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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 도운 인도인 메논과 모윤숙의 사랑

2015-05-18 12:44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5월 18일 방한하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로 인해 한국에서 인도 붐이 일고 있다. 그는 ‘모디노믹스’(Modinomics)라 불리는 인도판 ‘한강의 기적’을 통해 인도를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지도자다. 그런데 인도인으로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도운 결정적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으로서 ‘유엔 감시 하에 남한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성사시킨 K. P. S. 메논(Menon)이 그 주인공이다.

K. P. S. 메논의 본명은 쿠마라 파드마나바 시바샹카라 메논이다. 인도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하고 샌프란시스코 유엔창립총회의 인도 대표, 주중 인도대사를 역임했다. 그의 부인 아누지 여사는 인도 국회의장을 지낸 나이르(B. N. Nair)의 딸이다. 메논은 중국 대사로 부임할 때 낙타를 타고 125일에 걸쳐 히말라야와 실크로드를 탐험 여행을 했는데, 그 당시의 체험을 『델리에서 충칭(重慶)까지』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메논은 주중 인도대사로 근무하던 중 유엔이 파견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일원으로 내한했다. 메논은 1948년 1월 8일부터 3월 18일까지 한국의 건국과 관련된 유엔의 결정이 진행되는 숨 가쁜 시기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외무부장관으로 영전하여 본국으로 귀임했다. 4년여 외무부장관직을 수행한 후 1952년 소련 주재 인도 대사로 부임하여 9년여 근무했다.

메논의 한국에서의 활동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중요한 관련이 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본회의는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해 남북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미국 안을 43 대 0으로 채택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독립정부가 수립된 후 7월 1일까지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결의를 했다.

   
▲ 1948년 1월 8일에 온 유엔한국위원단의 의장 K.S.P 메논. 메논은 유엔에 가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강력 요구하여 5.10 제헌의원 선거가 가능했고 이승만이 대한민국 지도자라고 연설한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공로자이다.
유엔한국위원단 의견 엇갈려

1948년 1월 8일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60여 명이 한국에 도착했다. 위원단은 1월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회의를 열고 메논 박사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1월 14일 서울운동장에서 2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위원단 환영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1월 22일 소련의 주유엔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소련 점령 하의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렇게 되자 남한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입장이 두 갈래로 갈렸다.

이승만은 시종일관 유엔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 내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1월 25일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고 했으나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2월 10일 김구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않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총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유엔한국위원단도 국가별로 의견이 갈려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캐나다와 호주는 중립을 표방했으며, 시리아 대표는 노골적으로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공산 측에 유리하게 활동했다. 의견이 분분하자 메논은 뉴욕으로 가서 유엔총회의 의견을 듣기로 결정했다. 사실 메논을 비롯한 인도의 입장은 ‘한국의 부자연스러운 분단을 영구 고착화할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메논은 한국 도착 이틀 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북한에도 애국적인 지도자가 있으며, 독립도 중요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단합하여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애매한 내용의 연설이 계속되자 이승만과 김구는 자리를 박차고 퇴장했다. 또 유엔총회의 의견을 듣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전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나라는 세워질 것이며 어떤 지도자든 국민의 지지를 받는 분이 유엔 소총회에 소개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것이 유엔한국위원단의 입장이었다.

메논, 유엔에서 “남한에서의 총선거” 요구

당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좌우합작이 가능한 중도파 김규식을 한국의 지도자로 밀고 있었고, 메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메논은 2월 19일 유엔 소총회에 참석하여 유엔한국위원단 의장으로서 한국 사정을 설명하고 “유엔은 빈손으로 조선을 떠날 수 없다.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는 별개 정부가 총회의 결의에서 규정된 바와 같은 중앙정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보다 의견이 일치한다. 이승만은 전설적인 국민적 지도자다”라고 연설했다.

이에 메논은 이승만이 주장했던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승인해 줄 것을 촉구했으며, 김규식이 아닌 이승만을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적 지도자로 소개했다. 이 연설을 들은 유엔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유엔위원단이 활동 가능한 남한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을 가결함으로써 역사적인 제헌의회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실시될 수 있었다.

‘남한지역에서의 총선 실시’라는 대업(大業)을 성사시킨 메논이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승만은 그를 얼싸안고 목메어 울었다. 메논이 본국 정부의 의견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과정의 배후에는 모윤숙이 존재하고 있었다.

모윤숙은 1934년 이광수의 소개로 만난 안호상(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는데, 그 후 남편과 결별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모윤숙은 메논과 만남의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서울에 온 유엔한국위원단의 숙소가 자신이 살던 회현동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제호텔이었다.

유엔한국위원단 환영 파티에서 모윤숙과 첫 대면한 메논 박사는 첫눈에 모윤숙의 문학적 재능과 인품에 반하여 파티가 끝나고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고, 다시 비서를 통해 호텔로 모윤숙을 초대했다. 이날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수시로 만나 시와 인생을 논했고,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모윤숙은 “김활란, 조병옥, 김성수, 장택상 같은 어른들의 지시를 받으면서 중립적인 인도 정부의 두뇌를 한국적인 입장으로 돌리는 데 적잖이 땀을 흘려야 했다”고 기록했다.

메논이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며칠 전,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 메논을 이화장 만찬에 초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마침 이날 메논은 하지 장군과 저녁 선약이 있었는데 모윤숙으로부터 이화장 만찬 연락을 받자 “선약이 있으니 차나 한 잔 마시고 나오겠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화장을 방문했다.

   
▲ 67년 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당시 기념식 전경.
메논과 모윤숙의 사랑

모윤숙은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그가 김규식이 주장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구성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윤숙은 그것이 이상적인 통일론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이승만이 주장하는 남한만의 총선거론이 한국의 장래를 위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저녁 이승만과의 만남이 이승만과 남한을 위한 중대 고비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모윤숙은 메논에게는 비밀로 하고 하지 장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메논 박사의 비서를 사칭하고 “오늘 저녁 메논 씨가 급한 일이 생겨 저녁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약속을 다음으로 미뤄 달라”고 거짓말을 했다. 덕분에 메논은 꼼짝없이 이화장에 붙들려 이승만과 식사를 해야 했다. 만찬이 끝난 후 이승만은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며 한국 정세를 간절하게 호소했다.

메논이 유엔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이봐 윤숙이, 밤이 좀 늦었지만 메논 씨를 좀 데려와. 중요한 일이야”하고 명을 내렸다. 모윤숙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여자가 그런 청을 할 수 있어요” 하며 완곡하게 거절하자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어디 있나. 전화 좀 걸어 봐. 제발, 마지막 청이야” 하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모윤숙은 메논에게 금곡릉 산책을 가자고 불러낸 다음 체면 불구하고 이화장으로 안내했다. 이승만이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거실에서 인삼차를 마시고 있는 사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모윤숙을 부엌으로 불러내어 한지에 붓글씨로 쓴 두루마리를 주었다.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저명인사들의 서명이었다.

당시 한국위원단은 자신들이 협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당 사회단체의 인물들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요식행위로 최소한 200명 이상의 지지자 서명을 받은 연서 명부를 요구했다. 김규식이나 김구는 지지자 서명을 이미 제출했으나, 이화장은 이기붕이 깜박 잊고 제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타이프를 쳐서 사인을 하거나 도장을 찍은 서명은 무게가 없다고 하여 모두 한지에 붓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도록 했다. 그런데 그날 밤 프란체스카 여사가 모윤숙에게 전달한 서명은 대부분 가짜였다. 이승만의 비서 윤치영이 꼬박 하루에 걸쳐 서로 다른 필적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파느라 땀을 흘린 것이다. 후에 모윤숙이 이 문제로 항의하자 이승만은 “정치라는 게 그런 거야. 모르면 가만 있어”라고 말했다. 다시 모윤숙의 설명이다.

‘이화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메논 씨의 코트 주머니에 이 두루마리를 가만히 넣었다. 이것만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죽을죄를 지었어요. 실은 금곡릉이 목적이 아니라 이 두루마리가 목적이었습니다. 이 박사를 이해해 주시고 좀 비사무적으로 된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서류는 사무국을 통해 나에게 와야 유엔에 도달하는 거예요. 이런 비공식적인 일을 이 박사는 왜 미스 모에게 시킬까요. 그는 포기한 줄 알고 있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잔인하리만큼 냉엄했다.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모든 이유는 시일이 지난 후에 역사가 의장님께 일러 줄 겁니다. 이 서류를 만약 의장님이 성공시키신다면 말이죠. 저는 의장님을 믿습니다. 온 한국민과 함께 이 서류에 쓰인 대로 이런 지도자를 한국 사람은 지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가만히 내 손에 악수를 청했다.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는 암시였다. 메논 씨는 하지 중장의 의도나 중립노선을 걷고 있는 인도 정부의 훈령을 묵살하고, 아니 그 자신의 애당초 생각과도 어긋나게 유엔총회에서 이 박사의 노선을 채택하도록 역설, 이 박사를 전설적인 국민적 지도자라고 찬양하고 2주일 후에 다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유엔한국위원단의 임무가 끝나 영영 인도로 돌아가기 며칠 전, 우리는 이화여대에서 두 번째 강연을 끝내고 이번에는 이화장이 아닌 진짜 금곡릉으로 마지막 산책을 갔다.’

   
▲ 1982년 4월 신라호텔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관 '이효석 문학의 집' 건립 발기인 모임. 왼쪽으로부터 백철, 모윤숙, 김동리, 유진오, 김일환, 최정희, 이나미씨./사진=연합뉴스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

이승만은 메논이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후 더 초조해졌다.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보를 쳐야 해, 윤숙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그가 잊지 않도록 전보를 쳐야 해” 하고 말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손수 타이프를 친 다음 ‘매리언 모’(Marion Moh, 모윤숙의 영문 이름)라고 끝맺고는 모윤숙에게 사인을 하라고 했다. 모윤숙의 설명이다.

‘이 박사가 내 이름으로 메논 씨에게 친 전보는 일주일 동안에 10통이 넘었다. 정치란 이런 엉큼한 수단도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 박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메논 씨는 내가 그렇게 유창한 전보문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꼬박꼬박 회현동 내 집으로 답전을 보내주었다. “한국민이 원하는 대로 힘쓰고 있소. 선이(모윤숙의 딸)에게 초콜릿을 전해 주기 바라오” 대충 이런 내용들이었다.’

메논은 1965년에 자서전 『많은 세계들』(Many Worlds)에서 당시 자신이 남한만의 총선거로 입장을 바꾸게 된 과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모윤숙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의 태도는 상당히 단순했다. 그녀에게는 남한이 한국이었고, 북한은 아데나워의 동독처럼 하나의 저주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한에 주권공화국을 세우려 투표하는 것은 나라 전체의 독립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배반이었다. 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몇 개의 시도 읊어 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일 나의 나라가 유엔 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공직 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

이승만은 모윤숙의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1949년 6월 회현동에 집을 한 채 주면서 여기서 문화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이것이 펜클럽의 모체가 되었고, 이 집은 한국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여기에 문예사의 간판을 걸고 『문예』지가 탄생했고, 이를 이어받아 조연현이 『현대문학』을 발간했다.

모윤숙은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을 받고 귀국하는 길에 1949년 2월 메논의 초청을 받아 인도를 방문했다. 모윤숙은 인도에 한 달 간 머물며 국빈 대접을 받았고, 네루 수상과 환영만찬을 함께 했다.
1949년 3월 17일 오후 3시경, 모윤숙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연세대 뒷산에 있는 언더우드 2세(원한경) 댁에서 교수 부인들이 모였다. 이때 공산당원이 모윤숙을 살해하기 위해 원한경의 집에 침입해 총격을 가했는데, 그만 원한경의 부인 에델 언더우드 여사가 그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모윤숙은 6‧25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적 치하의 서울에서 3개월을 숨어 살았다. 이 와중에 『뉴욕타임스』에 모윤숙이 한강에서 사망했다는 오보가 실렸다. 그 기사를 본 인도 외무장관 메논은 인도 신문에 장문의 애도사를 썼다. 얼마 후 모윤숙이 살아 있다는 내용이 다시 보도되자 메논은 주일 인도 대사에게 “모윤숙을 찾아내 일본으로 피난을 시켜 달라”라고 협조를 부탁했다.

주일 인도 대사는 수소문 끝에 모윤숙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 “메논 장관의 요청이다. 주일 인도 대사관 내에 숙소를 마련해 놓았으니 딸과 함께 일본으로 초청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메논은 모윤숙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다시 곤경을 당하면 누가 매리언(모윤숙)과 써니(모윤숙의 딸)를 보호해 주겠소. 써니는 인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면 옥스퍼드에 유학 시킬 테니 빨리 일본으로 가서 몸을 회복한 후 인도로 오시오.”

메논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으로 활동할 당시 국내 곳곳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문을 모아 1948년 『메논 박사 연설집』을 발간했다. 이 책의 발간 과정에서 서문을 직접 썼는데, 그만큼 이승만이 메논을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대 최고의 인격과 지식과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메논과 모윤숙의 국경을 넘나든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한 편의 담백한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이승만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아름다운 드라마는 결국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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