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미래전략실장, 연구위원 |
우리나라 경제학계에 있어 박정희는 기피의 대상이다. 강조하자면,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기피의 대상’인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취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이다.
하지만 기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성취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은 찾아보기 힘들다. 활발한 분석이 시도되었다면 관점에 따라 ‘논란의 대상’이라도 될 텐데, 현실은 제대로 된 분석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고 ‘기피’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학계를 이념에 따라 ‘좌우’로 나눈다면 양 쪽 모두 박정희 시대를 학문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선 좌파에는 박정희 시대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는(또는 한국경제의 성장을 ‘성공’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명시적 또는 암묵적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좌파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독재의 시대이며 경제적으로는 노동자,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부의 집중, 독점적 재벌의 성장 등 기형적인 경제구조가 형성된 시기이다.
한편 우파의 시각에서 보면 박정희 시대는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은 이루었지만 정부가 강력한 시장개입을 통해 장기간 경제를 운용하다보니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착근(着根)이 지연되어 비효율적 자원배분이 축적되는 부작용을 초래한 시대로 평가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파 경제학계(또는 주류 신고전학파)의 입장에서는 박정희 시대는 한 나라의 경제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모델은 아닌 것이다.
▲ 박정희 시대 주역들, 그리고 그 시대와 관련되었던 유명인사들의 회고담. 에피소드들은 많이 접해보았을 것이지만 그 시대에 대한 학문적 시각에서의 저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기여하는 바는 상당하다. |
수치로 나타난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성공적인 경제발전모델’로 수용할 수는 없는(또는 수용하기가 부담스러운) 양 진영의 기본적 시각은 박정희 시대의 성공요인을 진지한 학문적 주제로 삼는 것을 기피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박정희 시대의 성공은 ‘신화화(神話化)’ 되는 경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 시대의 성공은 박정희 개인의 탁월한 능력에 기인한다는 ‘박정희의 신화화’ 또는 우리 국민의 탁월한 근면성과 의지가 성공의 핵심요인이라는 ‘한국인의 신화화’가 그것이다(물론 이런 요인들도 없지 않았다). ‘신화’로 남는 성공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 없다. 경제적 성공에 대해 경제학적 분석이 필요 없다면 경제학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박정희, 살아있는 경제학』(좌승희 著)은 ‘기피의 대상’으로 방치된 한국경제의 핵심적 시기를 경제학적 분석의 화두로 삼은 저작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능적 본질에 입각하여 박정희 시대를 분석함으로써 박정희 경제정책 패러다임의 성공원리를 밝히고 있다. 저자의 논리적 출발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재해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농경사회와 현대적 자본주의 사회의 차이점은 ‘시장’의 유무가 아니라 현대적 ‘기업’의 유무라고 파악한다.
경제사적으로 볼 때 시장을 통한 교환 및 가격결정 등 시장메커니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경제발전이라 부를 수 있는 소득의 증가가 이루어진 시기는 근래 200여 년 동안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 시기가 이전의 수천 년과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점으로 주식회사 기업제도의 탄생을 들고 있다. 저자는 현대적 의미의 기업이야말로 생산요소를 효과적으로 결합·활용하여 새로운 부가가치 또는 부(富)를 창출하는 핵심장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요체는 ‘시장경제’라기보다는 ‘기업경제’라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박정희 경제정책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기능인 ‘기업경제’에 부합하도록 추진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 시대의 정책패러다임을 ‘기업부국 패러다임’으로 정의한다. 박정희 시대 동안 정부는 강력한 시장개입을 통해 정책목표 달성을 추구하였지만 경제활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기업이었으며 기업의 성장을 통해 국가의 부강을 추구하는 정책기조를 유지하였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이다.
한편 산업정책 차원의 평가로 들어가 보면, 저자가 파악하는 박정희 시대 산업정책의 성공요인은 ‘차별화’이다. 산업정책이 내재하고 있는 ‘정부실패’의 가능성을 ‘차별화’를 통해 극복하였으며 이것이 결국 정책적 성공을 가져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원을 배분함에 있어 성과를 보인 경제주체와 그렇지 못한 경제주체 간에 ‘차별’을 두어 배분함으로써 능력 있는 경제주체에 자원이 집중되도록 하는 차별화 원리는 박정희 시대의 산업정책을 관통하는 핵심원리라는 것이다.
즉 산업정책을 통한 정부의 시장개입은 시장의 차별화기능에 부합하는 ‘차별화 강화개입’이었으며 시장기능에 역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던 것이 그 시대 산업정책의 성공요인으로 저자는 평가한다. 많은 저개발국가에서 배우고자 하는 새마을운동도 단순히 ‘자립·자조 정신운동’이 아니라 ‘차별화’ 기제(機制)를 내재한 사회운동이며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성공요인임을 저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많은 국가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워가지만 성공사례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차별화’ 원리가 제대로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애초에 새마을운동을 전수하는 한국 정부 또는 각종 관·민 단체들도 그 원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 저자 좌승희는 "현대적 의미의 기업이야말로 생산요소를 효과적으로 결합·활용하여 새로운 부가가치 또는 부(富)를 창출하는 핵심장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요체는 ‘시장경제’라기보다는 ‘기업경제’라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이다./사진=미디어펜 |
이상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대략적인 스케치이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자하는 독자에게는 일독(一讀)을 권한다. 박정희 시대의 주역들, 그리고 그 시대와 관련되었던 유명인사들의 회고담. 에피소드들은 많이 접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 대한 학문적 시각에서의 저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기여하는 바는 상당하다.
또한 이 책의 중요한 미덕 중의 하나는 읽기 쉽다는 것이다. 깊이 있는 주제이지만 평이한 언어로 서술을 이끌어나가기 때문에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설사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논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미래전략실장, 연구위원
(이 글은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미래전략실장이 한국경제연구원 홈페이지, 'KERI 서평'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경제연구원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