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주간 미디어워치를 처음 창간했을 때, 창간기념으로 한 좌익언론시민단체 인사와의 인터뷰 기사를 기획해 취재한 일이 있다. 당시는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문제가 미디어계 가장 큰 화두였다. 이와 관련 MBC의 노영방송(勞營放送)화 문제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 입장은, 그래서 MBC가 노영방송이면 좀 어떠냐는 겁니다.”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그간 속내야 어땠을는지 몰라도, 대놓고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상황까지 왔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찔했다. 아마도 이런 말과 태도에 제대로 된 제지를 받아본 적이 없기에 저럴 수 있으리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물론 당시에도 KBS와 MBC 방문진 등 공영방송 이사회엔 여권 추천 이사들이 존재했고, 시청자위원회도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 우익시민사회 및 언론 등과 탄탄한 유대를 갖고 있는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그들만의 리그’였던 것이다. 그러니 시민사회 및 언론 등의 주장과 요구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여권 추천 이사진에 대한 음해, ‘바로 그런 것’을 막기 위해 공영방송이 존재한다
▲ 지난 6월 서울 여의도 KBS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열린 '정치중립적 이사·사장 선임 투쟁' 기자회견에서 안경순 부위원장이 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지난 13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KBS 이사 추천 및 MBC 방문진 임원 선임안을 의결했다. KBS 여권 측 이사로는 이인호 이사장을 비롯, 강규형 명지대 교수, 김경민 한양대 교수, 변석찬 KBS비즈니스 고문, 이원일 법무법인 바른 대표변호사, 조우석 문화평론가, 차기환 방문진 이사(변호사)가 추천됐다. MBC 방문진의 경우 고영주 감사를 비롯해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김원배 전 목원대 총장, 유의선 이화여대 교수, 이인철 인권위원회 인권위원이 여권 몫으로 선임됐다.
좌익 성향 언론 및 시민단체에선 즉시 반발했다. 척 보기만 해도 그간 우익시민사회 및 언론과 면밀하게 손발을 맞춰온 인사들, 적어도 그 사고와 방향성에 있어선 의심할 바 없이 선명한 노선을 걸어온 인사들이 다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명확한 노선 없이 갈지자로 흔들리는 이사진만 봐오던 좌익진영 입장에선 위기감을 느낄 만했다. 기회주의적 여권 측 이사들을 상대로 해오던 손쉬운 야합에 제동이 걸렸다.
지금 이 시점에도, 그리고 아마 신임 이사진이 임기를 마치는 그날까지, 신임 여권 추천 이사진에 대한 좌익진영의 색깔론과 음모론, 이중잣대, 인신공격 등은 끊이질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들의 억지 비난은 애초 귀담아들을 것이 못 될 수 있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명확한 극렬 좌익 성향 언론과 시민단체 출신, 심지어 전 노조위원장까지 이사로 추천해 선임시킨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외적으론 다양성을 중시한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자신들 노선 및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각종 음해로 무조건 무력화시키려는 태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전체주의 악몽의 재현이다. 사실상 ‘국민의 방송’이라는 공영방송은 ‘바로 이런 태도’가 일반국민들에까지 전이되는 것을 막고 순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정교하고 면밀하게 구성된 ‘공영방송론’ 확립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현 시점 KBS와 MBC 방문진 신임이사진에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연 공영방송이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기구냐는 점 말이다. 수년 전부터 일부 국민들 사이에선 이른바 ‘공영방송 무용론’이 심상찮게 일고 있는 상황이다. 수년 째 제자리걸음인 KBS 수신료 인상안 문제도 이 같은 인식에 또아리를 튼 사안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일반국민 입장에서 공영방송과 민영 상업방송 간 차이를 인식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일반 케이블채널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예능·드라마 프로그램은, 어차피 광고수익 등이 일정부분 전제돼야 하는 왜곡된 현 공영방송 재원구조상 그렇다 치자. 문제는 공영성 차원에서 핵심 사안이라 볼 수 있는 뉴스조차 공영방송으로서 특징적인 면모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각종 편파와 왜곡보도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앵커 개인의 치우친 사견을 ‘명품 클로징 멘트’라며 되레 홍보요소로 내세우던 상황까지 존재했다. 선정적 감정고조 기법과 허튼 감성적 접근 등도 민영 상업방송과 무엇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이게 온 국민으로부터 수신료를 받고 국민혈세로 운영되는, 다분히 가치중립적이고 헌법적이며 팩트 중심이어야 할 공영방송 뉴스인가, 아니면 특정 정치색을 바탕으로 타깃층 장사하는 민영방송의 그것인가. 차이를 구분해 설명할 수 있는 국민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리고 말마따나, 공영방송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그래서 MBC가 노영방송이면 좀 어떠냐는 겁니다.”란 얘기까지 서슴지 않고 뱉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공영방송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자신들조차 개념이 없으니, 노영방송이건 뭐건 무슨 차이 있느냐는 소리가 그토록 쉽게 튀어나온다.
먼저 정교하고 면밀하게 구성된 ‘공영방송론’의 확립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공영방송론에 준하는 방향성을 철저히 설득시켜 나가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한 마디로, 왜 KBS와 MBC가 노영방송이어선 안 되는지에 대해 탄탄하게 세워진 논리와 명분이 필요하고, 이를 방송프로그램으로 실천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좌우가 아니라 ‘공영방송’과 ‘공영방송이 아닌 것’ 간의 투쟁
이 같은 ‘공영방송론’ 확립의 문제는 더 이상 좌와 우, 양 이데올로기 진영 간 대립과 투쟁이 아니다. 명백히 ‘공영방송’과 ‘공영방송이 아닌 것’ 간의 투쟁이 된다. 후자가 자신들 이해집단의 득실과 관련된 투쟁이라면, 전자는 국민 전체의 공통된 득실과 관련된 투쟁이다.
그리고 이 같은 투쟁은 “그래서 MBC가 노영방송이면 좀 어떠냐는 겁니다.”란 소리까지 감내해야 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야 겨우 제대로 시작될 수 있는 시점에 서있다. 모쪼록 KBS와 MBC 방문진 신임 이사진의 무운을 비는 바다.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