙이 잠재되고 억압되어 충족될 수 없었던 쾌락의 욕구가 한 번에 솟구친 반란이 아니었을까.
파우스트는 모든 분야에 달통한 ‘박사’였지만,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비법은 터득하지 못한 백면서생이었던 셈이다. 쾌락에 대한 강렬한 유혹은 곧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쾌락을 얻고자 하는 일탈로 질주한다. 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와 서슴없이 계약에 나선다.
▲ 산책하는 파우스트와 제자 바그너, Friedrich Gustav Schlick (1804~1869), 1847-1850년 작 |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은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 내는 힘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악마가 인간의 내면에 함께 동거한다면 그 악마는 역설적이게도 “선을 창조해 내는 힘”을 가진 천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악마에 대한 내면의 저항은 선을 지키려는 의지를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마의 유혹을 “선을 창조해 내는 힘”으로 치환해 낼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다. 악마는 자신의 악마성의 위력을 맹신하고, 파우스트는 자신의 이성의 강고함을 믿기에 서로를 시험할 내기를 하게 된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하느님에게 파우스트를 타락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자신하며 내기를 걸자고 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이 잠시의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메피스토펠레스와 하느님의 내기,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내기가 쉽게 합의될 수 있었던 것은 각자 ‘태초에 있었던’ ‘말과 뜻’, ‘힘과 행위’와 자신의 속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메피스토펠레스는 쾌락의 유혹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약점을 잘 안다. 또 파우스트는 모든 영역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자신의 이성의 힘을 과신한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이 이성을 “어떤 동물보다 더 동물적으로 사는 데 써먹고 있”다고 인간의 아픈 곳을 날카롭게 치른다.
하느님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315-317)
하느님은 인간의 악마성과 신성(神性) 모두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준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유혹에 빠져들어 방황할 위험성을 충분히 알면서도, 스스로 올바른 길을 향해 되돌아가려 노력하는 선한 심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어떤 유혹도 물리칠 그런 선한 심성을 가졌을까? 아니면 최소한 유혹을 절제할 강력한 이성을 지녔을까? 파우스트 자신은 양자 모두를 겸비했다고 확신했다.
“신과 닮은 나는 이미 영원한 진리의 거울에 아주 가깝다 생각했고,
하늘의 광채와 밝음 속에 노닐면서
속세의 아들이란 탈을 벗어버렸다.”(614-617)
하지만 자신이 신과 닮았다고 확신한 파우스트는 지령(地靈)의 부정적 응답에 절망한다.
“신을 닮은 내가 아니었더냐?
그런데 그대마저 닮질 않았다니!”(516-517)
“나는 신들과 닮지 않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흙더미를 파헤치는 벌레와 닮았다.
흙먼지를 먹으며 살아가다가
나그네의 발길에 밟혀 파묻혀버릴지도 모른다.”(652-655)
파우스트는 이렇게 자조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행동’에 나서기로 한다. 그는 “인간의 용기는 신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 환상 속에 고통을 만들며 자신을 저주하는 저 어두운 동굴 앞에서도 떨지 않는다는 것”임을 믿는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1112-1117)
파우스트는 자신 안에 깃든 두 개의 영혼 사이의 강력한 갈등을 체감한다. 그럼에도 파우스트는 결국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끌려 내기를 걸고 만다.
“이건 엄숙한 약속이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땐 자네가 날 결박해도 좋아.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다.”(1698-1702)
파우스트는 자신이 쾌락에 빠져 황홀한 순간에 머물겠다고 하는 선언하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가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는 내기를 한 것이다. 내기에 지는 순간 그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소유가 되어 악마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파우스트는 ‘너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할만한 극미(極美)와 황홀경(怳惚境)의 순간을 결코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파우스트와 악마의 계약은 인간의 영혼의 힘에 대한 시험이다. 파우스트는 쾌락의 늪을 넘어 고귀한 자아를 구현해 보고자 하는 거룩하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마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운명적 대결을 인류를 대신하여 자신이 떠맡은 것처럼 말이다.
“쾌락이 문제가 아닐세,
이러한 도취경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일세.
고통스러운 향락, 사랑에 눈먼 증오,
속이 후련해지는 분노에.
지식에의 갈망에서 벗어나 나의 마음은
앞으로 어떤 고통도 감수하면서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을
내 내면의 자아로 음미해 보려네.
내 정신으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을 파악하고,
그 기쁨과 슬픔을 내 가슴에 쌓아올리면서
나 자신의 자아를 온 인류의 자아로 확대시키려네.”(1764-1774)
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계약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인간의 나약한 심성의 한계에 도전한 그의 담대한 기상은 변함없이 발휘될 수 있을까? 파우스트는 악마의 마법으로 젊음을 찾고 순결한 시골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하며 달콤한 사랑의 쾌락을 맛본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사랑을 막아서는 그레트헨의 오빠를 죽이게 되고, 그레트헨 역시 죄책감에 자살한다. 파우스트는 악마의 인도로 지하세계로 내려가 그레트헨에게 용서를 받는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에 대한 진실을 사랑을 깨닫고 현세로 구해오려 애쓰지만, 파우스트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 괴테의 초상화, Friedrich Gustav Schlick (1804–1869), 1828 작, 사진 G.Meiners |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유원지에서 불꽃놀이의 즐거움을 맛보게도 하고, 고전적 발푸르기스 축제의 밤의 환락에 빠지게 한다. 또 파우스트의 조수 바그너가 발명한 인조인간 호문쿨루스(Homunculus)의 인도에 따라 먼 과거로 돌아가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도 한다.
“인간다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선
사랑이 고귀한 두 사람을 가깝게 하지만,
신과 같은 기쁨을 맛보기 위해선
사랑이 귀중한 세 사람을 만들어놓아요.”(9699-9702)
헬레나의 말처럼 파우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헬레나와 결혼하여 아들 오이포리온까지 얻으며 ‘신과 같은 기쁨’을 맛본다. 하지만 오이포리온은 쾌락을 탐하고, 전쟁의 충동에 사로잡혀 전쟁에서 악전고투하다 죽고 만다. 그와 함께 헬레나도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마법의 도취에서 깨어난 파우스트의 팔에 헬레네의 옷과 면사포만 덩그러니 남는다. 파우스트의 쾌락과 ‘신과 같은 행복’도 일장춘몽이었던 셈이다.
파우스트는 쾌락의 허망함 속에서도 악령을 이겨내려는 질주를 계속하려 한다. 하지만 ‘근심’의 악령에 의해 장님이 되고 만다. 외부를 볼 수 없을 때 내면을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비로소 내면의 지혜와 이성에 다시 빛을 비추고 자신의 소명을 깨닫는다. 그의 마지막 도전은 전쟁과 경제적 파산에 직면한 황제를 구하는 임무다. 그는 드넓은 간척지를 개간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헌신한다.
파우스트가 장님이 되고 내면의 광명으로부터 얻은 지혜는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11575-11586)
파우스트는 이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세상을 떠난다. 파우스트와 악령의 대결은 끝났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내기에서 진 파우스트를 이렇게 조롱한다.
“어떤 쾌락과 행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무쌍한 형상들만 줄곧 찾아 헤매더니,
최후의 하찮고 허망한 순간을
이 가련한 자는 붙잡으려 하는구나.
내게는 억세게도 항거한 놈이지만,
세월 앞엔 별 수 없이 백발이 되어 모래 위에 누웠구나.
시계는 멈추었다-”(11587-11593)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는 파우스트가 극치의 쾌락에 도취되어 외쳤어야 할 말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걸 확신했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오히려 악마의 덫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광명의 지혜에서 얻은 고귀한 소명에 투신했다. 이를 통해 얻은 자신과 백성의 공유된 자유와 행복의 순간을 그는 영원히 멈춰 세우고 싶은 아름다운 순간, 최고로 행복한 순간으로 선언했던 것이다.
파우스트가 분명히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를 선언하는 순간, 외형적으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승리가 확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자가 기대한 ‘말’의 순간에 내포되어 있는 ‘뜻’이 상반되었다. 그렇다면 파우스트가 승리한 것인가? 아니면 무승부인가?
맞다. “시계는 멈추었다.” 사실 파우스트가 생명을 거두는 순간 이미 누구도 승자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멈추어야 할 순간’은 이제 어느 누구의 것으로도 실존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메피스토펠레스 그 역시 파우스트 내면에 내재한 악마성(惡魔性)의 한 투영으로 본다면, 파우스트가 죽음으로써 메피스토펠레스가 회수하여 지배하고자 했던 파우스트의 영혼 자체도 그가 관장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가 죽음으로써 빠져나가는 그의 영혼은 내기의 승패를 떠나 메피스토펠레스의 몫이 아닌 것이다. 천사들의 노래가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이제 영혼이 가야할 영역이 다른 힘이 지배하는 곳임을 암시해준다. 결국 파우스트는 천상의 심판으로 구원되었다.
“하늘이 보낸 자여,
천상의 겨레들이여.
죄지은 이 용서하고,
티끌 된 이 살리고자
조용히 날개 펴고 따르다.
여유 있게 줄을 지어
둥실둥실 떠들면서
삼라만상에
다정한 자취 남기어라.”(11676-11683)
“영들의 세계에서 고귀한 한 사람이
악으로부터 구원되었도다.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그에겐 천상으로부터
사랑의 은총이 내려졌으니,
축복받은 무리가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게 되리라.”(11934-11941)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 그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상을 떠나는 순간, 둘 사이의 약속의 이행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천상은 하느님의 영역이다. 파우스트는 바로 천상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파우스트는 숱한 관능적 쾌락에 빠지고 죄악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악마와의 긴장과 대결을 멈추지 않았다. 또 장님이 된 말년에는 숭고한 지혜를 깨달아 세상을 구제하려 애썼다. 이런 그의 열정과 헌신이 영혼의 구제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레트헨에 대한 죄를 뉘우치고 진실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파우스트, 나라의 환란과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매진하던 그의 인류애가 그의 죄과를 용서받게 했던 것이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악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는 치열한 정신을 고양시키고,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나아가 사회적 책임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
파우스트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 갖가지 악행을 저지른다. 하지만 괴테는 세속의 선과 악의 개념을 다르게 투영했다. 행동, 형성, 무언가 생성해 내려는 노력이 선인 반면, 행동의 정지, 멈춤은 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미완성의 존재여서 끊임없이 무언가 '되어감'을 향해 노력하고 방황하는 숙명적인 존재다. 파우스트가 죽은 후에 하느님의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비극적이지만 무조건적인 활동성(자기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악마가 깔아놓은 유혹의 연속이다. 돈, 권력, 쾌락이 모든 인간에게 달콤한 추파를 쉬지 않고 보낸다. 우리 곁에, 그리고 우리 안에 메피스토펠레스가 한번 채이면 빠져나오기 힘든 덫을 들고 서성거린다. 최고의 쾌락과 성취를 맛보며 악마의 노예로 전락하는 숱한 영혼들이 넘친다.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파우스트처럼 갈등과 고뇌 속에 발버둥을 치는 경우도 있다.
파우스트는 어떻게 하면 악마와의 거래에서 어떻게 해야 승리하고 구원받는지 보여준다. 파우스트는 유혹과 악행 속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했다. 숱한 죄를 지었지만 그가 구원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렇다면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노력하는 인간인 한. 하지만 악마와의 거래에 너무 오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 일이다. 성완종 리스트로 세상이 떠들썩한 요즘 <파우스트>을 읽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한번쯤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 추천도서: <파우스트 1,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1권 (2013, 55쇄), 272쪽. |
▲ ☞ 추천도서: <파우스트 1,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2권(2013, 50쇄), 41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