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홈 경제 정치 연예 스포츠

[좌승희 새마을 운동의 경제학②] 성공신화 이끈 관치차별화

2015-09-10 15:4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좌승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 겸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폭넓은 학술활동을 통해 기업정책 및 경제발전 연구에 매진한 ‘기업경제’ 전문가다. 좌승희 석좌교수는 양극화와 저성장의 근본적인 원인과 해답, 한국경제는 물론 세계경제의 동반성장 기조를 회복시킬 방안에 대해 기존 주류경제학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좌승희 석좌교수는 오늘날 세계인류가 부딪치고 있는 고난도의 경제문제와 더불어 한국경제 동반성장의 해법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던 박정희 시대의 기업부국패러다임 속에 있음을 밝힌다.

특히 좌승희 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정책패러다임을 ‘정치의 경제화를 통한 경제적 차별화’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새마을운동을 대표사례로 든다. 관치를 통해 자조하는 마을만 지원했던 차별화정책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설명이다. 좌 교수는 이를 통해 시장과 정부의 경제발전기능을 밝힌다. 미디어펜은 좌승희 석좌교수의 ‘새마을운동의 성공원리와 그 의의’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아래 글은 두 번째 연재다. 원문의 출처는 지난 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렸던 한국선진화포럼 창립 10주년기념 세미나, “故 지암 선생의 비전과 유산, 대한민국 성공신화의 세대 간 공유”이다. [편집자주]

 

   
▲ 좌승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 겸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미디어펜 회장

새마을운동의 성공원리와 그 의의

3. 새마을운동의 추진배경과 성과 1)

(1) 추진배경

1969년 8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남북일원의 수해지구를 시찰하던 중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 1리를 방문하였는데 여기서, 이 마을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동심을 발휘하여 수해 복구를 겸한 마을안길 확장, 지붕개량 등 마을인프라 개선사업을 성공리에 수행한 현장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근면, 자조, 협동정신에 기초한 농촌개발운동을 구상하였다. 그 후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위한 전국 지방장관회의 석상에서 박대통령은 농민들의 자조노력을 강하게 호소하고 청도읍 신도 1리 마을의 사례를 들어 새마을 운동구상을 피력하였다. 이런 사유로 이날을 새마을 운동 개시일로 보고 오늘날 4월 22일을 새마을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새마을 운동의 추진배경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침체되고 자조정신이 결여되어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성장·발전유인이 없는 농촌의 의식을 진취적이고 발전 친화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대통령의 적극적인 의지 하에, 2) 전 정부에서부터 이어져온 4-H 운동이나 5.16후 추진한 국민재건운동 등의 농촌의식개혁운동의 미미한 성과를 개선해야하는 문제, 2) 7년여 가까이 추진된 산업화의 결과 커지는 도·농간의 소득격차를 완화 및 해결해야하는 문제, 3) 1960년대 말 불거진 제일차 오일쇼크로 동남아 시멘트수출시장이 정체되어 발생한 국내시멘트업계의 과잉생산문제의 해결 등, 다 목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2) 추진과정과 성과 약사

① 제1차년도(1970.11~1971. 5월): 농한기 기간을 이용하여 실시하였으며 인프라개선사업에 중심을 두었다. 35,000 마을을 대상으로 평균적으로 시멘트 335부대를 마을 규모에 따라 균등배분하고, 농촌 인프라개선사업 범위 내의 10-20개정도의 새마을사업 프로젝트 (마을 진입로 가꾸기, 지붕 담장 개량, 공동우물, 공동빨래터 설치, 교량가설, 소하천 정비, 퇴비장설치, 농로개설, 간이급수시설, 주택개량, 증산운동 등)를 제시하고 사업선정 및 시행은 마을총회의 결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추진하게 하였다.

   
▲ 인류는 19세기 산업혁명과정에서 오늘날의 유한책임주식회사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기술(social technology)인 기업조직을 발명하였다. 이 조직이 지난 200여년의 세계경제의 산업화와 발전을 이끌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를 위시한 현대, LG, SK 등의 대기업집단이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중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를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신상필벌의 차별화정책이다./사진=미디어펜

② 1971년 제2차년도: 성과 좋은 마을(16,000)에만 평균 500포대의 시멘트와 철근 1톤씩 공급하고 나머지 마을(1,8000)은 지원대상에서 배제하였다. 특별히 성과가 우수한 마을에는 백만 원 정도씩의 현금지원도 따랐다.

③ 그 이후 전 마을을 자립마을, 자조마을, 기초마을로 그 성과에 다라 분류하고 정부의 지원은 항상 자립과 자조마을 중심으로 하고 기초마을은 지원에서 배제시켰다.

④ 1973년부터 새마을공장육성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정부는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새마을공장육성정책을 추진하였는데, 농촌의 읍, 면지역에 농산물가공공장을 건설하여 수출산업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세금 감면조치, 수출 지원조치, 운영비보조등을 통해 육성 지원하였다. 추진 과정을 보면 최초 73-74년간 운영실적을 기초로 성과가 있으면 지원하고 없으면 지원을 감축한다는 지침 하에 추진하였는데 당시 상공부의 결과평가에 따르면 270여개의 농촌공장 중 30%정도가 좋은 성과를 내고 나머지 70%는 성과가 미흡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성과를 낸 30%의 새마을공장에게만 지원을 확대하고 다른 공장에 대해서는 지원을 삭감하였다.

⑤ 성과 : 1977년 자립마을은 98%에 이르고, 기초마을은 사라졌다. 모든 마을이 참여하여 자조마을 이상으로 향상되었고, 도농 간 소득격차도 1974년부터 농촌우위로 역전되었다.(<그림>참조.)

   
▲ <그림> 농촌과 도시근로자 호당평균소득 비교

1975년 11월 9일 Newsweek 보도에 따르면,“새마을운동으로 약 1만 6,000여 마을에서 급수시설이 개선되고 100만 호 이상의 초가지붕이 현대식 슬레이트로 개조되었다. 또한 새마을운동에 의한 농가부업으로 농촌의 가구당 수입이 1970년의 744달러에서 1974년에 1970달러로 증가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지 불과 4~5년 만에 한국국민의 의식구조, 사고방식, 생활환경과 생활태도 등이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4. 새마을운동의 성공요인: 자조하는 마을만 지원한 관치 차별화정책

새마을 운동의 성공을 한 가지 요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경제발전의 기본원리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많은 요인 중에서도 성공의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조하는 마을만 지원한 정부주도의 관치 차별화정책” 이었다 할 수 있다. 당시 관치 차별화가 진행된 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운동을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의 기본 철학을 들어보자. “빈곤을 자기의 운명이라 한탄하면서 정부가 뒤를 밀어주지 않아 빈곤 속에 있다고 자기의 빈곤이 타인의 책임인 것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농민은 몇 백 년이 걸려도 일어 설 수 없다. 의욕 없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은 돈 낭비이다. 게으른 사람은 나라도 도울 수 없다.” 이것이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새마을 운동 기간 중 계속해서 대통령을 통해 전달된 대 농민 메시지였다.

새마을 운동의 첫해인 1970년에 정부는 전국의 34,000여개의 마을에 200내지 300포대씩의 시멘트와 약간씩의 현금을 마을 규모에 따라 적절히 지원했다. 그 다음해에 그 성과를 평가한 결과 16,000개의 마을은 100%의 성과를 달성했지만, 나머지 과반수가 넘는 18,000개의 마을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당시 정부의 공개 및 비공개 암행 감사에 의하면 많은 마을들이 시멘트 포대를 야적해 놓고 비가 내려도 덮지 않은 채로 방기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를 놓고 제2차년도 새마을운동사업 지원방식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박 대통령은 공화당과 장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당시 인기 없었던 장기독재정권의 명운을 걸면서 까지 과반수가 넘는 성과가 좋지 않은 18,000개의 마을에는 전혀 지원하지 않았고 과반수가 안 되는 성과가 좋았던 16,000개의 마을에만 시멘트의 양을 100-200포대 정도씩 늘림과 동시에 현금지원도 더 늘려 지원했다.

김정렴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 전해주는 이러한 차별적 지원을 결정하는 과정의 비화가 대단히 흥미롭다. 최초 국무회의 결정은 제2차 년도에도 무차별 지원하는 것이었으나 대통령이 차별지원을 고집하여 공화당의 사무총장인 길전식 의원과 내무부장관이었던 김현옥 장관이 대통령설득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그 후 소위 공화당의 실력자 5인방이 설득하였으나 박대통령은 정권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차별 지원을 하겠다고 해서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 개발연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정주영 현대창업주, 이병철 삼성창업주, 박정희 대통령(왼쪽부터). 한국은 개발연대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과 아주 양호한 동반성장을 달성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동반성장을 실현하였다(World Bank, 1993).

그리고 2차 년도를 시작하면서 정부에서는 앞으로 어떤 마을이든 자력으로 새마을운동에 참여해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지원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시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자 지원을 받지 못한 18,000개 마을 중에서 6,000개의 마을이 자력으로 참여해서 100% 이상의 성과를 내었다. 그 다음에는 6,000개의 마을에 대해서도 지원했다. 이렇게 해서 박대통령은 전국 마을을 참여도가 가장 낮은 기초마을, 이보다 좀 더 열심인 자조마을 그리고 가장 성과가 높은 자립마을로 구분하고 물자지원을 기초마을은 제외하고 자조마을과 자립마을에만 배분하게 하였다.

아마 오늘날의 한국 정치권의 상식으로는 새마을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잘 못하는 기초마을을 우선 지원‧육성하는 것이 옳은 정책이라고 강변할 것이다. 물론 성공여부와는 관계없이 표를 위해서도 당연히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적 차별화 원리에 기초한 새마을 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육성지시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작년에 전국 32,000여개 부락에 대하여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농어민의 분발심(奮發心)을 일깨우기 위하여 지원을 해 본 결과 좋은 성과를 거둔 부락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부락도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살려 앞으로는 일률적인 지원 방식을 지양하고 우선 금년은 그 대상을 절반으로 줄여 16,000여 부락에 대하여서만 지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금년에는 작년에 성적이 나쁜 부락은 전부 낙제, 유급을 시키고 성적이 좋은 부락만 올려 이번 2차년도에 계속 지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금년 16,000여 부락 중에서 잘하는 부락을 다시 가을쯤에 심사해서 우수한 부락에 대해서는 내년에 3학년생으로 진급을 시켜야겠습니다."

"그리고 낙제한 부락 중에서 작년에는 성적이 나빴지만 그 동안에 분발을 해서 단결이 잘 되고 한번 해보자는 의욕이 왕성한 부락은 다시 선정을 해서 내년에는 2학년생으로 진급을 시켜 금년에 지원한 정도로 지원해 준다. 거기서 또 설적이 나쁘면 낙제를 시키고 좋은 부락은 3학년생으로 진급을 시킨다, 작년에 진급한 3학년생을 다시 심사하여 4학년생으로 진급시켜 대폭적으로 지원을 한다하는 것이 새마을 운동에 대한 정부지원의 기본방침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농어촌을 일률적으로 지원해 본 결과 기대한 만큼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부지런하고 잘하는 부락은 우선적으로 도와주자, 이웃하여 있는 부락이라도 한 부락은 상당한 수준으로 소득이 증대되고 부락환경이 개선되어 살기 좋은 마을이 되는가 하면, 다른 부락은 아주 뒤떨어진 마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은 하지 않고 노름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고 게으른 그러한 퇴폐적(頹廢的)인 농어촌을, 부지런히 일해서 잘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런 농어촌과 꼭 같이 지원해 준다는 것은 오히려 공평한 처사라 할 수 없습니다. 계속 성장한 부락은 조금만 더 지원해 주면 그 다음에는 정부에서 손을 떼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 뒤떨어진 부락들은 불평을 할 것입니다. 잘한 부락 사람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게을러서 뒤떨어진 부락의 불평소리는 크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평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1973년부터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실시한 새마을공장육성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성과 있는 공장 중심으로 지원을 하였다. 첫해 실적에 따라 성과 있는 30%만 지원하고 나머지 70%는 지원에서 배제하였다. 2)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스스로 돕는 마을만 지원 한다”는 정부의 차별적 지원 정책이 새마을 운동을 열화와 같이 전국적으로 퍼뜨리고 농촌사회에도 소위 “하면 된다”는 발전의 정신을 일으키는데 기여했다고 본다. 만일 두 번째 해에도 평등하게 똑같이 나누어 분배하는 식으로 지원했다면 우리의 발전원리에 따르면 새마을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새마을 운동의 성과는 새마을 운동 시작 후 5년만인 1974년도에 농촌과 도시의 가구당 소득 수준이 같아졌다는 사실로부터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좌승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 겸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미디어펜 회장

1) 이 절의 많은 내용은 김정렴(2006), 제 6부에서 인용하였다.

2) 당시 상공부 새마을공장 지원과 과장(전 경총 부회장, 조남홍씨)의 증언에 의하면, 청와대에는 새마을비서관, 고건, 그리고 김종호, 이진설씨 등이 근무했으며, 청와대가 성과에 따른 차등지원정책을 주도하였음. 이에 대해 조남홍씨는 성과 나뿐 70%도 조금만 지원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항변하였으나 결국 조 과장은 다른 자리로 좌천되고 차등지원정책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함.

 

종합 인기기사
© 미디어펜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