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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근 선문대교수 |
영국의 BBC는 공영방송의 아이콘 같은 존재다. 현존하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공영방송사들이 BBC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정치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시청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는 공영방송의 원칙은 BBC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BBC의 제도와 운영은 방송학의 중요한 부분이고, BBC의 제도변화와 정책들은 항상 방송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왔다. 또 방송정책과 관련된 학술논문이나 세미나에서 BBC 사례는 설득력 높은 논거로 인용되고 있다.
또한 BBC는 전 세계 방송종사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성지 같은 곳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두 차례 방문해서 시설도 보고 담당자들과 현안들을 이야기 해본 적이 있다. 워낙 많은 한국 방송계인사들이 방문해서인지 담당자는 예상 질문을 이미 꿰고 있는 듯 했다. 뿐만 아니라 방송정책을 두고 논란이 될 때마다 정부는 물론이고 사업자들 심지어 학자들까지 BBC사례를 들어 자신들의 주장이나 요구가 정당함을 강변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BBC 사례들도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고 심지어 전혀 상반될 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 예로 BBC의 지상파다채널 방송인 ‘Pre-view 서비스’는 오래전에 인터넷 망을 이용한 ‘Canvas’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지상파방송사들은 BBC예를 들면서 지상파다채널 방송을 요구하고 있다. 이해당사자들이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 논거로 삼는 전형적인 ‘쓰레기통 정책결정모형’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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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7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바른사회시민회의 주최로 열린 ‘KBS의 현주소를 묻는다 :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길’ 토론회. 이자리에서 전문가들은 “수신료에 대한 '시청자 주권'이 허용된다면 KBS는 보다 더 팩트에 충실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애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
그런데 지난 7월 2일 영국의 BBC가 1000명의 직원을 감원하고, 이를 통해 연간 5천만 파운드의 비용을 절감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TV수상기 보유자가 줄어들어 수신료 수입이 감소하는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영국의 공영방송 수신료는 우리처럼 전기요금에 반강제(?)로 병과하는 것이 아니라 TV수상기 보유가구에게만 징수하는 조세형태다).
아울러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BBC 3채널의 지상파송출을 중단하고 온라인 서비스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향후 ‘공익성 검증(Public Value Test)’ 절차를 밟겠다고 공고했다. 이를 통해 연간 약 3천만 파운드의 비용이 절감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같은 BBC의 구조개혁은 디지털 스마트 시대 공영방송의 고민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바일과 인터넷만으로 방송서비스를 시청하는 이른바 ‘zero-TV’ 가구가 늘어나면서 보편적 무선송출과 수신료라는 공영방송의 두 축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제까지 당연히 내야할 세금처럼 인식되어 온 수신료제도가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시청자 이탈과 재원감소라는 딜레마 속에서 공영방송의 슬림화와 구조조정이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는 것을 이번 BBC 결정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BBC의 구조개혁은 우리 지상파방송사들에게도 먼 남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KBS를 비롯한 지상파방송사들 모두가 ‘죽겠다’는 소리를 달고 산다. 그러면서 정부에게 ‘광고규제완화’ ‘수신료 인상’ ‘700Mhz 주파수’ 등 살려달라고 모든 걸 다 요구하고 있다. 또 유료방송사업자들에게는 재송신 대가를 대폭 인상해달라고 하고, 급기야 모바일 지상파콘텐츠 공급도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하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수신료와 넘쳐나던 광고수입에 아래 형성되었던 방만한 조직과 인력구조를 개선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경쟁력을 배가시키고 선택과 집중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이미 낡은 전통적인 매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시청자들의 미디어 수용 패러다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
사실상 공영방송의 시작이었고 또 가장 안정적이고 모범적인 공영방송 아이콘이 되어 왔던 BBC의 이번 구조조정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비대한 조직과 방만한 경영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백 수천의 매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또 제도적으로 정부의 지원으로 유지하는 것도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우리 공영방송(법적으로는 공영방송이라는 규정도 없지만) 입에서 언제쯤 스스로 구조개혁이라는 말이 나올지 궁금하다. 현재의 정치적·제도적 구조아래서는 어쩌면 영원히 나올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스스로 그 말이 나올 때 국민들이 인정하는 진정한 공영방송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한 것일까? 그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황근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