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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란 탈북 1호 여성박사가 본 남북한 여성운동의 실체

2015-07-19 09:38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7월 17일 ‘자유주의여성포럼’을 개최했다. <남북한 여성계와 자유주의 관점에서 본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맡은 이애란 원장(자유통일문화원)은 남북한 여성계의 특징과 현실을 비교 분석하며, 대한민국 여성운동권의 사상적 오판과 좌파적 사회운동 행태에 대해 비판했다.

이 원장은 70년의 기간을 거쳐 오면서 대한민국과 북한이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대별되는 체제를 선택한 것과 같이 여성운동 또한 서로 다른 목적과 방향, 방법으로 진화해 왔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북한이 해방직후, 1946년 7월 남녀평등권 법령을 발표하고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면서 여성들을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담당한 혁명의 주력군”이라며 여성지위 향상에 대해 선전해 왔지만 그들의 선전과 현실과는 전혀 다르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현실의 북한 여성의 삶은 식량난과 온갖 차별, 성폭력, 가정폭력과 같이 인권침해에 시달리며 인간이 누려야 할 기초적인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여성운동가들과 정치인, 학자들은 북한이 선전하는 대외선전용 여성정책에 매료된 채 처절한 북한여성들의 삶과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치명적 오류를 보이고 있다고 일침했다.

또 이 원장은 더 이상 종북 좌파성향의 여성단체와 여성운동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한국 여성계에 의해 통일 운동이 주도되는 것을 좌시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애란 원장의 주제 발표문 전문이다.


개요

분단 70년의 기간을 거쳐 오면서 대한민국과 북한은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대별되는 체제를 선택하였고 여성운동 또한 서로 다른 목적과 방향을 향해, 다른 방법으로 진화해 왔다. 북한은 해방직후인 1946년 7월 남녀평등권권 법령을 발표하고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면서 여성들을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담당한 혁명의 주력군”이라고 추켜세웠으며,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고 선전해 왔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정치참여와 사회적 지위개선 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남한의 페미니스트를 비롯한 여성운동가들은 북한의 여성들은 오히려 정치적인 입지나, 사회적 지위향상에 있어서 남한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여성정책 또한 서류상의 정책과 실질적인 실천차원에서의 정책은 상당한 차이가 있고, 북한여성의 입장에서 남녀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이며 북한여성들은 실제로 남한여성들에 비해 인권적 침해와 사회적 차별, 노동착취, 성폭력과 성추행 등에 매우 취약한 형편인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남한의 여성운동가들과 정치인, 학자들은 북한이 선전하는 대외선전용 여성정책에 매료되어 실제적으로 북한여성들이 겪고 있는 이중고와 인권침해,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 인간이 누려야 할 초보적인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는 북한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남한의 여성계는 북한의 여성계와 연계하여 통일을 위한 어떤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남한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들은 실제로 비정부, 민간운동가들이지만 북한에서 파트너로 활동하는 명목상의 여성운동가들은 그 자체가 남한의 파트너로 활용하기 위한 정부조직의 요원일 뿐이다. 따라서 여성운동가들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여러 종류의 정치적 대화와 교류 등의 활동은 북한의 대남공작전술에 말려들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 또한 밝히기 민망한 진실이기도 하다.

이 연구에서는 북한의 여성정책과 북한여성의 실제적 지위와 삶에 대해 고찰하고 북한의 사회주의 배급제도가 붕괴되면서 수백만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을 거쳐 형성된 지하시장경제가 여성의 삶의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남한의 여성계와 페미니스트들이 추진하고 있는 남북한 간 여성의 대화와 교류에 대한 탈북여성의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 지난 9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서울 마포구 효창목길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사단법인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 청년지식인포럼 스토리케이(Story K) 등 14개 단체가 공동으로 ‘신은미 수상철회 요구’ 시위를 벌였다. /사진=스토리케이
1. 북한의 여성정책과 북한여성의 실제

북한은 해방직후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서 여성들을 봉건적 질곡에서 해방시키고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정책을 내세우고 축첩제도와 강제혼, 매매혼 등 봉건적인 가족제도와 혼인관계 등을 폐지하고 여성들에게도 남성과 꼭 같이 선거권을 부여하고 토지개혁을 통해 남성과 동등한 조건으로 토지를 부여하는 등 의 조치를 통해 인구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여성에 대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또한 김일성은 1945년 11월 18일 북조선민주여성동행(후에 조선민주여성동맹)을 창설하여 여성을 정치조직화 하였으며 1946년 6월 “북조선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노동법령”등을 공포하면서 여성들에게도 8시간 노동제와 사회보험제, 동일도동임금, 유급휴가, 노동안전 및 위생조건의 개선, 산전산후휴가 77일, 유아수유시간 1시간 등 모성보호조항을 규정하여 여성의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정책을 수립하였고1) 1946년 7월 “북조선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의 발표를 통해 여성의 사회정치적 지위 문제를 해결 하는듯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북한정권수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더 많은 기여를 한 반면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가부장적인 지위의 변화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은 정권수립 이후 사회주의화와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한 노동력 확보의 차원에서 여성정책을 보다 구체화하였고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게 되었다. 북한은 그러한 차원에서 사회주의 헌법과 어린이 보육을 위한 법령과 산전산후 휴가제 등의 제도적 보완을 지속해 왔다. 북한은 “전국 어머니대회”를 여러차례 개최하고 여성의 사회진출을 적극 장려하기 위해 탁아소, 유치원의 설립과 운영을 장려하였으며 여성들을 최고인민회의와 지방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하고 여성간부들을 발굴하기도 하였으나 여성의 경제활동은 주로 식품가공, 방적, 피복공업 등의 경공업분야와 식당, 상점 등 편의 봉사부문과 교육, 문화, 보건 등의 분야에 치우쳐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활동 및 경제활동 참여가 확대되면서 가사일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밥 공장을 비롯한 편의 봉사시설을 확대하고 가공식품 생산을 장려하였으나 실제로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그로 인한 여성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기도 하였다. 북한은 여성의 지위를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함께 밀고 나가는 혁명의 동력”이라고 규정하고 사회적, 정치, 경제적 생활에서 남자와 꼭 같은 권리를 보장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전국어머니대회”, “어머니교실” 등을 개설하고 여성에 대한 교육 교양을 강화하였다. 북한은 여성들에게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담당한 혁명의 동력으로써의 사회적·정치적 역할과 함께 가정혁명화와 가사부담 등 여성의 역할을 가정과 자녀교육, 남성들의 뒷바라지와 같은 가부장적인 전통적 여성상을 강요하였으며 그러한 모델로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을 내세웠으며 강반석을 조선의 어머니로 떠받들며 우상화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여러 기회를 통해 강반석의 모성애와 자기희생, 헌신적인 내조, 강인한 인내 등에 대해 직접 언급하기도 하면서 여성의 모성애와 남성에 대한 헌신적 내조, 가사에 대한 부담을 강요하기도 했다. 김일성에 뒤이어 김정일 또한 자신의 어머니이자 김일성의 첫 번째 아내였던 김정숙에 대해 김일성의 혁명동지, 투사로써의 여성상과 아내로서의 여성상을 강조하면서 강반석에 이어 북한여성들이 따라 배워야 할 모델로 추켜세웠다. 김정일은 김일성보다 한수 더 떠서 김정숙의 생일인 12.24일을 국가적인 행사일로제정하고 모든 기관, 기업소와 단위들에서 충성의 노 래모임과 학습경연 등을 개최하여 공산주의적 투사로서의 여성상과 함께 전형적인 가부장제도의 여성상으로써 남편과 자녀를 위해 끝없이 헌신하고 봉사하면서도 가정살림과 경제활동, 정치활동 등 어떤 일도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울트라 수퍼 여성이 되도록 장려하였다.

물론 북한은 1당 독재국가이고 민간의 어떤 정치적 활동도 허용되지 않 때문에 모든것이 당에 일방적인 판단과 결정에 의해 진행되며 따라서 여 이 최고인민화의, 지방인민회의 대의원이나 국가가 운영하는 기관, 기업소에 간부로 등용되는 것은 전적으로 당과 수령의 결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성에 대한 간부등용에서 주민의 생활과 관련된 식품 및 생필품의 유통과 배급, 의료 및 편의 봉사분야는 간부들 부인들의 몫이 되었고 이것은 정경유착의 중요한 고리가 되어 배급제도에 의한 부족경제체제에서 간부들의 생활이 풍요로워지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북한은 1980년대에 간부들의 부인들을 모두 상업 및 편의 봉사분야에서 내보내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간부부인들은 또다시 본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로 인해 부정축재를 하게 되고 호의호식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북한여성들로 하여금 출신성분이 좋고 출세가 가능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대학을 10개 나오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고 그러한 의식은 조혼을 조장하기도 하고 남편공대 신드롬을 만들어 내었다.

특히 북한은 배급제국가로써 일하는 여성과 일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배급제도는 엄청난 차별이 존재했는데, 일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식량배급이 남성과 같지만 일하지 않고 있는 전업주부에 대해서는 3세 유아와 같은 양의 배급인 1일 300그램을 배급하였고 모든 생필품에 대한 배급에서 남편을 통해서만 배급을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에 여성의 가치를 더욱 더 남성 의존적으로 조장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가구당 세대주가 정해지고 세대주는 무조건 나가 일을 해야 하는데 만일 사별을 당했거나 이혼을 당했거나, 또는 남편이 정치범이나 여타의 범죄로 인해 교화소에 가게 되는 경우에는 여성의 처지에 상관없이 직장생활을 해야 하고 남편이 일하던 회사나 또는 농촌이나 탄광, 광산, 임산, 건설업 등 중노동 분야에 강제적으로 끌려가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쩌면 여성의 존재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운명이 바뀌게 되기 때문에 독립적인 여성의 삶은 상상조차 할수 없다.

북한에서 탄광, 광산, 농촌, 임산, 건설 등 중노동분야에서 일하는 미혼여성들의 경우에는 결혼외에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기 때문에 이런 여성들의 경우 일찍 결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런 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전업주부로써 살아갈 확률이 매우 높으며 이러한 여성들은 특별한 재능도 없고 배급을 300그램만 받기 때문에 엄청난 가사의 부담을 감당하고 있지만 남편이나 가족들로부터 엄청난 구박을 당하기도 한다.

   
▲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보통강신발공장을 소개하며 최근 북한의 젊은 층에 화려한 디자인의 신발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젊은 여성에게는 높은 굽과 화려한 디자인의 구두가 남성에게는 뒤축이 높고 앞이 뾰족한 구두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조선신보는 전했다. 사진은 보통강신발공장에서 생산된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북한 주민들. /사진=연합뉴스
북한도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산전·산후 유급휴가제를 도입하고 탁아소, 유치원운영 등 모성보호제도를 운영해 왔지만 실질적으로 여성이 결혼하여 임신과 출산 육아의 부담을 안게 되면 사회생활에 지장이 되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한 생산직을 제외한 인기 있는 직종들에서는 대부분 결혼과 동시에 직장생활을 그만두도록 되어있으며 결혼한 여성은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북한이 정상적인 사회주의체제로 운영될 때에는 당원이 되어야만 간부등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군입대를 하여 10년간 군대생활을 하는 남자들은 군생활 기간에 입당이 용이하고 또 간부등용의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군복무이기 때문에 여성에 비해 간부등용에 훨씬 유리하고 출산과 육아의 부담이 있는 여성에 비해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조건도 훨씬 유리하다. 특히 북한은 남한과 달리 출산이나, 육아, 가사부담 등을 타인에게 절대로 맡길 수가 없고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뿐 아니라 가사조건과 출산, 육아조건 등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여성의 경우 간부등용에서 남성에 비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1970년대에 실시된 인민경제 6개년계획을 발표하면서 여성들을 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하기 위한 음식물가공업과 가전제품의 생산 등의 과제를 제시 했지만 현재까지도 북한에서는 자체로 가전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고 중국장사군들을 통해 북한의 장마당에 반입된 쿠쿠밥솥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나 전기공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이 용이하지 않은 형편이다.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 간부등용과 좋은 일자리를 얻는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군에 자원하거나 돌격대와 같은 힘든 노동을 하는 곳에 자원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일하면서 성상납이나 성폭행, 성추행 같은 것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도 그에 대한 보호는 전혀 생각조차 할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남한의 여성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나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등은 남한과 달리 사회적인 명예직에 불과하며 실제적인 역할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북한에서 실제로 권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기관이나 공장, 기업소의 행정 간부나 당 간부로 활동하는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는 북한의 여성간부가 남성에 비해 월등하게 적고 실제로 농촌이나 현장에서 일하는 인력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가정살림에서도 남성에 비해 여성이 훨씬 더 많은 일과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남성이 10년이상 군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건설노동과 탄광, 광산, 임산, 농업 등 중노동분야에는 미혼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이며 따라서 대부분의 간부나 관리직은 남성들이 차지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알지 못한채 북한이선전하는 자료에만 의존하다보니 최고인민회의와 지방인민회의 대의원숫자만을 기준으로 북한의 여성지위향상을 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나 지방인민회의 대의원들은 모두 선출직의 형식을 띤 임명직이기 때문에 명예만 있을뿐 실질적인 역할은 전무하며 실제로 자신의 기본적인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수행한다. 따라서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에 대한 기여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2. 북한의 배급제붕괴와 북한여성의 지위 변화

1) 여성의 장사활동과 이혼율 증가

배급제시대에 직장여성들은 1일 배급량도 700g으로 남자와 동등하고 특히 여성의 직업이 생활에 보탬이 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경우에는 남자들 앞에서도 큰소리를 치기도 하고 세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직장여성에 비해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전업주부들의 경우에는 1일 배급량도 300g밖에 안되는데다가 남편의 직업과 남편의 능력에 의해서만 생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여성의 가사노동 같은 것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오히려 전업주부 여성들은 식량배급도 아주 적게 받으면서도 여러 가지 도로닦기,집짓기, 농촌동원 등 다양한 사회노동에 강제로 동원되어 무보수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그러다가 국가가 배급을 중단하고 남편들이 직장에 나가 일을 해도 월급을 받아오지 못하게 되자 가계의 생계는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 되었고 여성들을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다양한 장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도 배급과 월급을 전혀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이 가장 바보 취급을 받게 되었고 항간에는 “1등머저리 직장에 다니는 여자, 2등 머저리 돼지 기르는 여자, 3등머저리 장사하는 여자” 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고 전업주부들은 돼지나 개를 사다 길러서 팔거나 수매를 시켜 식량을 마련하고 콩읋 사서 두부를 만들어 팔았으며, 식량을 사서 음식을 만들어서 장마당에 내다 팔았다.
밑천이 있고 뒷 배경이 든든한 여성들은 간부들을 끼고 각종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특히 국경연선에서는 도강증을 뒷돈을 주고 떼고 중국방문을 해 중국 상품들을 차떼기로 사와서 북한시장에 내다 팔아 엄청난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국경지역에 통행증을 받기가 어려운 점을 이용하여 뒷돈을 주고 통행증을 발급받아 중국 상품을 내륙지대나 청진, 함흥, 평양 등 여러 지역을 유통시켜 돈을 벌었다. 이러한 장사를 하는데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시간이었기 때문에 직장여성들에 비해서는 전업주부로 있던 여성들이 훨씬 유리하게 되었고 전업주부로 있던 여성들 가운데 통 크게 장사를 하면서 폭리를 취해 벼락부자가 된 여성들이 나타나면서 남녀의 역할분담이 바뀌게 되었다.

특히 북한은 남성의 경우 특히 단속이 심하기 때문에 아무리 배급을 주지 않고 월급이 나오지 않아도 무조건 출근을 해야 하고 만일 결근을 하는 경우에는 직장에 식량휴가를 내고 그 기간에 따르는 돈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직장에 다니는 사람에 비해 전업주부들의 입장이 훨씬 유리하게 되었다. 북한 당국에서 배급이 중단되고 장사로 생계를 유지 하게 되자 여성들의 활동무대는 훨씬 넓어졌고 남편들은 여성들을 대신해서 집을 지키거나 살림을 맡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일부 남성들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술을 마시고 일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기 때문에 가정불화가 심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여성들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먼거리 장사를 가거나 장사를 위해 중국으로 도강을 하기도 하고 도강증을 내고 중국 방문을 하기도 해 가정파괴가 심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가부장적인 북한사회에서 남편들의 지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남편은 불편”이라고 부르고 남편들의 지위를 ”낮전등”, “자물쇠”, 등으로 비하해 부르고 이혼율이 급증하게 되었으며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나 “1등머저리 남에게 돈을 꾸어주는 사람, 2등 머저리 남에게 꾸었던 돈을 갚아주는 사람, 3등 머저리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결혼하는 여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어쩌면 남녀평등권을 내세우고 여성을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담당하는 혁명의 동력으로 치켜세우면서도 체제선전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대우만 해주던 배급제 시절보다 배급제가 붕괴되고 가정의 생계부담이 여성에게로 전가되면서 오히려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 높아지게 되었고 여성들은 남성 앞에서 더욱 당당해지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북한은 이혼에 대해 법적으로 강하게 통제를 했고 특히 배급제도를 실시하면서 식량배급과 거주지이전의 자유제한 때문에 이혼이나 별거가 상당히 어려웠지만 배급제도가 붕괴되고 장사활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요즘은 판사에게 뇌물만 제공하면 아주 쉽게 이혼을 할 수 있고 또한 이혼수속을 하지 않더라도 집도 구입할 수 있고 자유롭게 활동하는데 제한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별거해 사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늘어나 이혼률이 급증하는 추세라고 한다.

RFA에 따르면 이혼을 허가하는 판사에게 100달러만 주면 아주 쉽게 이혼 판결을 받을 수 있어 최근 이혼하는 부부들이 급증하고 있고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이혼하는 경우는 30~40달러의 뇌물만 제공해도 이혼이 가능할 정도인데 재판소 판사는 뇌물 액수가 많은 쪽 편을 들어 이혼 가부를 판결하는 게 보통”이라고 전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자유아시아 방송은 북한의 평안북도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이혼 풍속도를 전하기도 했는데, “딸 시집보내고 나서 장마당에 가서 두부 한 모 사서 (집에)왔더니 그 사이 시집간 딸이 보따리 싸가지고 왔다는 말이 나 돌만큼 날이 갈수록 이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하면서 “배급제시절보다 장사가 성행하면서 남편에 대한 여성들의 자기주장이 강해진 것도 이혼이 늘어난 요인”이라는 것이다.

2) 여성의 탈북증가와 여성 탈북민 80%
북한에서 배급제가 붕괴되고 지하시장경제가 활성화 되면서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고, 여성들의 개인적인 경제활동으로 인해 배급제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이동을 요구했다. 그리고 너무도 좁은 북한시장에서, 늘 네 것 사고, 내 것 팔고 식의 장사방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장사활동의 어려움으로 작용했고 장사를 처음 시작 할 때보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시장은 점점 잠식되어 북한 내에서는 벌이가 쉽지 않기 때문에 돈을 많이 만지는 여성들일수록 중국과의 관계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여성들이 중국으로 탈북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결과 현재 대한민국에는 약 3만명의 탈북자 중 80%정도가 여성일 정도로 많은 북한여성들이 탈북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년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기껏 해서 4~5명 정도였고 그중 여성은 전무하다 시피 했으나 북한의 배급제가 붕괴되고 여성들의 장사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탈북자의 수급 급격히 증가하였고 2000년 경 부터는 1년에 1명이상이 입국하게 되었으며 그중에서 70%이상이 여성으로 증가하였고 현재는 입국하는 탈북민의 80%이상이 여성이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부모형제와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탈북한 북한여성들은 중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해서 정착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각종 방법으로 돈을 모아 가족을 구출해오고 북한가족들에게 송금을 해주고 있다. 그러한 결과 예전에는 기피대상이던 탈북자 가족들이 요즘은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상황이 되었고 오히려 탈북자들이 있는 집과 혼사를 맺고 싶어 하거나 또는 관계를 좋게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날 정도라고 한다.

북한에서 배급제가 붕괴된 후 북한여성들은 가중된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부담으로 인해 거의 반 강제적으로 장사활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결국은 식량구입과 돈벌이를 위해 중국으로 월경해 중국에서 돈벌이를 하거나 인신매매를 당하게 되었고, 일부 여성들은 강제북송이나 공개처형을 당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북한에서 배급제의 붕괴와 식량구입을 위한 장사활동의 시작은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였고 가장 큰 변화는 여성의 지위와 역할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탈북여성이 증가하면서 최근에는 탈북여성들이 출연하는 미디어 프로그램도 많이 늘어나고 남성들 위주의 탈북시기 보다 생활 친화적인 프로그램들이 많이 개발되어 남한의 국민들에게 북한이 예전보다는 훨씬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으며 특히 남한 남성들의 북한여성에 대한 선호도가 상승하기도 했다.

   
▲ 북한에서는 김정은에 대한 충성 맹세 등 김정은 띄우기가 한창이다. 김정은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한 모습. /사진=KBS 캡처
3. 남북한 여성계의 특징과 민간여성교류

1) 남북한 여성계의 특징

사실 북한은 여성계가 없다. 북한 최대의 여성조직인 조선민주여성동맹은 조선노동당의 외곽단체이자 당과 대중을 연결시키는 인전대이며 여성들 스스로의 의지와 요구에 의해서가 아닌 당국의 요구와 통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움직여지는 노동당의 하층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외에는 어떠한 여성조직도 없고 오직 조선노동당의 이념을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으로 활동하는 완전 정부조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여성들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여맹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동맹을 거친 후 결혼을 하거나 나이가 30세 이상을 넘어서게 되면 직장여성의 경우에 조선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한 여성들은 조선직업총동맹 조직으로 자동 가입이 되고, 무직업 전업주부인 경우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자동 가입되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 사는 주민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며 만일 이러한 조직생활을 거부하게 되면 정치적 처벌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목적, 활동방식에 따라 단체를 스스로 조직하고 운영해나간다. 특히 대한민국에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요구하는 수많은 단체가 있고 통일운동을 하는 여성단체들도 많다.

그동안 남한의 여성계는 북한의 여성계와 손잡고 통일운동을 한다고 해왔는데 사실은 전혀 힘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북한은 여성의 정치참여와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는 전혀 없고 조선 민주 여성동맹은 그야말로 조선노동당의 외곽단체로써 북한정권의 이익을 옹호해서 조직된 단체이기 때문에 북한정부를 대표할 순 있어도 북한주민이나 북한여성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간혹 북한에서 각종 명칭의 비상설 여성기구나 단체가 있다면 북한이 외교를 위해 만들어낸 것이며, 특히 한국과의 대화와 교류를 위한 경우가 많으며 북한은 철저히 국가주도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 특히 대남기구들인 경우에는 철두철미하게 북한정권의 대변자들을 내세우고 있고 이러한 기구들에 북한정권은 엄청나게 공을 들인다.

그래서 북한에서 남한의 민간단체, 여성단체와 만나는 사람들의 경우 남한에서 월북한 여운형의 딸 여연구, 여원구와 최덕신의 부인 유미영, 윤이상의 아내 이수자 등 특히 정치적인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여성인물들을 남한의 여성민간단체 파트너로 내세우고 있다.

2) 남북한 여성 민간교류
북한의 정권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해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남과 북이 대척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고 북한정권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왕조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허물고 사회주의 배급체제, 세습왕조정권을 세우려는 북한의 일관된 목표를 그대로 답습하는 조선민주여성동맹과 같은 북한의 꼭두각시조직을 만나면서 민간교류를 운운하는 것은 사실상 국민들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필자가 한국에 입국한 초기에 남한 여성단체들의 초대를 받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여성민우회, YWCA, 여성재단, 한국 여성정치 연구소, 한민족통일여성회 등 여러 단체들의 행사에도 참여하고 프로그램도 함께 한 적이 있다.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에서는 한때 진달래회와 무궁화회라고 하는 남한 여성들과 탈북여성들의 모임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지난 5.24일 위민크로스디엠지라고 하는 세계의 여러나라 여성들과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협력하여 진행한 평화행사가 있었고, 이들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외국여성 2명과 애비게일 디즈니, 스타이넘을 비롯한 좌파여성들이 대거 망라하여 디엠지 종단행사를 펼치고 북한의 평화공세전략을 실천해주었다.

그들은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과 그 일가를 찬양하는 발언들을 하고 한국에 와서는 북한의 의사를 대변하는 평화를 내세운 다양한 행사들을 통해 평양이 원하는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관광재개, 개성공단 활성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퍼포먼스와 포럼 등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행사가 끝난 후에도 제주강정마을을 방문해 제주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는 시위와 5.24조치 해제를 위한 통일굿 행사에도 참여하여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고 북한정권과의 대대적인 퍼주기 대북정책을 촉구하기도 했었다.

안타까운 것은 남한의 여성계가 주장하는 남북한 여성의 대화와 교류는 철저하게 대남적화를 위한 전략적 계산을 가지고 접근하는 북한의 대남정치에 이용당하고 있고 민간이 존재할 수 없는 북한과 남한의 민간단체들이 만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대남전략에 알게 모르게 이용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위해 활동하다가 북한의 간첩으로 전략하는 경우도 많고 특히 통일운동한다고 하는 인사들 중에는 북한정권에 충성하고 아부하는 종북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종북인사들의 특징은 남성이나 여성이나에 관계없이 실제로 북한의 고위간부나 일반주민에 비해 북한정권에 대해 보다 편협하고 절대적인 충성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기이현상은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기도 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남한의 여성계는 대부분이 좌경화 되어있고 북한정권에 대해 친화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자유주의 여성 세력은 그 세력이 너무 미약해 이러다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의 여성계가 그동안 주로 남녀평등, 여성의 지위향상, 여성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등을 위해 활동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시장체제에 반하는 방향으로 여성계의 활동과 목표가 진행되었다면 북한은 아예 민간이나 여성계의 존재자체가 생겨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민간주도로 통일운동과 대북정책을 진행하자고 하고 여성계에서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남한에서 통일운동은 무수하게 많지만 실질적인 통일에 접근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고 오히려 북한정권을 강화시켜주고 붕괴의 위험에서 구제시켜주는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4. 맺는말
북한은 남녀평등권 법령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평등을 주장하며 특히 “여성은 혁명의한쪽수레바퀴를 밀고나가는 혁명의 동력”으로 규정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여성들에 대한 국가의 조직적 통제를 완성하였다. 김일성은 여성의 사회참여를 권장했지만 실질적인 내막은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주의 건설에 십분이용하기 위한 전략이었고, 여성의 사회진출은 철저하게 국가주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여성의 사회진출이 증가하면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러 가지 법적인 대책을 취하기는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북한여성들에게는 엄청난 일과 가정이라는 2중고가 심했다.

그리고 남녀평등을 내세우지만 북한에서는 대학교 입시와 노동당 입당 등 간부등용과 인재양성의 중요한 부분에서는 남성에 비해 티오가 매우 작기 때문에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나 정치참여 등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며 여성간부 등용은 철저하게 출신성분과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북한에서는 남존여비가 남한에 비해 훨씬 심했고, 가부장적인 가족제도하에서 여성들의 부담과 고통은 훨씬 심했다,

북한에서 배급제가 중단되고 장사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여성의 실제적인 지위가 향상되고 가부장적인 측면이 상당히 약화되었으면 여성들의 경제력 향상으로 인해 남존여비에서 여존남비 현상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남한의 여성계 남녀평등, 여성의 정치참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표로 활동하면서 북한의 여성정책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북한여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어떤 단체도 가진 적도 없고, 가질 수도 없지만 한국의 여성계는 북한정권의 꼭두각시들인 조선민주여성동맹이나 여타의 정부기구조직들과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남북한 간의 분단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진정한 여성계가 나타나지 않는 한 현재 남한의 민간단체가 주장하는 그 어떤 민간차원에서의 대북활동은 북한정권의 이용물이 되어 북한정권을 연장시켜주고 강화해주어 북한주민들의 삶에는 고통을 가중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여성계는 종북 좌파성향의 여성단체와 여성운동가들이 주도하고 있고 이들에 의해 통일운동이 주도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북한의 대남전략에 말려들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자유주의 여성포럼이 활성화되어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들어낸 진정한 가치이자 추동력인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고 통일문제의 해결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사료된다.

북한이 추진해온 남녀평등이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다양한 보호정책은 여성의 지위향상과 권익증진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실제로 북한에서 남존여비를 여존남비로 바꾸어내고, 가부장적인 가족체계를 흔들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무엇이 원인이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 많이 진행되기를 바란다. 남북한 여성운동의 결과를 따져보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여성의 권익을 증진시키며 오늘과 같은 여성상위시대를 만들어 낸 것은 여성들의 남녀평등을 위한 투쟁이 아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사료된다.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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