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은 지난 21일 목요일 오후 2시, <헌법과 충돌하는 사회적경제기본법>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회적경제기본법과 관련된 3번째 토론회다. 지금까지 자유경제원은 두 차례의 토론회를 통회 ‘사회적’이라는 단어가 불러올 파장에 대해 언급하며 사회적경제기본법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근간을 흐트러뜨리고, 경쟁과 자조를 통한 국가와 개인의 발전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이번 3차 토론회에서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이 헌법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전문가들과 함께 분석했다. 발제를 맡은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권혁철 소장은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에는 자유시장경제의 기업을 차별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을 특별히 육성하고 우대하겠다는 정치권의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며 “이러한 내용의 법안은 위헌의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아래는 권혁철 소장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67명의 의원이 2014.4.30.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을 발의하였다. 지난 4월 국회에서 통과시키고자 했으나, 몇 가지 사정으로 인해 소위원회 통과가 무산된 채 일단 다음 회기로 넘겨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 법안의 통과를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도 한 몫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자체 토론회를 벌이는 한편 수차례 국회를 방문하여 유승민 원내대표를 비롯한 법안 관계 의원들 및 여의도연구소 연구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등 통과저지 활동을 전개해왔다. 이들 단체들은 현재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또한 새누리당 내부 의원들 사이에서 반대의 기류가 형성된 것도 통과 일단 저지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데 크게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표발의자인 유승민 원내대표의 입장은 여전히 매우 완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이 법안이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법안이라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으며,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은 어떤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통과될 경우 어떤 모습의 경제를 낳을 것인가? 사회적경제와 자유시장경제는 양립할 수 있는가? 우선 먼저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의 내용부터 간략하게 살펴본 후 헌법상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살펴본 법안의 문제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의 주요 내용
새누리당의 유승민 원내대표가 대표발의한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잘 살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양극화가 심해졌다. 이 양극화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붕괴시킬 정도로 심각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붕괴를 막는 것은 시대적 과제이며,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한국경제의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그러면 한국경제의 체제개혁은 어느 방향으로? 이제까지의 패러다임인 국가의 복지, 자유시장경제의 성장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사회적경제가 새로운 대안이다.
사회적경제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회적 가치란 “빈곤을 해소하는 복지, 따뜻한 일자리, 사람과 노동의 가치, 협력과 연대의 가치, 지역공동체의 복원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선한 정신과 의지 등”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경제조직들은 자생력이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 이 자생력 없는 사회적경제조직들이 살아남고 지속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이다. 이 법안을 통해 “사회적경제조직의 설립, 경영의 지원 및 일자리 창출을 도모함으로써 양극화 해소, 건강한 공동체의 조성 및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상이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의 간추린 내용이며 입법 목적이다. 문제는, 세상의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어떤 법안이나 정책의 의도와 목적이 선하고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의 효과와 결과까지도 선하고 훌륭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심심찮게 목격하고 있다. 이미 200년도 더 이전에 애덤 스미스는 “나는 공공선을 위해 사업을 하는 척하는 사람이 이루어놓은 좋은 일을 결코 많이 알지 못한다.”고 일갈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법치 및 헌법과의 문제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에는 법 제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이 법은 사회적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하여...사회적경제 조직의 설립·경영의 지원 및 일자리 창출을 도모함으로써....”
법치(Rule of Law)란 법이 법다워야 함을 말해준다. 법이 법답기 위해서는 보편적이고 탈목적적인 금지적 성격의 법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법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질 때 ‘법치’라 칭한다. 그런데, 사회적경제 기본법은 사회적경제 조직이라고 하는 특정 경제주체들만을 우대하고 다른 경제주체들을 차별함으로써 법의 보편성을 상실했다.
또한 “....을 위하여”라는 의도와 목적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탈목적성이라는 조건도 상실했다. 즉 사회적경제 기본법은 법 같지도 않은 법이라는 말이다. 입법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그것이 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법은 법치국가에서의 법이 아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19조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헌법재판소는 “제119조1항에서 추구하고 있는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최대한으로 존중, 보장하는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질서이므로, 국가적인 규제와 통제를 가하는 것도 보충의 원칙에 입각하여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내지 시장경제질서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제도와 아울러 경제행위에 대한 사적 자치의 원칙이 존중되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될 뿐이라 할 것이다”(88헌가13)고 판결하였다.
그런데,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에는 자유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한계에 도달했으며,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이 사회적경제라고 하고 있다. 이는 헌법 제119조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 및 헌법재판소의 판결인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 질서’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며 위헌적 법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에는 자유시장경제의 기업을 차별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을 특별히 육성하고 우대하겠다는 정치권의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이러한 내용의 법안은 위헌의 소지가 크다. 우리나라 헌법의 근본 틀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이며, 이는 헌법 전문에도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관련하여 헌법재판소는 지난 해 12월 통진당해산심판 결정(2013헌다1)에서 “민주적 기본질서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은 정치권, 그것도 일부 정치인들만이 이상적(理想的)이라 생각하는 가치-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에게 특혜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자유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적경제’로 이끌고 가겠다는 의도를 표출하고 있다.
이는 다원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권력을 통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특정 가치만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은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토대가 되는 다원적 세계관에 위배되는 위헌적 법안으로 판단된다.
▲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이 몇 가지 사정으로 인해 소위원회 통과가 무산된 채 일단 다음 회기로 넘겨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 법안의 통과를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도 한 몫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사진=연합뉴스 |
또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은 헌법상의 직업선택의 자유, 기업의 경쟁 및 기업활동의 자유, 소비자의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된 자기결정권, 그리고 평등권도 침해하는 위헌적 법안이다. 헌법재판소는 “자도(自道)소주 구입명령제도는 소주판매업자의 직업의 자유는 물론 소주제조업자의 경쟁 및 기업의 자유, 즉 직업의 자유와 소비자의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된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위헌적인 규정이다.
소주시장과 다른 상품시장, 소주판매업자와 다른 상품의 판매업자, 중소소주제조업자와 다른 상품의 중소제조업자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볼 수 없으므로....평등원칙에도 위반된다.”고 판결했다(96헌가18).
사회적경제 기업들에게 특혜를 제공하고 다른 기업들을 차별하는 것은 경쟁과 기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경제 기업들과 여타 중소기업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평등원칙에도 위반된다.
물론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에는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빈곤 탈출과 일자리 창출, 협력과 연대 등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런 가치들은 자유시장경제에서의 모든 기업들도 추구하는 가치들이다. 따라서 여타 기업들의 경쟁과 기업의 자유, 여타 중소기업들을 차별하면서까지 특별히 사회적경제 조직들에게 특혜를 제공해야 할 합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 경쟁과 기업의 자유, 평등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위헌적 법안으로 판단된다.
족제비 같은 용어 ‘사회적’
‘사회적경제’에서의 ‘사회적’이라는 용어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얼마 전 한국경제연구원에서는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미신>이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라는 말 “속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내포되어 있어, 자유주의는 수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또한 그 속에는 수정될 정치적 방향이 들어 있다. 그 어젠다의 성격은 유대감과 나누어먹기 등 소규모집단의 윤리를 요구하는 재분배의 성격이다. 성장보다는 분배가 사회적이고 자유보다는 평등이 사회적이라는 뜻이다.”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의 관점도 마찬가지다. 자유시장경제체제, 특히 한국에서의 자유시장경제체제는 고도성장을 가능하게는 했지만, 양극화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고 비판된다. 자유시장경제체제는 한편으로는 빈곤을 낳고, 허접하고 차가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며, 사람과 노동의 소외를 낳고, 협력과 연대를 사라지게 하고 경쟁만 부추기며,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고, 사람들의 정신까지 황폐화시킨다고 본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붕괴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 유승민 원내대표의 진단이다. 그래서 자유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적경제를 통해 ‘빈곤을 해소하는 복지’ ‘차가운 일자리가 아닌 따뜻한 일자리’ ‘사람과 노동의 가치’ ‘협력과 연대의 가치’ ‘파괴된 지역공동체의 복원’ ‘사람들의 선한 정신과 의지’ 등 이른바 ‘사회적 가치’가 추구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때 ‘사회적’이라는 용어에는 이미 ‘좋다’ ‘나쁘다’는 가치판단이 내재되어 있다. 사회적경제는 좋은 체제이고, 자유시장경제는 나쁜 체제이다. 나쁜 체제인 자유시장경제체제는 마땅히 개혁되어야만 한다. 법안에서도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한국경제의 체제를 (사회적경제로) 개혁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 소명의식”까지 갖추고 사회적경제로 개혁을 한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이에크는 자신의 저서 『치명적 자만』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을 일컬어 ‘족제비 같은 말(weasel word)’이라고 표현했다. 족제비가 알의 겉은 멀쩡하게 남겨두고 속의 내용물만 전부 빨아먹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사회적이라는 단어가 수식하는 명사의 겉은 멀쩡한데 그 내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사회적경제’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이 수식하는 ‘경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치’가 차지할 것이다. 사회적경제에서 ‘경제논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치논리’가 대신할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법안 내용에서도 이미 파악될 수 있다. 법안에는 “정부는 사회적경제의 금융기반 조성과 사회적경제조직의 지원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회적경제 발전기금을 설치, 운영한다.”고 하면서 “기금은 기획재정부장관이 운용, 관리한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금줄을 정부가 쥐고, 자원배분의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이야기다.
나아가 대통령 소속의 사회경제위원회, 시도(市道) 사회적경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지역단위, 업종 및 분야단위의 협의회를 조직하도록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경제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자금과 조직을 장악하고 통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사회적경제는 사회주의적 통제경제의 변종이 되거나 최소한 관치경제의 부활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원시공동체에 대한 끝없는 향수의 문제
민경국 교수는 ‘사회적’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경우들을 역사적으로 개관한 후 그 말은 크게 네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지만, 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공통된 점은 다음과 같다고 하고 있다. “대규모의 인간관계, 즉 자생적 질서를 소규모 집단의 모습, 즉 자연적 질서에 접목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이라는 말 속에는 공동으로 달성할 정치적 목적과 그리고 이를 위한 유대감과 도덕성을 전제하고 있다.”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의 출발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구성원 상호 간의 협력과 연대’를 추구하고, ‘지역공동체의 복원과 발전’을 도모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5,000만 명의 국민이 살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대규모사회의 인간관계를 100명, 200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원시공동체 시절의 ‘연대, 협동, 단결, 공동체’가 강조되던 시절로의 복귀를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경제는 원시적경제로 복귀하려는 경제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원시공동체 시절에는 지역 구성원들간 공동의 이해가 존재할 수 있다. 경제활동의 패턴이 동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예: 마을 구성원 전체가 농민). 그래서 ‘공동의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따뜻한 복된 마을 공동체”(이른바 ‘따복마을 건설’: 남경필 경기도지사)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대규모사회에서 이런 따복마을을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망상이다. 지역 구성원이라고 해도 이들의 이해와 경제활동의 다양성으로 인해 공동의 이해를 도출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한국사회는 붕괴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 유승민 원내대표의 진단이다. 그래서 자유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적경제를 통해 ‘빈곤을 해소하는 복지’ ‘차가운 일자리가 아닌 따뜻한 일자리’ ‘사람과 노동의 가치’ ‘협력과 연대의 가치’ ‘파괴된 지역공동체의 복원’ ‘사람들의 선한 정신과 의지’ 등 이른바 ‘사회적 가치’가 추구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
아파트 위·아래층에 누가 사는지는 고사하고 바로 앞 세대에 누가 사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사는 것이 현대 도시인의 생활이다. 하물며, 시골의 작은 마을공동체도 아닌 거대사회인 대한민국 전체에 ‘협력과 연대’에 바탕을 두는 사회적경제를 이식시키겠다는 것은 화합 불가능한 것을 서로 접목시키려는 시도로서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로 돌리자.
‘치명적 자만’의 문제와 진화의 왜곡
사회적경제는 자생적 질서인 시장경제 대신에 대안적 자원배분을 선호한다. 즉 자생적 질서의 자리에 인위적인 자원배분 방식을 우선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빈곤해소, 따뜻한 일자리, 협력과 연대의 가치 등 사회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를 설계하고 조직함으로써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의 전형적 행태이다.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의 백미는 단연 사회주의 이상국가 건설이었고, 70여 년에 걸친 인류의 거대한 실험은 완전한 실패로 귀결되었다.
이는 정부 관료들을 비롯한 그 어떤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로 이루어진 어떤 조직이라도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과 정보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인간의 구조적 무지를 보완하여 정보가 전달되고 수집되고 가공되고 활용되도록 하는 시스템이 시장이다. 그런데 사회적경제는 그 시장을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지식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니 대단한 ‘치명적 자만’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승민 원내대표는 치명적 자만을 넘어 새로운 진화론까지 펼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첫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사회적경제는 복지와 일자리에 도움이 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역사적 진화”라고 말했다. 이 말은 진화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며 부명(否名⇔정명正名)이다.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의지를 통해 의도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 ‘진화’라는 용어를 붙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진화가 의도한대로 이루어지는가.
사회적경제나 사회적 협동조합 등과 같은 것도 그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그동안 때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지만, 주지하다시피, 대안이 되기는커녕 존립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적경제나 사회적 협동조합 등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의 경쟁에서 패해 그 명맥이나 겨우 유지하면 다행인 종(種)에 불과하다.
물론 한때 서구에서 협동조합이 사회주의 정치학교라는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지만(이탈리아의 경우) 시민사회의 탈이념화 과정 속에서 협동조합도 자신들의 혁명성을 배제하는 등 나름대로는 진화를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장에서의 퇴출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듯 진화에 실패해 멸종 위기에 처한 사회적경제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역사적 진화’라고 칭하는 것은 진화와 역사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 다름 아니다.
1차원적 시각의 문제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의 출발점 중의 하나는 자유시장경제에서는 협력과 연대가 배제되고 경쟁만이 강조된다고 하는 점이다. 그래서 사회적경제를 통해 사회적 가치인 ‘협력과 연대’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시장경제를 경쟁만이 지배하고 협력과 연대가 배제된 비정한 시스템으로 보는 것으로서, 시장을 매우 단편적이고 1차원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상품의 공급자나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지만 타인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점을 밝혔다. 시장경제에서의 성공은 바로 타인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제공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협력과 연대의 산물이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협력과 연대가 이루어진다.
또 다른 예는 레오나드 리드(Read)가 쓴 『나는 연필입니다 I, pencil』이다. “나무, 아연, 구리, 흑연의 복합체로 만들어진 간단한 제품인 한 자루의 연필이 탄생되는 과정을 이야기식으로 묘사한 글이다. 예를 들어 나무의 경우 그것을 심고 가꾸는 과정, 잘 자란 나무를 베어 통나무 상태로 철로를 통해 제재소로 운반되는 과정, 제재소에서 연필 두께의 판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포함된다.
그리고 각 과정에는 또 그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끼와 톱 등의 도구를 만든 사람, 또 그들이 작업할 때 식사를 준비해 주는 사람, 그 식량을 생산한 사람 등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재료 중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은 수입도 해야 한다. 외국인의 노동과도 협력하지 않으면 한 자루의 연필도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얼핏 간단해 보이는 한 자루의 연필을 만드는 일에도 수 백명 혹은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의 협동, 수 개국의 협동이 있어야 가능하다.”
눈에 보이는 협력과 연대, 누군가의 지시와 명령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 협력과 연대만을 파악하고,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광범위한 시장에서의 협력과 연대를 보지 못하는 1차원적 시각이 문제의 발단이다. 그러다보니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협력과 연대를 무시하고 그 대신에 인위적으로 협력과 연대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권력 확대 명분으로서의 문제
사회적 서비스, 사회적 일자리, 사회적경제는 정부나 정치권이 시장경제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고 이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해 준다.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심각하며, 이것은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주장된다.
그리고 마치 법칙과도 같이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 된다고 주장된다. 예를 들어 저출산의 문제를 보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이 사람으로 넘쳐난다’며 대대적으로 산아제한정책을 펴던 것이 국가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인이 멸종된다’며 출산장려정책을 펴고 있다.
인구가 너무 많으니 줄여야 한다면서 권력을 휘두르던 정부가 거꾸로 인구가 너무 적어진다면서 늘려야 한다고 권력을 휘두른다. 이래서 권력을 늘리고, 또 저래서 권력을 늘린다. 명분만 있으면 늘어나는 것이 정부와 정치권의 권력이다.
결국 사회적경제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에는 기금의 조성과 배분, 전국을 포괄하는 조직 구성 등 정부와 정치권이 자금과 조직을 장악하고 통제하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경제가 정부와 정치권으로 하여금 시장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개입과 인위적인 자원배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도록 하고, 정부의 몸집을 불리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그것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사람과 집단에게 특혜를 제공하기 위한 훌륭한 명분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단어가 정부와 정치권의 권력확대를 위한 그럴듯한 통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경쟁하게 하라! 그것도 공정하게!
이윤보다는 구성원들 또는 집합적 이해를 위한 목적의 활동, 1원1표가 아닌 1인1표의 민주적인 의사결정, 이윤의 분배에 있어서 자본보다는 사람과 노동의 가치를 우선시 하는 조직을 만들고, 이 조직을 통해 이른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개인과 조직의 자율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것을 정부와 정치권이 지원하고 개입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것은 정부와 정치권이 다원적인 사회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꼴이 된다.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은 중앙 정부와 지방정부에 여러 기관을 만들고 자금을 투입하고 각종 지원책을 통해 정부 주도로 사회적경제를 실현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사회적경제 기본법안은 국가가 시장을 대신해 인위적인 자원배분을 하겠다고 한다. 이는 비효율적이고 비정상적이며 왜곡된 사회적경제를 만들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렇게 해서 인위적으로 육성되는 사회적경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회적경제’도 못 된다.
사회적경제는 이윤추구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시장과 구별되고, 시민사회의 자발적 참여와 협력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공공부문과 구별된다. 하지만, 이 법안에서 말하는 사회적경제는 사회적 가치보다는 정부의 보조금 수취라는 이권(Rent)을 추구하고, 또한 자발적 참여와 협력이 아닌 정부에 의한 인위적 부양으로 형성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곧 사회적경제가 ‘사이비’ 사회적경제로 변질될 것이라는 뜻이다.
사회적경제가 무엇인지, 그것이 한국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 될 수 있는 지 등등에 대해서는 평가하는 사람의 관점과 경험과 이해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어질 수 있다.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어떤 게 맞는 것인지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경쟁을 하도록 하는 일이다. 자유시장경제와 사회적경제가 서로 경쟁하도록 하는 일이다. 하이에크가 언급했듯이 경쟁이야말로 무엇이 적합한지를 발견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우리 사회에 적합한 것인지는 그 경쟁의 결과가 알려줄 것이다.
그 경쟁에 정부가 사회적경제 기본법안 같은 것들을 통해 개입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한 쪽에는 특혜를 주고 다른 쪽에는 징벌을 가하면서 경쟁을 왜곡하는 일과 같다. 이건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정부는 그런 일을 무리 없이 할 만큼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정부는 자신이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손을 떼어야 한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vs. 사회적 경제가 경쟁하게 하라! 그것도 공정하게!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