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에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주제로 총 7회에 걸친 연속토론회를 개최한다.
제1차 토론회는 5월 13일 수요일 오전 10시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에서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나?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제로 남정욱 숭실대학교 교수의 발제로 진행됐다. 토론자로는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조우석 문화평론가 등이 참석했다. 조우석 평론가는 토론문에서 이승만에 대한 '누명'의 근저에 反대한민국적 발상이 깔려 있음을 지적했다. “북한 지역에 부르주와 민주주의 정권을 세우라”는 스탈린의 지령이야말로 분단의 '원흉'임이 드러났는데도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사실과 다른 주장을 이어가는 세력들이 있다는 주장이다. 아래는 조우석 문화평론가의 토론문 전문이다. 자유경제원의 제2차 토론회는 오는 28일 이어진다. [편집자주] |
▲ 조우석 문화평론가 |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제자리 찾아주기를 위해 그를 둘러싼 누명 벗겨주기 연속 토론회가 자유경제원에서 마련된 걸 환영한다. 이 작업이 우남에 대한 재인식의 대중화 계기가 되길 희망하는데, 첫 회 주제를 ‘우남=민족분단의 원흉’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인 것도 자연스럽다.
한국정치에서 전임 대통령 흠집 내기 풍토는 고질적으로 남아있다. 언제까지 후임자가 전임 지도자를 부정해 정치적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관행을 계속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우남 이승만에 씌워진 각종 누명이란 일단은 이런 풍토 탓이다.
여기에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가치를 애써 외면하려는 당파적이고 정치적 견해가 그동안 한국 지식사회에 지배적 담론으로 작동해왔다. 전임 지도자 죽이기와 좌편향의 담론, 이 두 개가 겹쳐진 결과 우남은 ‘몹쓸 지도자’로 색칠돼왔는데, 이 과정을 음미해보려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글에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공헌한 두 개의 기둥으로 건국혁명과 부국혁명의 의미를 부각시키려 한다. 남정욱 교수는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 완전히 무지하거나, 악질적 정치선동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우남에 대한 괜한 돌팔매질이나, 이 나라의 해방 이후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도적인 곡해란 철두철미 바보짓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올바른 판단이다.
즉 대한민국 건국에 담긴 세계사적 차원의 의미는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한 북한의 참혹한 역사 실패와 너무도 대조적인데, 지금도 우남을 분단의 주범으로 모는 시각은 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의 역사적 무게를 등한시한 단견에 불과하며, 수정주의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 앞으로 더욱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우선 한국정치에서 고질인 전임 대통령 때리기 풍토를 지적해야 한다. 이 문제야말로 한국적 조급주의 내지 근시안적 시야의 차원인데, 당장 이웃 중국의 대륙적 마인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대로라면 ‘덩씨 성을 가진 작고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덩샤오핑이야말로 중국적 지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에겐 확실히 계왕개래(繼往開來)의 대륙적 마인드가 읽혀진다. 계왕개래, 옛것을 이어받아 내일의 변화를 열어간다는 이 사자성어는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으로 이어지는 역대지도자들이 즐겨 쓴다.
그만큼 저들은 유연한데, 실제로 덩샤오핑은 1978년 재집권하자 우향우로 내달렸다. 하지만 마오쩌둥을 전면 부정하는 ‘중국판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을 벌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그건 절묘한 선택인데, 개혁개방을 하되 중국의 분열 가능성은 막자는 차원이었다.
그건 실로 지혜로웠다. 마오쩌둥에게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등 과오는 너무도 끔찍했지만, 대륙 통일과 현대중국 건국의 공적은 기꺼이 인정하자는 쪽이었다.
현대중국 건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신화를 깰 경우 중국이 무너질까 걱정스러웠다는 게 덩샤오핑의 솔직한 판단이며, 현재 중국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은 거의 없다.
우리는 중국 쪽 분위기와 많이 다른데, 체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사회적 신화마저 허물어뜨리는 걸 일삼는다. 그걸 과단성 내지 리더십으로 포장하고, 눈먼 언론과 대중들은 박수를 쳐준다. 당장 덩샤오핑과 대비되는 이른바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역대 정권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주요 정책목표에 신(新)자 붙이길 아주 즐겨했다. 그게 끝내 섣부른 역사 바로 세우기로 치달았는데, 그때부터 한국사회의 해체가 시작됐다는 게 많은 이들의 판단이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더 했다. 김대중 정부는 걸핏하면 제2의 건국이란 말을 하곤 했다. 미국 같은 사회에서 제2의 건국 같은 섣부른 말이 어디 쉽게 나오던가?
아까 지적대로 김대중 심리의 바탕에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에 승복하기 어렵다는 반대한민국 정서가 은연중 숨어있다. 김대중의 경우 1998년 건국 50주년 행사를 정부 차원에서 했지만, 매우 복합적인 정치적 동기에서 등 떠밀려 시늉만 했다.
후임자 노무현 대통령은 더 나간다. 그의 악명 높은 발언 중 하나가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시대였다.”인데, 현대사에 대한 저주가 섬찟할 정도다. 필자는 그걸 역사 허무주의라고 규정하는데, 일본식 자학사관(自虐史觀)과는 또 달리 현대사와 역대 지도자에 대한 동시다발적 폄하로 나타난다.
옛것에 토대를 둔 계왕개래의 변화는커녕 앞서의 성취를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짧은 시야 그리고 조급주의 심리는 앞 세대를 먹칠하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이중삼중의 폐해를 가져온다. 기회에 다시 물어본다.
우리에게 좋은 대통령이 정말 없었나? 좋은 대통령이 없이 어떻게 대한민국이라는 20세기 기적의 신데렐라 국가가 출현했고, 지금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가?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은 누구라도 나름의 역할이 없지 않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도 상당수 우파는 내란에 가까운 통치행위를 했다고 공격하지만, 탈권위주의라는 시대적 소명을 일부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미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정부론을 제창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사진=연합뉴스 |
2년 뒤 탄생 100주년을 맞는 박정희의 경우도 그러한데, 야박한 평가가 주류다. 그의 공과 과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평가하려는 이들이 그만큼 많지 않은 탓이다. 사후 한세대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박정희하면 부르르 떠는, 못난 무리가 적지 않은데, 한국사회에 그만큼 균형 잡힌 지성(知性), 전체를 보는 지성이 부재하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포괄적으로 말해 부국 대통령 박정희는 건국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과 함께 한국현대사의 아주 특별한 이름이다. 우남이 역사의 큰 그림을 그렸던 건국지도자였다면, 박정희는 그렇게 어렵게 탄생한 대한민국호에 청년의 기상과 에너지를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두 지도자는 건국혁명과 부국혁명의 위대한 조타수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생전의 박정희조차 전임 대통령 평가에서는 조금 전 지적했던 짧은 시야와 조급주의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쿠데타 집권 초기에 그러했는데, 그 탓에 ‘실물크기의 우남’, ‘건국사 속의 우남’을 읽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서울 남산에 백범 김구 동상을 세우는 행위 등을 그가 앞장서서 했고, 지금의 좌파가 백범의 상해임정을 과대평가하며 건국과정을 부정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다행이 박정희는 뒤늦게 우남의 유산을 재확인했다. 그래서 1965년 우남이 타계했을 때 그를 기리는 조사는 가히 명문으로 회자된다. 실제로 조사는 우남을 “건국의 원훈(元勳)”으로 높이 평가했다.
박정희의 부국혁명 역시 우남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는 건 상식에 속하는데, 그런 건국지도자와 부국 대통령의 연결이란 헤겔의 레토릭대로 역사의 간계(奸計)가 맞다.
둘째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공헌한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인 건국혁명의 의미 문제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야말로 우남을 분단의 원흉으로 모는 짧은 인식을 벗겨준다. 그는 그 시대 국내외 지도자 중 세계사적인 시야를 가졌던 사람이고,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분명히 하는 대한민국을 출범시키는데 성공했다.
67년 전 건국이란 개항 이래 진통해온 한국사회가 극적인 진화를 했음을 알리는, 실로 역사적 순간이었다. 원로 서양사학자 이인호 교수가 대한민국 건국을 1776년 미국 건국혁명,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같은 인류사의 반열에서 음미해야 할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맞는 말이다.
미국 건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국민주권의 정치 원리를 최초로 제도화하며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대한민국 건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문명의 파도가 20세기 중반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상륙했음을 보여주는 또 한 번의 기념비적 역사로 평가된다.
대한민국 건국에 담긴 세계사적 의미는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한 북한의 참혹한 역사 실패 때문에라도 너무도 대조적인 성취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우남을 향해 분단의 주범을 모는 시각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은 여전한 좌파적 시각의 득세, 그리고 ‘분단=근대민족국가의 미완성’으로 몰아가는 민족주의 정서가 작용한 탓이다.
이를테면 “좌ㆍ우파,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욕먹을 객관적인 대한민국사”를 표방한 단행본 『좌우파가 논쟁하는 대한민국사 62』를 쓴 정치학자 김영명(한림대 교수)은 항일투쟁과 건국과정의 정통성은 평양 김일성이 더 있고, 이후 근대화작업의 공헌은 서울 이승만-박정희가 더 있다는 주장을 했다. 세상에 이 따위 편의주의적이고 기계적 구분도 있을까? 사실(史實)과 무관한 이런 판단을 하는 그는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이다.
먹물 특유의 기회주의 성향에 속물(俗物)근성으로 가득한 현대사 학자와 국내 학계의 다수는 그쪽에 선다. 아니 그런 가짜 중립의 입장을 가진 이도 드문 게 현실이다. 다수의 지식인들은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한독당의 김구 식 민족주의 정서를 가졌거나, 운동권식 NL마인드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이다.
상식이지만 해방 1개월을 약간 넘긴 1945년 9월 20일 “북한 지역에 부르주와 민주주의 정권을 세우라”는 스탈린 지령이야말로 사실상 민족분단의 시발점이 아니던가?
그걸 1993년 2월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단독보도했고, 이정식 교수를 포함한 국내외 학자들 사이에 규명이 끝났으며, 수정주의 사관이 얼마나 허깨비인지를 규명했던 게 아닐까?
“스탈린의 지령은 북한 지역에 단독 정부를 세우라는 명백한 지시였다. 조선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된 지 37일만에 내려진 이 지령은 해방후 북한의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방 후 한반도에서 미소관계의 진전과 더불어 한국현대사 전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끼쳤다. 이 지령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이었고, 남북의 재통합, 즉 민족의 재통일을 위한 모든 논쟁과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논문‘냉전의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스탈린의 한반도 정책, 1945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권 수록)
상황이 이러한데 아직도 이승만 단정의 원흉으로 모는 이들은 해방 이후 모스크바 지령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한독당의 김구 식 좌우합작을 지지하려는 음험한 정치적 배경을 가졌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모른 채 분위기에 편승해 그런 주장을 펼친다면 철지난 NL 얼뜨기란 지적을 받아야 옳다. 해방공간에서 좌파의 그런 정치 프로그램을 따랐을 경우 이른바 단독정부는 등장하지 않았으리라. 우남의 능동적이고 선제적 대응노력이 없었을 경우 당시 정치사회의 역학으로 판단하건대 속절없이 그쪽으로 흘러갔을 개연성은 거의 100%였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꽃 피운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존재조차 없었을 것이고, 꽃도 피우기 전에 김일성 전체주의 세력에 흡수됐을 것이라는 가정이 합리적이다. 그 전후에 혹심한 내란상태 경험도 피할 수 없었으리라. 최선의 그림을 그릴 경우 지금의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통일베트남의 경제력과 통합력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는 수준의 통일조선으로 숨만 쉰 채 연명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북한지역이 사실상 동북3성의 하나로 사실상 흡수된 상태이지만, 한반도의 유구한 옛 질서였던 ‘오래된 악몽’옛 조선의 정체와 가난의 땟국물에서 멀지 않았을 것도 분명하다. 이런데도 ‘이승만=단정의 원흉’으로 모는 이들은 뭘까? 역사의 철부지 무리에 불과하지 않을까? /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