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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
전체 미디어산업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일까?
라디오? 신문? 잡지?
매출 규모나 수익성 면에서 최고로 많이 가라 앉아 더 이상 밀릴 곳이 없을 정도로 취약한 곳을 집어내는 건 일도 아니다. 누가 보아도 잡지이니까. 어디 불가촉천민 신세와도 같이 저기 맨 끝에 처박힌 신세가 바로 잡지 미디어다. 이름마저도 촌스럽고 잡스런 잡초 마냥 요상한 한자어로 전해진 잡지라고 찍힌 낙인을 안고 지탱해온 게 잡지의 서글픈 운명이다.
잡지 미디어가 가장 깊은 나락과 심연에 굴러 떨어진 오늘날 문득 무모하게도 잡지의 부활 노래를 읊어보고자 한다. 놀랍게도 잡지가 모든 미디어산업을 다 살린다는 기밀을 찾아냈으니까.
우선 현실은 이렇다. 한국에 있는 잡지들은 현재 총 6400여종에 이른다. 종류 자체는 매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역시 매출이다. 잡지 업계 전체 매출은 2010년 총 3231억 원을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어 2011년 2495억 원, 2012년 2328억 원 규모(미디어경영연구소)를 기록했다.
주력 수익원천인 광고매출 추이를 보는 점유율(전체 국내 미디어시장) 변화에서 잡지는 2004년 4.3%, 2007년 3.9%까지 밀렸다가 이윽고 2014년에는 2.4%라는 역대 최저치로 곤두박질했다. 사외보 발행 등으로 인해 잡지업계 이외 일반 기업매출로도 흡수되기도 하는 잡지업계 인쇄광고비 매출 총액에서도 한국의 잡지 부문은 2011년 5236억 원, 2013년 4650억 원, 2014년 4450억 원, 2015년 4300억 원(추정치, 2013년 한국광고연감과 오리콤 추정)으로 내리 후퇴했다.
잡지 업계 전체 외형이 2000억 원 대로 쪼그라들다보니 ‘한국에 연 매출 500억 원쯤 하는 잡지 전문 매체 회사 하나 없다’는 푸념도 가실 줄을 모른다. 너무 영세하다보니 매체 브랜드의 존재감이나 종사자들의 자존감도 떨어져 있다. 잡지만이 부릴 수 있는 매력적 화보와 편집, 세련된 카피 표현들도 궁색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웹진과 같은 디지털 잡지로도 많이 이행했고 기대도 많이 걸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개인들의 매체 사용 시간 조사를 보면 라디오보다 못하고 DMB나 위성 TV, IPTV 같은 신생 매체들에게 밀려난 지도 오래다.
잡지 왕국 일본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격 주간 만화잡지 <점프>나 <소년> 같은 매체들은 단일 브랜드 2000만 부라는 믿기도 힘든 전성기를 뒤로 하고 2004년을 기점으로 단행본 외형을 밑도는 하락세로 돌아섰다. 일본경제신문 산하 잡지 사업 부문인 닛케이 BP의 경우도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파트너 삼아 라이센스 매거진 발행을 확대하고 있지만 잡지 불황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처럼 사방이 꽉 막힌 외톨이 신세가 바로 지금 잡지의 험난한 위상이다. 한 때 신문, TV, 라디오와 함께 4대 매체 군단을 형성했지만 이젠 영락없이 후줄근한 올드미디어 퇴물이 되어 버린 듯하다. 과연 잡지는 멸종위기에 처한 인류 최초의 전통 매체가 되어버린 것일까? 더 이상 잡지가 없이도 교양을 얻고 휴식과 위로를 얻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가? 인터넷과 모바일이 잡지 수요를 대체해버린 무시무시한 약육강식 법칙이 찾아들고 말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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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코리아 매거진 페스티벌 2013'에서 시민이 잡지를 보고 있다. 이 행사는 과거와 현재의 잡지를 총망라해 전시함으로서 잡지의 어제와 오늘을 한 눈에 볼 수 있다./사진=연합뉴스 |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잡지는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버티다보니 잡지를 다시 보자는 움직임도 새로 생겨나고 있다. 굵직한 모범이 가야미디어 김영철 회장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라이센스 매거진 발행회사인 이 미디어는 무엇보다 글로벌 가치라는 차원에서 큰 교두보를 건설한 공신이다. <에스콰이어>,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와 같은 글로벌 패션, 라이프스타일 명품 매거진 한국판 라이센스 매거진이라는 불리한 약점을 어느새 절대 강점으로 승화시켜 축적한 사례다.
진도모피 그룹으로 유명했던 김영철 회장이 1993년 한국판 <마리 끌레르>를 창간한 지 20여 년 동안 미국 대형 잡지 브랜드 허스트사와 한국판 발행 계약을 맺고 여러 도전을 감행해 온 경험과 노력이 지금 글로벌 전략에 서툰 한국의 미디어산업, 문화창조산업 전체에 커다란 영감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김영철 가야미디어 회장은 “독일에서 1등 하는 잡지인 세계적인 브랜드 GEO 한국판을 2002년에 시작해 정성을 쏟았지만 3년 만에 정간하고 말았습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한국에선 너무 부족했고 정치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었지요”라고 전한다.
한 마디로 세계시민으로서 자질과 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접하는 신규 브랜드 미디어는 백전백패라는 실전 교훈이다. 전문 매체가 뿌리내릴 수 있는 텃밭 자양분이 없다보니 마냥 대중매체, 통속매체만 득세하게 된다는 한국 미디어산업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기억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었던 김영철 가야미디어 회장은 한국판 <에스콰이어>,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MOTOR TREND> 등을 발판 삼아 글로벌 유통 콘텐츠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나갔다. 가령 명품 구치, 샤넬이 있다면 우선 오리지널 매거진에 아주 매력적인 마케팅 꽃단장을 통해 알려진다. 그 다음 한국판 잡지에도 실리고 곧이어 동호인 커뮤니티 가입 활동과 인터넷 쇼핑으로 연결되도록 비즈니스 모델을 추진한다.
한국판이니까 한국산 명품과 한류 스타들이 얽힌 제품 스토리들은 역으로 해외에 소개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가야미디어는 일찌감치 2001년부터 온라인 잡지 포털을 만들었고 현재는 유통 쇼핑몰 소비 거래도 이루어지는 <imagazinekorea> 플랫폼으로 확장해 놓았다. 또한 가상 세계가 흉내 낼 수도 없는 인사동, 대치동 북 카페를 직영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뉴욕타임스 출판 잡지 브랜드인 <시티 가이드>팀이 강남의 가야미디어 본사를 다녀갔다. 서울 여행과 출장을 테마로 다루는 전문 잡지를 영문판, 한국판으로 만드는 동업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협상중이라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사실 잡지만한 글로벌 미디어가 없다는 사실이다. 신문도 방송도 심지어는 네이버, 다음카카오 같은 인터넷 빅네임들도 죄다 한국어로 살아가야 하는 단일민족 스타일 내수용 매체다. TV 드라마와 예능이 열심히 수출된다고 하지만 더빙이나 자막, 해설프로그램을 덕지덕지 붙여야만 글로벌화할 수 있는 전형적인 문화적 할인율 해당 매체들이다.
이런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태생부터가 이미지 형상 중심 커뮤니케이션을 해온 매체가 바로 매거진, 잡지이다. 우리가 흔히 ‘말이 필요 없다’고 할 때 딱 맞아떨어지는 매체가 바로 지금 안방에서 가장 천대 받고 있는 잡지였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다. 신문이나 방송 등 전통의 올드미디어들은 최근 10여 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수익모델을 찾아왔는데 그 하나가 바로 이른바 ‘출판사형 매체’, ‘잡지 방식 콘텐츠 제작’으로 요약된다. 일본의 만화잡지가 숨은 필진을 발굴해 중앙 무대에 데뷔시켜 롱런하도록 조련하는 시스템 같은 수준 높은 문화 매체의 노하우다. 서양의 <GOURMET(고메이)> 같은 미식 주제 잡지가 뉴욕타임스 같은 정통 언론을 웃돌 정도로 강력한 문화창조, 문화권력 매체로 각인되고 애용되도록 하는 마성적인 힘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런 전략 흐름은 역설적이게도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불가촉천민 매체 잡지에게서 글로벌 전략과 최고급 전략의 단초를 구할 수 있다는 반전을 말해준다. 비록 미디어산업이 계간이나 월간 격주간 주간 잡지의 쇠락과 일간지 신문의 붕괴, 역시 일간 단위 본방 사수 TV의 몰락으로 가고 대신 분초를 다투는 무시간 또는 초시간 인터넷 모바일 아래로 들어가 버리긴 했다. 하지만 이런 극단 시점에서 잡지 같은 클래식 미디어가 갖는 고유한 희소가치와 독보적 콘텐츠 파워는 다시 조명 받게 되었다.
모두가 대중과 통속 매체로 갈 때 전문 고급 매체로서 뛰어난 잡지 콘텐츠는 드물고 거칠지만 훨씬 더 빛나는 수제품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아쉬운 이 때 잡지의 재발견은 그래서 꼭 더 필요하다.
프랑스에서 ‘누가 중산층 시민인가를 가르는 기준이 있다. 경제적 능력은 일부에 불과하다. 해마다 문학이나 미식과 같은 분야 전문 잡지 서너 개쯤 정기 구독하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뜻을 잘 새겨들어 할 때다.
완전히 밀려난 잡지 하나 되살리는 시험에 우리 미디어 전체의 사활이 걸려 있는 셈이다. 그러려면 잡지라는 천박한 표현보다는 매거진 또는 순우리말 무언가를 찾아 이름붙이는 재탄생 작업부터 해야하지 않을까?
수제 맥주나 수제 햄버거만 유행을 게 아니라 수제 미디어, 굿 매거진도 어서 빨리 대박을 치면 좋겠다.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