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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국회법 거부권'…국회타락의 끝을 보다

2015-06-26 09:28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가 한순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그간 핀치에 몰린 감이 없지 않았던 박근혜 대통령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국회 독재’ 상황이 우려되던 대한민국의 상황에 우려를 표명하던 사람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되고 있다.

물론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정치적 파국’으로 간주하고 경계하려는 시선 또한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식의 정치적 대결양상이 펼쳐질 때야말로 원칙과 정론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발맞춰 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자유경제원에 최근 정치상황을 진단하는 칼럼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민주정의 본질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국회 독재’야말로 민주정이라는 체제의 타락을 의미하는 위험한 징후임을 주장하고 있다.

아래는 김영호 교수의 칼럼 전문이다. [편집자주]

 

   
▲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근 국회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은 1987년 '제1의 민주화’ 이후 '제2의 민주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이론적, 실천적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한국정치는 과거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행정부 독재’를 경험했다.

6·10항쟁과 6·29선언이라는 대타협을 통해서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4반 세기가 흐른 지금 한국정치는 '국회 독재’(elective despotism)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국회 독재’는 '체제 타락’의 심각한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체제 타락’의 심화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민주주의를 '제2의 민주화’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이론적, 실천적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1987년 '제1의 민주화’는 흔히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평화적 정권 교체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이 민주화의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민주화는 행정부 중심의 권위주의체제가 국회와 사법부가 힘을 고르게 나누어갖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3권 분립체제’의 정착을 핵심적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더 큰 힘을 갖게 된 국회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시대적 사고에 사로 잡혀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면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대표성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세월호 사태와 국민연금 해결 방안을 둘러싸고 정쟁을 거듭하던 국회가 급기야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국회 독재’의 가능성을 낳고 한국 정치체제를 타락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국민이 선거를 통하여 대표를 선출하여 국사(國事)를 처리하는 '대의제’는 한국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이렇게 보면 '대의제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는 동어반복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대의제가 곧 민주주의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불식되지 않은 잘못된 정치적 관념의 하나는 2천년 전 아테네에서 행해진 직접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라는 인식이다. 제헌헌법부터 1987년 현재 헌법까지 한국민주주의는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대의제의 위기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의미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달리 말하자면 대의제의 타락한 한 형태인 '국회 독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의미한다.
 

   
▲ '체제 타락’의 심화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민주주의를 '제2의 민주화’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이론적, 실천적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원래 '국회 독재’(elective despotism)라는 말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과 함께 미국 정치의 3대 문건으로 꼽히는 『연방주의자 논고』 (Federalist Papers) 제48번에 나온다. 이것은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이 쓴 개념으로서 '3권 분립체제’ 하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지고 미국 의회로 권력이 집중되는 정치 체제의 타락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메디슨은 미국 헌법을 만들면서 '국회 독재’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을 예상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제력을 발휘하여 헌정 질서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3권 분립 상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견제와 균형 그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더욱이 3권 분립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국회가 권력을 독점하고 남용하는 제도적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세법을 만들고 돈 주머니를 쥐고 있는 국회가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고 국민의 편에 서서 국정의 균형을 잡아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3권 분립이 헌법에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고 실제로 작동해 온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회는 자신들이 가진 돈 주머니를 마음대로 열어서 포퓰리즘으로 나가더니 급기야 국회법 개정을 통하여 3권 분립의 정신을 훼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최근 국회법 개정과 관련된 '국회 독재’ 현상이 '체제 타락’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여기서 '타락’(corrupt)이라고 하는 것은 최근 발간된 『정치학적 대화』라는 책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흔히 도덕적이고 정신적 의미에서 나쁜 길로 빠지는 것뿐만 아니라 단순히 금전적 부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학적 개념’으로서 국가의 통치 기관이 원래 주어진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주어진 권력을 남용할 때 생겨나는 정치적 현상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러한 통치 기관이 국민의 편에 서서 법과 정책을 만들고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와 같은 본래의 기능과는 전혀 다른 수단들을 통해서 국민의 환심을 사고 지지를 받으려는 포퓰리즘적 정책을 펼 때 생겨나는 현상이 '체제 타락’이다.

1987년 '제1의 민주화’ 이후 드러나고 있는 이런 체제 타락 현상은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정치권이 그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잡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데에 한국 정치 위기의 심각성이 있다. 통진당의 원내 진입과 당비의 국고보조 지원은 눈에 잘 드러나는 체제 타락의 한 현상일 뿐이다.

각 정당이 대통령 후보와 대표를 선출할 때 유권자의 동의로서 확인되지 않은 여론을 반영하는 것도 커다란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투표에 의해서 만들어준 여야 의석 분포를 무시하고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켜 입법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는 '국회선진화법’도 체제 타락의 또 다른 예이다.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서 당연히 '거부권’(veto)을 갖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법안 심사 과정에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항상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은 헌법상 거부권을 가짐으로써 그 자신 국회 법안 제정 과정의 일원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거부권이 헌법에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정된 국회법에 대해서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 의사를 표명한 것을 두고 여야 정치권이 마치 정치적 파국이 일어날 것처럼 정치 상황을 호도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지역구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모인 국회가 '체제 타락’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면 국민의 '전국구 대표’인 대통령이 이런 타락의 심화를 막기 위해 필요할 경우 적극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요구이고 3권 분립의 정신이다.

이번 국회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은 1987년 '제1의 민주화’ 이후 4반 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여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체제 타락’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건국 이후 수많은 희생을 통해서 이룩한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타락의 늪으로 빠지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2의 민주화’를 위한 이론적 성찰과 실천적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다. /김영호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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