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이번에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사죄'는 없었다.
아베 총리는 29일(현지시간) 일본 총리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가진 미국 의회 연설에서 군 위안부 문제 언급없이 "아시아에 고통을 줬다"고 연설했다.
앞서 하버드대학에서 나온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질문에도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 피해자들에 대해 깊은 고통(deeply pained)을 느낀다"는 면피성 발언뿐이었다.
2012년 노다 요시히코 민주당 내각이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용한 ‘사과'(apology)와 ‘반성’(remorse)보다 후퇴한 것이 분명하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나선 아베 총리는 28일(현지시간) 느닷없이 A급 전범 용의자였던 자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입에 올렸다.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협의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베 총리는 “일본이 1960년대 추진했던 미일 안보조약 개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일본 내부에서도 논란을 불러온 집단 자위권 행사 용인 방침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아베 총리는 55년 전 외조부의 결단을 정당화하는데 주력했고, 이 때문에 과거로 회귀한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모습을 평정심으로 지켜보기란 힘든 일이 분명하지만, 이쯤에서 세습된 아베 정권을 냉철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731부대’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아베 총리를 보듯이 역대 총리 가문들의 세습정치가 가능한 일본은 한마디로 ‘세습 민주사회’일 뿐이다.
아베 총리가 ‘정상국가’를 꿈꾸면서 미국과 전 세계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협의에 성공했지만 국내 언론을 통제해 논란을 야기시켜온 아베 정권을 놓고 결코 평등 민주사회라고 말하기 힘들다.
일본의 세습민주주의는 천황을 신성시하는 교조주의와 스스로 다양화에 반대하는 반자유주의에서 기인한다. 이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성향이었고, 지금 아베 총리는 외조부의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진짜 정상국가’의 뒷덜미를 잡아당기고 있는 형국이다.
▲ 아베 총리가 29일(현지시간) 일본 총리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가진 미국 의회 연설에서 군 위안부 문제 언급없이 "아시아에 고통을 줬다"고 연설했다. 이번에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사죄'는 없었다. /사진=TV조선 캡처 |
대다수 일본인들이 또 다른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을 때 강경 우파가 자라났다. 가장 비참했던 난징 대학살, 만주국 점령, 진주만 공격을 수행했던 지도자, 천황의 참모도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투옥됐지만 오로지 단 한 사람, 일본 천황은 처벌에서 제외됐다.
연합군 총사령부에 의해 전범자들이 처벌되고 새로운 헌법도 만들어졌지만 일본 천황은 살아남았고, 천황제도 유지됐다. 당시로서는 원자폭탄까지 맞은 일본을 완전히 궁지로 몰아넣지 않기 위한 조치였을지 몰라도 아직까지 일본 지도자들이 전범자들을 합사해놓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하지 않는 배경이 됐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는 패전 직후 처형된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7명의 A급 전범자의 운명을 피해갔다. 특히 악명이 높았던 도조 전 총리가 법정 피고인석에 설 때 일본인들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암거래까지 했다는데, 그는 법정에서도 “일본인 중 감히 천황의 의지에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기시 전 총리는 진주만 공격 당시 도조 장군 밑에서 상공대신을 지낸 인물이다. 전쟁 기간 중 점령지를 다스리며 군수품과 노예 노동력을 관리하는 모든 것을 책임졌다. 기시 전 총리가 A급 전범 용의자로 스가모 교도소에서 3년간 복역하던 중 감방 동료였던 사사가와 료이치를 만나 친해졌고, 1930년대 파시스트 정당의 대표이자 중국에서 악명 높았던 폭력배인 사사가와가 도박사업으로 축적한 검은 돈으로 실력자로 올라섰다는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 태생으로 지방 사무라이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기시는 일본 우파의 전형적인 대표 인물이다. 역사가들은 기시를 반자유주의자, 국가사회주의자로 분류한다. 기시는 1953년 ‘방임 정책’에 반대하면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믿지 않음을 공식 선포하기도 했다.
기시를 선두로 하는 일본 우파는 냉전 체제에서는 미국의 편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헌법 개정으로 바뀐 천황의 세속적 지위에 대해서는 불만이 컸다. 그들은 일본의 전쟁이 정당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이때부터 헌법에 관한 정치적 논쟁을 시작했다. 이들의 주된 주장은 “적어도 다른 참전국보다 잘못한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기시 전 총리가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당시 일본인들은 미국의 전쟁에 휘말려들 것이라며 비판했다. 결국 혹독한 여론 반발로 기시 전 총리는 총리직을 사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15년 아베 총리는 결국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면서 자신의 혈통 옹호에 적극 활용했다.
이번에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표방한 오바마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극진히 환대한 것은 일본과의 방위협력지침 개정으로 국방예산 절감 효과를 거두는 것은 물론 이를 통해 의회와의 갈등마저 잠재울 수 있다는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국가화’를 추구해온 아베 정권 역시 미국과 부동의 동맹임을 재천명하면서 재무장화 행보에 본격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면서 동북아 지역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겠다는 의도도 포함된다.
기시 전 총리는 당시 남동생 사토 에이사쿠를 통상산업성 장관으로 등용했다. 이후 총리직에 오른 사토는 “나의 정책은 미국에 전적으로 협력해 세계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다”라는 발언을 남기면서 197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사토 전 총리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유는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이른 바 ‘비핵 3원칙’을 내세운 공로였다. 하지만 최근 아베 정권은 무기수출 3원칙을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미일 양국의 밀월관계가 깊어지는 지금 한일관계는 다시 변곡점을 맞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기보다는 ‘미래’를 강조하면서 한국 입장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베 가문이 추구해온 ‘꼼수’와 레임덕 위기를 벗어나려는 오바마 정권의 ‘한수’와 상관없이 한반도 통일 과업을 짊어진 우리가 추구할 것은 ‘실리외교’로의 완벽한 탈바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