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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 아닌 '대미투사'였다

2015-06-24 10:03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주제로 연속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제4차 토론회는 24일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는데?”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토론자인 권혁철 소장(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은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과 미국은 대립했다. 그는 소련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했고 소련의 야망을 그대로 묵과하는 것은 소련을 조만간 일본과 같은 침략세력으로 키우는 꼴이 될 것이라면서 소련에 대해 즉각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 미국을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발표했다. 세간의 편견이 그야말로 ‘오해’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권 소장은 로버트 T. 올리버가 쓴 『이승만의 대미투쟁』의 번역자인 한준석의 표현을 인용하며 “자유민주주의 나라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은 미국의 영향이 아니라 미국 정책과 싸운 이승만의 투쟁의 결과”라고 밝히기도 했다.

아래는 권혁철 소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가 편지와 일기, 그리고 신문기사로 엮은 기록인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을 한국어로 번역한 한준석은 이 책의 제목을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 1942~1960>이라고 지었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듯이, 그리고 역자가 ‘역자 서문’에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도 아니었고, 친미파도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승만은 용미(用美)주의자이면서 대미투사(對美鬪士)였다. 역자 한준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승만을 흔히들 미국의 후원에 의해 권력을 잡고 유지한 친미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그와 전혀 반대의 인물임을 알게 된다. 그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으나, 평생 미국을 등져서는 안 되지만 미국의 정책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에 지장이 된다면 서슴지 않고 미국 정책에 반대해 온 대미투사였다.”

이승만이 이렇게 판단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과 일본, 소련(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있지만, 미국은 영토적 야심이 없는 나라이며 또 여론의 나라이기 때문에 홍보선전을 잘하면 한국에 관심을 갖게 하고 도움도 얻어낼 수 있는 나라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 대립했던 몇 가지 사건에 대해 밝힘으로써 앞서 이야기했던 것, 즉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용미주의자 및 대미투사였다는 점을 뒷받침하고자 한다.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과 미국은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해방 직후 김구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의 귀국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지만, 김구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연대하고 있던 김원봉 주도의 공산주의자 그룹은 배제시키고자 했다. 그는 소련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했다.

이승만은 소련의 야망을 그대로 묵과하는 것은 소련을 조만간 일본과 같은 침략세력으로 키우는 꼴이 될 것이라면서 소련에 대해 즉각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 미국을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철저한 반공주의는 미국의 세계전략과 완전히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당시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창설한 유엔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협력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의 협력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치를 생각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세계전략 하에서 한국은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고, 결국 한국에 대해 좌우합작과 신탁통치까지 강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하지 사령관은 미/소의 타협을 성취하고자 남측 인사들에게 남북협상에 응하도록 강력하게 종용했고, 김구와 김규식은 그에 따라 남북협상에 응하게 된 것이었다(물론 그들의 통일에 대한 갈망도 한몫을 하였지만).

또한 하지는 북한과 남한 사이에 정상적인 우호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화차 1량에 물자를 가득 실어 북한으로 보냈다. 이러한 제스처에 소련 또한 우호적으로 그 차에 석탄을 가득 실어 답례로 보내 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소련은 그 화차마저 돌려보내지 않았다. 상황은 이승만이 예측한대로 돌아갔지만, 하지와 미국은 여전히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이승만에 대해 적대했다.

미군정은 정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이승만 박사의 지지도가 높게 나오면 소련과의 우호적 관계가 깨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결과를 조작하기도 했다. 1946년의 한 조사에서 70%의 한국 국민이 이 박사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미군정은 보고서의 내용을 조작해서 이 박사에 대한 지지율이 과반을 넘기지 않도록 했다.

또한 여러 지방에서 지방행정직에 대한 선거가 있었는데, 공산당은 어느 곳에서도 21% 이상의 득표를 한 곳이 없고 그 후보자 가운데 겨우 15%만이 선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 또한 차단되었고, 소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산당을 50 대 50의 비율로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조작되었다(이는 로버트 올리버가 군정의 수석홍보관인 그린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이다).

미군정은 이승만 박사가 강력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공격하기 때문에 소련에게는 이 박사가 절대 집권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거듭해서 했었다.

이런 긴장관계는 하지 사령관과 부사령관 겸 남한 군정장관 아서 리치 장군이 로버트 올리버를 초청해서 들려 준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와 리치는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를 과대망상증 환자로 치부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하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박사를 좀 자제시켜 주세요. 당신이 그렇게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끝장입니다. 이 박사 때문에 우리가 한국을 통일시키기 위해 소련과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망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한국 정계에서 가장 탁월한 분이고, 내가 보기엔 거의 유일한 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한 한국 정부에 그분이 설 자리는 결코 없습니다.”

두 사람의 이러한 긴장관계는 급기야 폭발하게 된다. 1946년~1947년 겨울 이승만 박사는 하지 사령관을 방문하여 인신공격까지를 포함한 신랄한 설전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 하지는 이 박사가 권력을 잡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자신이 하지 장군을 한국인으로부터 보호하려고 그동안 많은 애를 써왔지만 앞으로는 공개적으로 그에게 대적할 것이라고 응수했다. 하지는 화를 내며 미국은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하거나 겁먹지 않는다고 하면서 미국의 프로그램에 협력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끝장이 날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미국과 이승만의 대치는 6.25 전쟁 말기 휴전협상 때도 벌어졌다. 전쟁이 예상 외로 장기화되고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되자 미국은 어떤 형식이 되었든 관계없이 한국에서 손을 떼고 싶어 했다. 미국, 중국, 그리고 북한 모두 휴전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통일이 안 된 상태에서 휴전이 된 후 북한의 재침공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한 철저한 방위보장이 없이는 휴전에 응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결사반대했다. 휴전협상이 이승만의 결사반대로 장기화되자 미국은 이승만을 언제라도 체포하여 강제로 실각시킬 계획까지 짜놓고 있었다. 이 사실은 이승만이 사망한 뒤 미국에서 비밀이 해제되어 발표되었다.

휴전협정이 급물살을 타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사전에 협의도 없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가장 폭발적인 독단적 조치를 단행한다. 그는 이를 통해 판문점에서 엄청난 소란과 상호비난을 촉발하여 휴전회담을 무기한 중단시키고자 했었다. 조속한 휴전협정 체결을 갈망하던 유엔 측과 공산 측 모두 이 엄청난 사태에도 모른 척 눈을 감고 휴전 회담을 재개하게 된다.

이런 정황들을 살펴볼 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앞잡이’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누명이다.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및 미군정과 힘겹게 싸워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냈다는 평가가 맞다.

<이승만의 대미투쟁>의 역자인 한준석의 표현을 빌자면 “자유민주주의 나라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은 미국의 영향이 아니라 미국 정책과 싸운 이승만의 투쟁의 결과였다.”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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