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76)-카타르시스를 주는 비극의 조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의 <시학>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 Peri poiētikēs)>에서 극작가와 배우들이야말로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 사람들로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연극은 모방하는 수단과 대상, 양식에 따라 비극이 되거나 희극이 되기도 한다. 결국 연극이란 한낱 인생의 축도(縮圖)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연극을 통해 오히려 연극과 같은 인생의 허무를 극복해 낼 원초적 힘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문예의 힘이 여기에 있다.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과 문학의 이런 심미적 가치를 깊이 있게 조명한 고전을 남겼다. <시학>은 인류 최초의 체계적인 문예비평서다. 그는 인간의 삶을 모방하는 연극과 시의 작법(作法)을 정립하고자 했다.
특히 당시에 인기리에 진행되던 디오니소스 제전의 비극 경연과 관련하여 작시술(作詩術)의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학>은 ‘시학(詩學)’이라기보다 ‘드라마학’이라고 할 만큼 비극의 작법에 중점을 두어 기술되었다. 이는 당시 그리스 문학에서 비극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듯하다.
“서사시는 장중한 운율로 고상한 대상을 모방한다는 점에서는 비극과 일치하지만, 한 가지 운율만을 사용하며 서술체라는 점에서는 비극과 상이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를 비극에 비해 열등한 예술로 본다. “서사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는 비극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극의 본질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감정의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느끼게 해준다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작법으로 플롯(plot)을 중시한다. “플롯은 스토리 내에서 행해진 것, 즉 사건의 결합을 의미한다.” 현대극이 등장인물의 성격과 심리묘사에 중점을 두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인간 삶 자체의 모방보다, 인간의 행동과 생활 속에서의 행복과 불행을 모방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므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사건과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관계가 잘 설정될 때 더 설득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 고대 그리스 비극이 상연되던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이다. 디오니소스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정상의 남쪽 방벽 쪽에서 바라볼 때 전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현재의 형태는 로마시대에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박경귀 |
‘발견’의 기능 역시 중요하다. 거지꼴로 돌아온 오뒷세우스를 유모가 발을 씻어주는 과정에서, 어릴 적 흉터를 보고 그가 바로 페넬로페가 오매불망하던 오뒷세우스임을 발견하게 되는 ‘세족(洗足) 이야기’는 탁월한 발견의 기법을 사용한 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발견의 과정 역시 극적이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특히 기억과 추리에 의한 발견은 경악을 만들어 내지만, 시인이 작위적으로 조작한 발견은 비예술적이 되고 만다.
훌륭한 플롯, 훌륭한 비극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기본적으로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야 한다. 플롯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플롯을 구성하고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 생동감이 있도록 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작자가 사건을 직접 목격하면서 생생하게 관찰한 것처럼 실제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라고 주문한다.
또 “되도록 작중 인물의 제스처로 스토리를 실연(實演)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대사를 만들어내는 극작가와 표현해 내야 할 배우 사이의 감정과 실연 과정의 간극을 최소화함으로써 설득력 있는 감정 표현을 만들어 낼 것을 요구하는 셈이다.
스토리에 덧붙여지는 창작적 삽화 또한 플롯에 적합해야함은 물론이다. 스토리 중심으로 진행될 때 관객들이 사건의 단조로움에 싫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주인공의 운명에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갈등이 고조되는 ‘분규’의 플롯과, 운명의 전환이 시작된 뒤부터 마지막까지의 ‘해결’ 과정, 이 양자의 구성에 능숙해야 훌륭한 비극이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현대의 극작가에게도 변함없이 중요한 교범(敎範)이다. 그는 수많은 고대 그리스 서사시, 비극들의 작품과 실연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작시의 중요한 요소를 귀납적으로 발굴해냈다. 물론 그가 플롯을 중시하고,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심리 묘사를 경시했던 점은 현대극과 일정한 거리가 있지만, 이는 “확성기가 부착된 커다란 가면을 쓰고 노천극장에서 수천 명을 관객을 상대”하던 당시 아테네의 공연 환경을 감안하면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전해진 <시학>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이 망실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극작자는 물론 많은 문예 비평가들에게도 여전히 다양한 문학적 영감을 주고 있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11, 2판 11쇄. 40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