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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 안보·경제 두 토끼 잡았다

2015-07-16 08:36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대한민국이 이룬 기적 같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찾아 그 경제적 효과와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연중·연속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15일에는 “베트남 파병: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용산 전쟁기념관 1층 이병형홀에서 토론회를 개최한다.

토론자로 참석한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은 “베트남전은 한국 경제발전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밝히며 “1963~73년 기간 중 한일관계 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여로 획득한 외화 총액은 한국 외화수입 총액의 3분의 1에서 절반에 이르는 규모”였다고 말했다. 일본이 6·25를 통해 경제부흥을 했듯 베트남전은 한국경제의 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 파병은 우리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오랜 열등의식, 피지배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자질에 새롭게 눈뜨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김 편집장의 설명이다. 아래는 김용삼 편집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남미의 파라과이 같은 나라는 1870년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의 삼국동맹전쟁에서 패해 전 국토의 3분의 2를 잃고 남자의 90%가 목숨을 잃어 나라가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다. 세계인들이 관광을 많이 가는 이구아수 폭포가 원래는 파라과이 영토였다.

반면에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중국에 있던 독일 조차지를 비롯하여 남태평양 상의 독일령 섬들을 점령했고, 시베리아 일부지역을 차지하는 등 세계열강으로 도약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았다. 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쫄딱 망했을 때 이웃한 한국에서 6‧25 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 기사회생하는 전기를 맞게 된다.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들로 미루어보건대 베트남전 참전은 우리에겐 국가의 도약과 산업화 성공을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베트남공화국은 1955년 10월 27일 수교했고, 국회의 가결로 우리 국군이 1964년 9월 11일부터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6개월간에 걸쳐 연 31만 2,853명이 참전하여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 회의 군사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5,000여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개선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끊임없이 베트남전 참전이 유감이고 잘못되었다고 망언들을 내뱉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시절 “우리는 불행한 전쟁(베트남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발언한 데 이어 천 득 렁(Tran Duc Luong)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에 관하여 ‘사과’까지 했다.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도 “월남전 참전은 유감”이라고 발언했고, 김영삼 정부의 교육부장관이었던 김숙희도 1995년 5월 10일 국방대학원 강연에서 “월남전 참전은 용병이기 때문에 명분이 약했다”고 발언하여 충격파를 던졌다.

그렇다면 그토록 유감이었고,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면, 그토록 유감이고 명분 없는 전쟁에 국군이 용병으로 참가했다는 전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를 냉엄하게 따져서 잘못된 지식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을 파병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참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립했다.

1. 공산 침략 하에 있는 베트남 공화국에 직접적인 원조를 제공함으로서 6‧25 동란 때 동일한 위험에 직면했던 한국을 위해 싸워준 자유우방의 원조에 보답한다.

2. 베트남 전선은 국제 공산주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와의 싸움터로서 한국 전선과도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우리의 제2전선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은 아시아의 평화와 우리나라의 국가안전보장과도 직결된다.

3. 아시아 집단 안전 보장 체제 및 대공(對共) 공동 방위 노력에 최대한 참여하여 아시아 지역 협력에서 한국의 역할을 증대시킴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를 향상시키며 국위를 선양한다.

4. 한국의 동남아 진출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고 우리의 국가 이익을 추구한다.

5. 공산주의자와의 싸움을 통해 귀중한 체험을 쌓아 전투력 증강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자유 우방군과의 협력을 통해 그들과의 유대를 강화한다.

   
▲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들로 미루어보건대 베트남전 참전은 우리에겐 국가의 도약과 산업화 성공을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고 볼 수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베트남은 한국을 비롯한 미국과 우방국들의 헌신적인 도움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 30일 패망했다. 베트남이 거지군대나 다름없는 월맹군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망한 것은 국가지도부를 비롯한 군 지도부의 부패와 무능, 사회 곳곳에서 날뛰는 간첩을 비롯한 반국가세력, 내란세력들의 선전선동과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가톨릭 지주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개혁을 실시하지 않았고, 가톨릭 중심의 지도층이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믿고 있는 불교를 탄압하면서 민심이 돌아섰기 때문이다.

결국 베트남의 패망은 농지개혁에 실패함으로써 광범위한 소작 국민들이 베트콩과 월맹이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심정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는 베트남전 참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세웠던 참전의 목적을 훌륭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달성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의 베트남전 참전은 안보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경제로 보상이 돌아왔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베트남전이 확전되어 많은 전투 병력이 필요하게 되자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파병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선뜻 파병에 동의하는 국가가 나서지 않자 남한에 주둔 중이던 주한미군을 빼내서 베트남으로 이동시키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만약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빠져나가면 우리 안보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된다.

박정희는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하면 주한미군을 빼내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한국군 해병대와 육군 1개 사단을 베트남에 보냈다. 이는 한반도 역사상 대마도 정벌을 제외하면 최초의 대규모 해외 파병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전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자 미국은 한국에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실리를 얻어내고자 한국이 베트남에 1개 전투사단을 증파하는 조건으로 ‘미국 정부의 고려를 위해 제안된 경제·재정적 지원(Economic and Financial Supports Suggested for Review by USG)’이라는 요구사항을 미국 정부에 제시했다. 파병을 위한 추가 재정부담, 한국의 면제품에 대한 미국의 쿼터 시스템 철폐 등 사실상 미국이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다급해진 미국 정부는 1966년 3월 4일‘ 브라운 각서’라 명명된 비망록을 보내 한국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미국은 한국이 베트남에 1개 전투사단을 증파하면 베트남 참전에 필요한 장비와 각종 경비를 지원하고 파월 장병들의 급여도 지불하며,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구매하는 물자도 최대한 한국에서 조달하도록 했다.

또 주월 미군과 베트남군이 구매하는 물자가운데 일정 품목은 한국에서 구입하기로 했으며, 미국 국제개발처(AID)가 실시하는 베트남 개발 및 재건 사업에 필요한 물품도 가능한 한 한국에서 조달하도록 했다. 그 이외에도 미국은 현금차관 1억 5,000만 달러와 AID 차관을 추가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이로써 한국은 2개 전투사단(맹호, 백마부대)과 1개 해병여단(청용부대), 그리고 지원부대(비둘기부대)의 대병력을 파병하여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약 5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상주시켰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은 6‧25 때 우리를 도와준 미국에 보답하게 되었으며, 실전경험이 부족했던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실전경험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이루어진 한미 간의 포괄적 협력은 한미동맹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켰다. 한국군 전투병력 파견으로 주한미군의 감축계획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국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65~70년 사이에 미국은 모두 10억 달러 정도를 한국에 지원했으며, 한국군에 대한 최신 군사장비 지원을 위해 미국은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

한국에 지원되는 파월 장병들의 해외 근무수당을 비롯한 각종 지원금은 경제개발을 위한 소중한 자금으로 활용됐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게릴라부대의 청와대 공격시도 후 한국은 브라운 각서에 따라 미국에 M-16 소총 10만 정 제공 및 M-16 소총공장 건설, 전투폭격기 17개 대대 창설, 전략 공군기지 건설 지원 등을 긴급 요청했고, 미국은 한국 요구의 85% 정도를 수용함으로써 한국군 전력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도 막대했다.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납품할 기회가 주어졌고, 한국 용역회사들이 한국군과 미군 지원활동을 했으며, 한국의 건설 회사들도 각종 건설공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당시 한국 철강수출의 94%, 수송 장비 수출의 52%가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에 한국 기업들의 진출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뛰어든 기업이 한진과 현대건설이었다. 한진그룹은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 생필품이나 물자가 귀해지자 중국에서 무동력선(일명 정크선)에 물자들을 싣고 인천항으로 입항하여 시작된 정크무역을 계기로 탄생된 기업이다.

   
▲ 1965~70년 사이에 미국은 모두 10억 달러 정도를 한국에 지원했으며, 한국군에 대한 최신 군사장비 지원을 위해 미국은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쳐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은 인천항에 입항한 중국 정크선의 물건들을 서울까지 실어 나르는 운수업으로 부를 축적하여 한진그룹을 창업했고, 그 후 국내에서 주한미군의 수송용역을 전담하며 미군과 인연을 맺을 것을 계기로 베트남에 진출했다.

한진은 베트남에서 미군 군수물자 수송, 용역사업을 맡아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간 1억 5000만 달러의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한국은행의 가용외화 총약이 수천만 달러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금액이다. 조중훈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대기업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정주영이 창업한 현대건설은 6‧25 때 부산에서 미군 공사를 수행하면서 회사를 성장시켰다.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 증강정책 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미 제2공병단, 24공병단 등을 통해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 오산비행장 활주로 공사, 의정부 저수지공사를 비롯해 도로와 교량, 병영, 막사, 창고, 휴전선 지역의 작전시설 등 대규모 공사를 우리 건설회사에 발주했다.

당시 우리나라 건설업계의 실태는 근대식 건설 기술이나 대규모 공사 시공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미군 공사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선진 건설기술을 가진 미국의 엔지니어와 감리자들과 접촉하면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전혀 새로운 건설 문화와 접하게 된다.

미군 공사 수행을 통해 우리 건설업계는 공사수주, 계약, 기술 등에 있어 해외 건설시장 진출에 필요한 경험과 훈련을 쌓는 기회가 되었으며, 여기서 실력을 갈고 닦은 국내 건설회사들이 1960~70년대에 해외 진출을 선도하며 대표적인 건설업체로 성장했다.

현대는 1966년 미 해군의 캄란만 건설공사에 참여했고, 나트랑, 퀴논, 캄란 등지에 7개의 세탁공장을 설치하여 한 해에 1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현대는 여기서 번 자금으로 단양시멘트공장을 확장했고, 현대자동차 설립 자금으로 투자하여 울산에 10만 평의 자동차 공장 부지를 매입했다.

이런 사례로 미루어보면 베트남전 참전은 단순히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가서 돈을 벌어온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후 한국의 산업화, 그리고 중화학공업 건설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한미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차관을 대폭 늘렸고 한국 제품에 대해 시장을 개방했다. 1964년 한국 수출에서 대미 수출의 비중이 30%를 돌파했고, 1968년에는 무려 52%에 달했다.

외자도입에서도 미국의 기여는 결정적이었다. 즉, 공공차관에서 미국의 비중은 62%에 달했고, 상업차관도 34%나 되었다. 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도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의 촉진제가 되었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가 경제개발계획 추진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면, 베트남전은 한국 경제발전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1963~73년 기간 중 한일관계 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여로 획득한 외화 총액은 한국 외화수입 총액의 3분의 1에서 절반에 이르는 규모였다. 일본이 6․25를 통해 경제부흥을 했듯이 베트남전은 한국경제의 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트남 파병은 우리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오랜 열등의식, 피지배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자질에 새롭게 눈뜨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 미국의 원조와 군정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던 피지배의식, 열등의식, 속국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성을 되찾았다. 베트남 파병은 자주성 확립이라는 견지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원철은 우리 국군과 파월 노무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행해진 전국 규모의 대규모 해외연수였다고 지적한다.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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