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지난 8일 “자본에 대해 올바르게 알자”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자유경제원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시장경제에 대한 그릇된 통념을 깨뜨리기 위한 연중·연속토론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 날은 자본에 관한 1차 토론회의 자리다.
이날 토론회는 현진권 원장(자유경제원)의 사회, 김행범 교수(부산대 행정학과), 박종운 연구위원(시민정책연구원), 최승노 부원장(자유경제원)의 발제, 김상겸 교수(단국대 경제학과), 이진영 대표(연합경제금융포럼 EFOS)의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발제를 맡은 김행범 교수(부산대 행정학과)는 “자본주의는 신분이 아니라 각인의 장점 및 성취가 어떠한가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각인에게 가장 바람직한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그 지위에는 몇 사람만이 도달한다.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좌절된 야망에 대한 원한(resentment)을 갖는다”며 “오늘날 고도화된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노동의 소유자는 중복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기업가 또는 자본가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또 ‘인적 자본’에서 보듯이 자본과 노동의 개념도 융화되고 있다. 노동만이 가치를 낳는다는 고전적인 자본-노동의 이원론적 시각은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
▲ 김행범 부산대 교수 |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인간이 자신에게 수입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하는 가진 스톡(stock)을 그의 자본이라고 불렀다. 당시의 영어에서 스톡이란 나무의 몸통을 의미하며 시간이 지나면 성장한다는 함의를 가진 것이다. 자본(capital)의 어원은 ‘머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caput에서 유래하였으며 실제로 중세 프랑스에서는 임대차 계약에서 이자의 크기를 소의 머리 수로 표시하였다. 요컨대 자본이란 지금 소비해버릴 수도 있지만 소비를 참고 생산과정에 투입하면 나중에 더 큰 소비재를 생산해 내는 능력이 있는 생산요소이다. 오늘날 capital과 stock을 붙여 만든 자본 스톡(capital stick)은 특정 시점의 물리적 자본의 총량을 의미함이 보통이다.
capital은 19세기말 서양 사상을 번역하던 청나라의 학자들 중 엄복(嚴復,1853-1921)이 재산의 바탕이란 의미로 ‘모재’(母財)로 번역하였는데 이 말은 중국이 청일전쟁에 패한 이후에는 일본에서 번역한 ‘자본’(資本)이란 말로 급격히 대체되었다.
자본주의란 바로 이 자본이 경제의 근본 요인이라는 사상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자본’(Das Kapital)을 썼지 ‘노동’(Arbeit) 혹은 ‘임금’(Arbeitslohn)을 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의 기반이 바로 자본에 있음을 반증한다. 흔히 생산 요소로 토지⦁노동⦁자본을 드는데, 토지 및 노동이 원초적 생산요소임에 비하여 자본은 ‘만들어진’ 생산요소이다. 사냥을 위해 원시인이 사용하는 활과 돌도끼는 자본이며 도로는 도시민의 자본(간접자본)이다. 생산요소로 투입된 것이 자본의 본질이므로 장식용으로 구입한 활과 돌도끼는 자본이 아니라 소비재일 뿐이다. 사물이나 현상의 개념 정의, 이름 짓기 자체가 가치판단 행위 및 정치 행위로 출발하기 쉽다.
자본주의, 자본의 의미 및 종류 등의 개념은 선제적으로 마르크스가 일관성 있게 전개했기 때문에 애초에 그가 만든 개념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논리적 결론도 그의 의도대로 자본에 대한 증오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마르크스적 자본의 정의부터 새로이 검토하는 이유는 오늘날 자본에 대한 그릇된 증오심의 저변에 스며있는 마르크스적 반(反) 과학적 정의를 극복하고 자본의 의미부터 정확히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이란 무엇인가? 첫째, 자본을 토지, 노동과 더불어 단지 생산의 3대요소의 하나로 보는 시각이다(자본실체설). 스미스나 리카도의 이론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에 의하면 자본이란 ‘생산된 생산수단’이 되는 물적 재화로서 보통 자본재같이 생산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소모되어 그 가치가 생산물로 옮겨가는 고정자본과, 원료처럼 생산과정에서 단번에 생산물로 옮겨가는 유동자본이 있다. 토지와 노동이 각각 지대와 임금을 가져오듯이 자본은 이윤을 낳는다. 그런데 이 시각에 사로잡히면 자본이란 본질상 토지⦁노동과 동격의 생산요소일 뿐이므로 그것이 따로 잉여가치를 낳는 요소로 대접 받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 논리로 귀결된다. 노동에 비하여 자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부당하게 높다고 보는 좌파 이론의 저변에는 이런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둘째, 자본을 우회 생산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보고, 자본의 잉여 가치를 우회생산의 이익으로 설명하는 시각 있다. 뵘바베르크, 하이에크 및 슘페터의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이란 최종적 단계의 소비재를 생산하기 위해 투입되는 고차위적 재화(high-order goods)이다(Böm-Bawerk). 이러한 우회 생산이 이루어지게 만들려면 기업가는 먼저 자금을 조달해서 생산수단, 토지 및 노동과 같은 생산요소를 구입해서 이들을 생산과정에 결합해야 한다. 따라서 생산요소를 구매할 능력이 있는 자본(화폐자본)이 특히 중요시된다. 슘페터(Joseph A. Schumpeter) 역시 기업가의 손에 주어진 돈, 즉 화폐자본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이와 동일하다. 이렇게 자본을 이해하면 투입된 노동의 크기에 의해 잉여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회 생산을 가능케 한 자본에게 정당한 보상이 주어짐은 당연하다.
셋째,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을 생산수단이란 측면을 넘어서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역사적,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자본가가 이득을 획득하는 수단’이라고 본다. 자본을 이러한 특정한 정치경제 관계 속에서만 이해하기 때문에 이 생산관계를 벗어난 경우 그것은 이미 자본이 아니라고 본다.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 외의 모든 재화들이란 근본적으로 따지고 노동에서 나온 것이고 노동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축적된 노동’)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자본은 잉여 가치(이윤)을 산출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는 보고 오직 노동에게만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개한다. 자본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사회관계의 역학을 동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학이 아니라 정치의 논리가 된다. 자본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오는 바로 자본에 대한 마르크스식 개념정의로부터 출발한다.
자본에 돌아갈 보상은 없다
▲ 상속은 나쁜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상속은 단순히 돈의 의미를 넘는다. 물려주는 과정에서 자본은 살아남아 그 사회에 유익을 전달한다. 기술, 노하우 일 수 있으며, 생산방식이나 기업일 수도 있다. /사진=연합뉴스
자본에 대한 원한의 근원에는 그것에 보상이 돌아가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거나 돌아갈 보상의 정당한 크기를 넘어 남(노동)의 몫까지 착취한다는 인식이다. 노동만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바로 이러한 원한을 논리적 토대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상품의 가치란 오직 그에 투입된 노동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잉여가치 곧 이윤이 나는 것은 오직 자본가가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것, 즉 불불(不拂) 노동 때문이다. 총 5,000원의 화폐자본을 가진 자본가가 원료와 노동수단(기계등) 구입에 4,100원을 투하하고 하루치 노동을 구입하는데 900원을 투하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시장에서 5,900원에 판매한다. 마르크스는 이 때 원료 및 생산수단의 가치(4,100원)는 전혀 변하지 않은 채 최종 상품 속에 그대로 용해되어 있을 뿐이며(그래서 이를 ‘불변자본’이라 부른다), 새로이 부가된 900원의 가치는 오직 노동의 산물이라고 본다.
즉 노동의 가치 중 900원만큼은 최종 상품에 그대로 용해되어 있으며 그에 더하여 900원의 잉여가치를 더 창출하였다는 것이다. 900원의 자본을 투입 받은 노동자는 상품 속에 1,800원어치의 가치를 용해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에서 나온 것이므로(노동가치설) 그것은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 가야한다고 보는 점이다. 그럼에도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900원만을 지불했을 뿐이며 다른 보상을 하지 않는다. 이틀 치 임금의 가치인 1,800원의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치 임금인 900원만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은 노동의 기여 분만큼 정확히 지불되지 않고 자본가가 제멋대로 자기 몫으로 빼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변자본’이라고 불렀다. 하루치 임금만 주고서 이틀 치 노동을 부과하므로 노동자는 ‘강제노동’을 당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 오류들을 담고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의 원조인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조차 동의 못할 방식으로 노동가치설을 왜곡하였다. 잉여가치의 유일한 원천이 노동이라고 보는 것은 노동이 ‘자본과 함께’ 작동함으로써 가치가 창출되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오히려 위의 예에서 노동의 가치는 900원어치만큼 최종 상품 속에 그대로 용해되어 있는 것이며 진정한 잉여의 원천은 기업가의 몫(기업가 정신, 위험 부담, 혁신, 욕망의 절제....등에 대한 보상)으로 본다는 자본가치설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여기서의 핵심은 적어도 잉여가치는 ‘자본-노동 공동의 산물’로 볼 수 있는 것이지 노동만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큰 오류라는 점이다.
둘째, 노동이 가치를 창출하는 역량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자본의 선도 없이는 가치를 창출하기 어렵다. 마르크스는 900원의 잉여가치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에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사의한 자본의 자기수정(自己受精)이거나 헤라클레스의 초인적 역할이라고 풍자한다. 그러나 노동만으로 부가 창출된다는 논리가 맞다면 왜 자본의 투입이 있기 이전인 자본주의 이전(pre-capitalist) 시기에 왜 노동자들은 더 가난했으며 왜 굳이 자본에 고용되어서만 임금을 얻으려 하겠는가? 만약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산출할 능력이 없는 자본의 소유자일 뿐이어서 당초에 투입한 4,100원만 가져가야 하고 노동자는 자신의 임금인 900원에 그들만의 노력으로 창출한 잉여가치 900원을 다 합한 1,800원을 가져가야 한다면 자본가는 애초에 그런 무익한 투자를 할 리가 없다. 자본의 투입 없이는 노동자는 아예 고용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셋째, 가치를 창출하는 유일한 요소인 노동이며 가치의 크기는 투입 노동량, 곧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마르크스 논리이다. 그 논리가 맞다면 숙련도가 낮고 무능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들어진 제품일수록 더 비싼 제품이 되어야 한다는 기이한 반론이 나온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제품에 얼마의 노동이 투입되었는가는 상관없이 같은 제품이라면 같은 가격에 판매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숙련도가 높아서 적은 노동시간이 투입된 제품에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된다.
자본이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라는 미신
자본에 원한이 깊어지면 자본 및 그를 소유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타락한다는 논리까지 도출하려고 한다. 이에 따라 자본은 인간을 탐욕과 향락욕으로 이끄는 절대적 열정이 되어 도덕적으로도 타락시킨다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괴테(Johann W. Goethe)의 파우스트(Faust) 중 ‘그대의 가슴 속에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서로 떨어지려 하고 있도다’를 인용하면서 ‘자본가의 높이 부풀어 오른 가슴 속에서는 축적욕과 향락욕의 사이의 파우스트적 갈등이 전개 된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는 자본의 도덕적 기반을 오해한 것이다. 그러나 웨버(Max Weber)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인 자본가가 자본축적을 신의 소명(Beruf)으로 보는 도덕적 확신을 얻었다는 점에 더하여, 그 축적된 이익을 낭비와 향락에 소모하지 않도록 강력하게 제어하는 또 다른 가치 곧 ‘금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축적에 성공한 사람을 곧 도덕적 타락은 공산주의, 전체주의를 포함한 어떤 체제하에서든 힘과 돈을 가진 사람이면 빠지기 쉬운 가능성이지 그게 자본의 필연적 속성이 아니다. 자본이 지속적으로 성공하려면 축적된 자본의 재사용에서도 타락이 아니라 금욕이 필수적임을 간과한 것이다. 일부 부자의 타락은 자본의 책임이 아니다.
둘째, 이러한 타락은 증명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증오하는 시각이 갈급하게 찾고 싶어 하는 폭로꺼리일 뿐이다. 그들은 수많은 자본가의 수많은 선행은 외면한다. 혹은 선행을 목도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편견을 바로 인정하기보다는 그 선행을 인용하면서 다른 자본가에게 더 큰 선행을 압박하는 도구로 사용고자 한다. 자본의 도덕적 타락 원인이라는 점을 예증하고자 하나 그 사실을 찾기 어려운 경우 그것은 상상의 세계 곧 문학 속에서 마음껏 만들어 진다. 이 때문에 부자의 타락과 위선을 들추어내는 추리소설이 히트하고 TV 드라마에서 ‘악한 기업가 vs 선량한 서민’의 구도 하에서, 자본가는 으레 벼락부자가 된 타락한 인간으로 그려지고 그들도 종국에는 경제적 파산을 당하여 정의가 바로 잡힌다는 플롯이 즐겨 구사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자본가들이란 ‘창녀는 물론 프롤레타리아의 아내와 딸들을 취함에 그치지 않고 서로의 아내까지 유혹하는 자들’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있다.
셋째, 일반으로 자본주의가 확산되면 고상한 문화를 파괴하고 천박한 저질문화를 양산한다고 보는 비난도 있다. 획일적으로 찍어내는 아파트, 저급한 대중문화의 확산, 저가 제품의 소비재 등을 그 예로 든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전의 고상한 문화란 극소수 사람들만 누리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소비자의 수요만 확인된다면 자본은 얼마든지 시장에 과거보다 훨씬 더 고상한 문화를 소비자에게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다.
특정 음모집단이 독점하는 악?
▲ 자본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외국자본의 경우 상대적으로 심하게 나타난다. 개방에 대한 거부감과 외국자본에 대한 반감이 어우러져 쉽게 국민정서를 흔든다. 우리나라도 외국자본이 우리 경제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을 여러 차례 보였다. /사진=연합뉴스
자본을 특수집단만이 소유하여 다중에게 횡포를 부리는 도구로 보는 대표적인 시각은유태인의 음모로 자본을 파악하는 것이다. 국수주의자 피히테는 자본주의 사회란 인간 자신이 만든 환경을 감옥으로 만드는 절대 악의 시대로 보았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선동할 당시 유럽의 대다수 유태인은 신앙적 측면에서 혹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음에 반대하여 사회주의를 반대했지만 공산주의자 중에도 유태인들이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태인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불발에 그친 베를린, 뮌헨, 부다페스트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반유대주의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 19세기까지의 유태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반(反)기독교적이라는 점에서 증오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전통적 사회를 파괴하고 약탈하는 자본가로 증오 받게 된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무슬림 국가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에 의해 이것이 유태인의 음모라는 선동이 또다시 제기되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태인 샤일록의 패배를 통쾌하게 묘사하듯이 유럽의 반(反)유태주의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마르크스 자신도 유태인이었으나 그는 『유태인 문제에 관하여』에서 유태인의 세속적 토대는 실용주의 및 이기심이고,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흥정이며, 그들이 섬기는 세속의 신은 돈이라고 보았다. 유태인과 자본주의의 논리적 연결을 가장 체계화한 것은 좀바르트(Werner Sombart)이다.
그는 웨버의 논리에 대응하여 개신교가 아니라 유태주의야 말로 자본주의 발흥의 근본이라고 반박하고 유태인은 ‘주식시장의 투기꾼으로서 완벽한 자격’을 갖추었으며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은 다 유태인에게서 나온 것으로 규정했다. 자본주의 경제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자본주의 이전의 ‘자연적’ 삶을 파괴하고 내적 평화와 영혼을 파괴한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후일 나치주의자들의 스승으로 간주된 테오도르 프리츠에서 최고로 증폭되었다.
2차 대전 이후 도 소수자본 독점가라는 점에 초점을 준 음모이론은 여전한 마력을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기업집단을 재벌(財閥)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자본을 독점한 패거리들’로 보는 음모론적 시각과 관련이 있다. 반자본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자본가 중 중소기업은 가급적 달리 다루어 자신의 진영으로 포괄하고자 하는 전략을 취하여 주로는 대기업집단을 공격한다. 그래서 반자본적 정당들도 그 강령에서는 중소기업의 보호를 표방함이 보통이다. 그러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보듯이 주식회사의 시대에 자본 독점이란 불가능하고 대기업 주주들은 여러 우호 지분의 도움을 받아야만 지배권을 행사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소수 집단의 음모로 움직인다는 시각은 군산(軍産)복합, 철의 삼각(iron triangle), 이슈네트워크(issuenetwork) 등의 관념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정치권력이 자본을 증오하게 만들기도 한다
공황 등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가 국가 위기로 전개되면 그 원인을 자본의 탐욕 때문이라는 조작을 통해 자본에 대한 원한을 강화하게 된다. 정치인들은 경제 위기에서 자본가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대중의 불만을 오히려 열광적 정치 자원으로바꾸는 역량이 있다. 히틀러나 루스벨트도 그러한 예이며 한국은 IMF 외환위기 때 정치가 임의로 자본을 재배정하는 이른바 ‘빅딜’이란 정책을 밀어붙였다.
자본의 탐욕이 경제공황의 원인이었다는 인식은 아직도 자본가 및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을 쌓은 중요한 요인이다.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 경제공황 및 중앙 유럽의 금융위기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산물로 선전되었다. 이 원한을 기회로 삼아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장 급진적 반대자인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게 각각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반자본적 정책들이 광범위하게 추진되는 케인스주의가 나타났다. 루스벨트는 반자본주의 대중 선동가들의 수사학과 정책을 수용하여 최고소득 계층에 79%의 세금 및 상속세를 강화하였고, 자본가들은 압제자요, ‘경제에서의 왕당파’이고 ‘권력을 추구하고 대중을 노예화하는 독재자’로 규정하였다 (1936년 연두교서). 그 노선은 ‘반자본주의적 중상모략으로 가득 찬 개를 풀어 놓는 것’으로 묘사될 정도이다.
한술 더 떠 당시 내무장관(헤럴드 이커스)은 ‘거대기업 파시스트들의 아메리카-노예화된 미국을 건설하려는 60여개 가문들’을 통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또 미국 남부 대중 선동정치인 휴이 롱(Huey Long)이 ‘부를 같이 나누는 사회’(Share the Wealth)라는 조직체를 만들어 재산몰수 과세로 부자들의 돈을 압류하고 이를 전 국민에게 재분배하자는 ‘모두가 왕’(Every Man a King)이란 포퓰리즘 운동을 추진하다 대통령 출마까지 나섰다가 곧 암살되었다.
그의 반자본 운동은 2011년 가을부터 시작되어 자본에 대한 증오심을 다시 일으킨 미국의 “Occupy the Wall Street”으로 재현되었으며 한국의 여의도 금융가에서 나타났다. 정치인은 필요시 소수 기업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아인 랜드는 대기업을 미국에서 가장 핍박받은 소수집단으로 규정한 바 있다. 경제 위기의 원인은 공익을 무시한 탐욕스런 자본가 때문이라는 정치권력의 조작은 뉴딜 시대에서 공고한 역사가 되었고 개입주의 경제정책을 수용한 개발도상국에게도 그대로 이전되었다.
정신세계 지도자들의 반자본적 태도
자본에 대한 원한은 세속 정치권력 뿐 아니라 종교 지도자에 의해 그 더욱 강화된다. 뉴딜 시대 산업중심지였던 북부 지역에서 라디오를 통해 많은 추종자를 모으고 있었던 카톨릭 신부 코글린(Charles E. Coughlin)은 국제 금융과 얽혀 있는 월 가의 자본이 유태인에 의해 지휘되고 있다고 맹비난하였다. 처음엔 루스벨트의 강력한 지지자였다가 나중에는 이에 반대하고 더 노골적인 좌파노선인 ‘사회정의를 위한 국가조합’(National Union for Social Justice)으로 반자본주의를 추구했다.
독일, 영국, 스위스 등 유럽의 기독교 사회주의도 비교적 온건한 페이비언주의로부터 후일에는 보다 과격한 해방신학론까지 자본을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보는 감성을 확대하는데 기여했다. 공산주의 이론 자체가 애초부터 성경 구절을 편의적으로 도용한 부분이 많다. 『믿는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행전, 2: 42-47, 4: 32-37)를 사유재산권이 없는 공산사회로 보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데살로니가 후서, 3:10)는 1936년 소련 헌법 12조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의도적인 오용이란 점이 선명한 이런 왜곡을 차치하더라도 오늘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반 자본적 정향을 보였다.
칼바르트(Karl Barth), 라인홀트 니버(Karl Reinhold Niebuhr), 폴 틸리히(Paul J.Tillich),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등 저명한 신학 지도자들이 빈곤, 착취, 불평등, 타락의 원인이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를 벗어날 때에 이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13년 한국에서도 총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세계 개신교를 대표하는 WCC(세계 기독교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es)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과 부조리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사명이라는 반자본주의적 해방 신학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바 있다. 원래 유럽의 기독교 사회주의는 소박한 휴머니즘에서 출발했지만 한국의 경우 일부 종교지도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하지 않으면 곧 민주주주의 후퇴라고 보며 그러면서도 반자본적 태도를 지향한다. 기독교의 이런 정향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각국마다 이런 노선에 반대하는 새로운 종교조직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한국의 경우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에 반대하여 나타난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이 대표적이며, WCC의 친좌파 노선에 반대하여 ICC(국제 기독교협의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나타난 아동 노동, 여성 노동, 구로 공단, 청계천 평화시장의 저임금 노동 같은 문제들은 아예 고용 기회가 없던 시대에 고용을 제공하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이들은 정작 굶주림에 빠진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난에는 인색한 채 자본에 대한 증오심을 높여왔다.
지식인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원한
슘페터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자신을 붕괴하게 만드는 자들을 스스로 낳는데 그 주역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식인이다. 즉 마르크스가 예상한 ‘노동자’가 아니라 그가 ‘부르주아 출신의 이데올로기스트’라 부른 사람들이 자본을 더 혐오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들 지식인은 원한을 조직화하고 육성하고 그 목소리를 나게 하며 그것을 지도함에 주된 관심을 가진 집단이다.
왜 이들이 자본에 대해 비판적인가? 본래 지식인 계급이 전문 직업으로 대두한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발전의 혜택이다. 자본주의는 어떤 체제보다 언론 및 출판의 자유에 관대하고, 또 혁신은 토론의 수단들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산물로 나타난 지식인들의 일부는 정부 관료 및 정당의 정책 입안자로 진출하지만 다 그렇게 흡수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교육의 확대로 사회가 흡수할 수 있는 이상의 일반(비전문적) 교육을 받은 ‘인문주의자’들을 양산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농공상의 미신이 남아있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대학졸업자들은 어느 나라이고 육체노동을 하는 직업에는 대개 고용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 때문에 고등교육 졸업생은 자본주의 세계의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드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들은 현장의 육체노동은 자신에게 너무 저급하게 보거나 그 임금은 자신의 가치에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치에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운다. 불만은 원한을 키운다. 그 원한은 흔히 인간, 계급 및 상품에 대해 지적 인간들의 특징인 비판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주로 ‘불쾌 가치’에 놓여 있다. 비판으로 먹고 살며,지식인들의 생존 자체가 비판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비판은 곧 자신의 생존 이익과 부합된다. 지식인들이 바로 노동계급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글과 말을 통해, 비판적 활동으로 영향을 준다. 그 결과 지식인의 가장 즐기는 것은 자본 및 자본가를 강타하며 자본주의 이상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더해 자본가 스스로의 책임도 있다 미제스에 의하면 유럽의 부자들이 사교계(르몽드 ‘le monde’ )에서 다양한 지식인, 예술가, 공직자, 과학자, 법률가 등의 다양한 어울려 왔음에 비해 미국의 부자들은 다른 계층에 대해 배타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은 유지했을지 몰라도 그만큼 지식인 및 다른 계층으로부터 적대감을 더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지식인은 자본을 그 더욱 멀리하게 된다.
노직(Robert Nozick)도 지식인의 반자본의 성향 이유를 설명한다. 지식인들은 으레 자신이 가장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고 착각한다. 지식인의 활동을 고귀하게 본 플라톤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철인이어야 한다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지적 성찰을 최고의 행동으로 꼽았으며, 배운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점은 동양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지식인은 자신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높은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는 달리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에서 표출된 타인의 수요를 얼마나 잘 충족하는 능력을 갖추었는가에 따라 보상을 할 뿐이다. 지식인은 이런 기준에 으레 미달하기 마련이다. 지식인들은 천박한 딴따라들이나 장사치들이 큰 보상을 받음에 비해 높은 가치를 가진 자신들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본주의에 필연적으로 적대감을 갖게 된다. 미래의 지식인들이란 대학에서 학업 성적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으레 대학 교수가 중심적 권위(central authority)를 가지고 가치(성적)를 배분하는 체제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성공을 부여한 질서란 중앙 통제기관이 없는 ‘시장’이란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높은 가치를 잘 알아주는 중심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자본주의를 싫어한다. 자신들의 탁월함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unrecognized superiority) 때문에 사업에 실패한 기업가나 노동자가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경우보다 글로 먹고 사는 지식인들이 더 큰 적대감을 갖게 된다.
자본은 노동의 적이 아니다
좌파의 사고는 ‘소수 자본가 vs 착취당하는 다수 노동자’의 대립을 전제로 한다. 전자는 생산수단 특히 화폐자본을 소유한 자이고 후자는 오직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주체라고 보는 마르크스의 이분법적 사회관이다. 외견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이런 사고 관성이 남아 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시장의 재원 곧 자본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소액 투자자와 거액 투자자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마르크스적 자본가와는 아예 거리가 멀다. 후자에서도 특히 이른바 ‘연기금 기관’(연금 및 기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으며 주요 거대기업의 최대 주주들도 바로 ‘국민연금’과 같은 연기금기관이다. 자본시장의 자본의 압도적 비중은 과거에 마르크스가 연상한 ‘돈으로 돈을 버는 소수 자본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연기금 기여금을 납부한 수많은 봉급생활자, 자영업자, 봉급생활자,저축을 하는 모든 정규직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낸 돈에 의존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시장을 보자. 기업가들은 은행에서 자본을 융통하여 사업을 한다. 은행의 예금은 소수 자본가만이 저축한 것이 아니다. 요구불 및 저축성 계좌를 가진 노동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개인들의 저축이 예탁되어 있으며 그 돈은 기업에게 대한 자본으로 제공된다. 노동자의 돈이 곧 자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때로는 노동자가 투자를 직접 하기도 한다. 특히 1974년 이후 도입된 ‘우리사주제도’는 노동자가 곧 자본가란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동자는 출근하기 전 신문을 통해 그 주가 상승 소식을 기대한다. 그러고 노동자로 출근한 산업 현장에서 때로‘자본의 횡포를 박살내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강경 노동쟁의로 기업가와 맞선다. 그 다음 날 노사분쟁 때문에 통해 바로 자신이 ‘우리사주’로 있는 그 기업의 주가가 떨어졌음을 다음 날 아침 신문에서 확인한다. 자본가 혹은 기업가를 공격하는 것이 곧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의 노동자를 억압한다는 19세기 마르크스적 구도는 오늘날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신의 소속 기업이 아니라 다른 기업 주식에 투자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소속 기업에서는 강경 노사 투쟁으로 기업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어내기를 희망하지만 자신이 투자한 다른 회사에서는 강경분쟁으로 주가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희망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각 기업 속 노동자들이 행동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집합적 행위의 문제’가 나타나고 그 결과 산업 전반에서 노사분쟁의 격화가 나타나 결국 기업은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택한다. 그 결과는 노동자로서의 그는 임금을 받을 기회도 없어지며, 투자자로서의 그는 주식에서 얻을 이윤도 낮아지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구조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기업가(박종운) 혹은 자본가(최승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본에 대한 가학(sadism)은 곧 자학(masochism)일 뿐이다.
또 다른 국면은 자본-노동의 의미 변화이다. 자본-노동의 주체가 중복됨을 넘어 이제는 자본-노동의 본질 자체가 융화하고 있다. 인적 자본(human capital) 개념이 보여 주듯이 양자는 노동은 자본과 대립되는 별도의 생산 요소가 아니라 밀접히 결합되어 가는 것이다. 임금은 노동에 대한 자본으로 결정됨이 아니라 노동의 질 곧 지식, 교육훈련, 건강, 정보 등 개인의 노동 속에 용해되어 있는 인적자본 스톡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Gary S. Becker, Theodore W. Schultz). ‘자본으로서의 노동’을 주목해야 하는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지식기반사회에서 이러한 국면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미제스가 본 반자본주의(Anti-Capitalistic mentality) 심성
신분 사회에서는 자신의 실패 이유는 낮은 태생적인 신분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신분이 아니라 각인의 장점 및 성취가 어떠한가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각인에게 가장 바람직한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그 지위에는 몇 사람만이 도달한다.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좌절된 야망에 대한 원한(resentment)을 갖는다. 거기에 이르지 못한 실패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내면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본주의에 대한 원한을 하나의 철학-곧 반(反)자본주의 철학으로 승화한다. 자신이 높은 가치를 지닌 사람이되 불행히도 이 사회는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며 부정직하고 파렴치한 악당, 사기꾼, 조악한 개인주의자들에게 보상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실패한 것은 정직했기 때문이며 이에 비해 성공한 자들은 천박한 술수로 부를 얻었다. 자신도 그런 식으로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미덕과 빈곤’ 대 ‘악덕과 부’ 중에서 자신은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택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책임의 원리’가 내리는 판결을 벗어나게 해준다.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의 부족이 아니라 자본을 가진 자들의 횡포 때문이라는 위로는 임시적이나마 도덕적 자신감을 준다.
자본주의에 대한 원한은 몇 가지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지식인은 똑똑한 자신보다 천박한 장사치나 딴따라가 더 많은 수입을 얻게 만드는 자본주의에 적대적인데 이는 앞에서 보았듯이 슘페터도 같은 시각이다.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는 자신의 지적인 업무의 참 가치를 몰라주며 ‘무식한 자’들의 단순하고 천박한 노동에 더 높은 보상을 준다고 불만을 갖는다.
우리의 일부 대기업 오너 상속에서 보듯이 성공 기업가의 친인척 및 후손들 중 기업후계자로 낙점 받지 못한 자들(미제스는 이들을 ‘사촌들’이라 부른다)은 자본가적 역할의 가치에 무지한 채 끊임없이 상속에 관한 소송을 벌이며 이 상태를 만든 자본주의를 증오한다. 그 중 일부는 반자본적 저널리즘을 지원하며 연구소 및 대학에 돈을 댄다. 또 하나 주목할 국면은 연예계의 반자본주의적 정서이다. 본래 연예계의 대중은 금방 권태로움을 느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는다.
소비자인 이들의 비위에 맞추기에 급급한 연예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이란 불안 속에 산다. 연예인의 돌연한 자살들은 이러한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연예계 인물치고 좌파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파 여배우, 무용수, 코미디언, 가수, 제작자들은 이러한 불안의 원인이 시장 경제의 경쟁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받는 엄청난 소득을 받는 소수 톱스타를 제외하고는 대개 저소득을 받는 연예인들은 반경쟁 및 반자본적 정서에 기울어지기 쉽다. 소설가들도 한 몫 한다. 미제스가 ‘사실상 사회주의 설교’로 본 에밀 졸라의 작품, 찰스 디킨즈의 작품, 존 스타인벡의 음울한 글들, 한국의 카프 문학에서부터 가까이는 조세희 및 조정래에 이르기까지 큰 줄기로 이어지고 있다.
슘페터가 본 반자본주의 심성: 사회주의는 ‘원한’에서 기인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에 대한 원한을 열등한 다수가 탁월한 소수에 대해 품는 적개심, 성공한 소수에 대해 성공 못한 다수가 갖는 반감에서 찾는다. 슘페터는 반기업가 정서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속성이라고 규정한다. 자본주의를 성공하게 하고 그에 활력을 주는 역동성 자체, 곧 새로운 기업가의 등장, 혁신의 성공은 그러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상대적 몰락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태적 상태의 계층이 몰락함은 역동적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측면이다(창조적 파괴). 그러나 몰락되는 당사자들은 자본주의를 증오한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반대자를 창조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와 슘페터는 동일하다. 다만 마르크스는 그러한 반대자가 물질적 궁핍 때문에 오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슘페터는 물질적 궁핍 보다는 기업가 정신의 역동성에 대한 심리적 원한 혹은 증오 때문으로 본다. 니체 풍의 이러한 원한(resentment)의 근거가 도덕적으로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이 우리 시대에 자본을 악이라 보는 적대감의 원천이다. 그러나 원한은 적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 나의 성숙과 발전에 기여하지는 못한다.
결어
자본주의⦁자본⦁자본가란 용어는 마르크스가 선제적으로 규정한 것이며 그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생활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놓았으며 자본 없이는 어떤 기술진보도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자본주의는 신분이 아니라 각인의 장점 및 성취가 어떠한가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각인에게 가장 바람직한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지만 그 지위에는 몇 사람만이 도달한다.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좌절된 야망에 대한 원한(resentment)을 갖는다. 자본이 곧 도덕의 타락을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을 특정 음모집단이 소유한 만 악의 근본으로 보는 것도 타당한 것이 아니다. 정치권력은 경제 위기 때에 자본가를 위기를 초래한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도 원한을 강화한다.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내적 우월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능력과 성과만으로 보상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본주의에 적대적이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는 연예인, 화이트칼라 노동자, 문학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자본을 적대시하는 진영으로 유도한다. 오늘날 고도화된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노동의 소유자는 중복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기업가 또는 자본가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또 ‘인적 자본’에서 보듯이 자본과 노동의 개념도 융화되고 있다. 노동만이 가치를 낳는다는 고전적인 자본-노동의 이원론적 시각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여러 요인에 의해 자본에 대한 원한이 만연해 있다. 자본에 대한 원한이 합당한가 보다 그것이 왜 나타나는가? 가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다. 여기서는 그러한 원한이 왜 나타나는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자본 없는 노동만의 경제는 아예 자본주의 이전 사회로 귀결할 뿐이다. 노동 및 자본에게 각각의 정당한 몫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이 자본에 대한 원한을 바로 잡는 토대가 될 것이다. /김행범 부산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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