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하면서 한편으론 영원한 평화를 갈구해왔다. 고대인들은 전쟁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0?~400?)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그리스 세계를 파멸로 이끈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은 기존 강국이었던 스파르타가 신흥강대국으로 강성해지는 아테네의 세력에 위협을 느껴 일으킨 전쟁이라고 분석했다. 아테네의 세력 신장이 스파르타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기존 패권국가와 신흥강국이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부딪힐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을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s trap)’이라 부른다. 2400년 전에 투키디데스가 진단하고 우려했던 상황은 오랜 역사를 두고 자주 시현되어 왔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얼마 전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미국의 오마바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과 미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세간의 우려의 시각을 불식시키기 위한 제스처였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누구도 당대의 강대국 간의 전쟁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2400년 전의 그리스가 그러했듯, 패권국과 신흥강국의 대결은 이들 국가와 유형무형의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참혹한 비극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평화를 갈구하는 대중들의 소망대로 이어져오지는 않았다. 숱한 세월 동안 반복된 전쟁의 역사는 인류에게 전쟁의 불가피성에 대한 귀납적 체념을 만들어주었다. 그나마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야 전쟁을 피할 수 있고, 피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또한 역시 인간 이성의 희구와 무관하게 쉼 없는 전쟁의 발발을 그대로 노정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리아 내전은 세계 강대국들의 이해의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확대일로에 놓여있지 않은가.
이렇게 참혹한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도 인간들의 어리석은 도발은 반복되고 있다. 이성의 시대인 현대에 이르러서도 전쟁의 필연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진정 평화로운 지구촌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일까.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영구 평화론』(1795)은 우리의 이런 고민에 대한 철학적 응답을 준다. 칸트는 전쟁의 비극과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평화체제의 구상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역시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 이후의 전쟁 등 전 세계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칸트는 휴전과 같은 일시적 평화가 아닌 영구적 평화를 희구했다. 그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영원한 평화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단지 규범적 이상을 제시하기보다 구체적인 제도적 조건과 모델을 탐색했다.
칸트는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해 범해서는 안 될 금기조항을 담은 예비조항과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확정짓는 조항, 그리고 영구 평화를 위한 보증 조항을 제시했다.
먼저,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그가 제시한 6개 예비 조항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1) 전쟁의 화근이 될 내용을 유보한 채로 맺은 평화 조약은 진정한 평화조약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2) 어떠한 독립 국가도 상속, 교환, 매매, 혹은 증여에 의해 다른 국가의 소유로 전락될 수 없다. (3) 상비군은 조만간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
(4) 국가 간의 대외적 분쟁과 관련하여 어떠한 국채도 발행되어서는 안 된다. (5) 어떠한 국가도 다른 국가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6) 어떠한 국가도 다른 나라와의 전쟁 동안에 장래의 평화 시기에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 틀림없는 적대행위, 예컨대 암살자나 독살자의 고용, 항복 조약의 파기, 적국에서의 반역의 선동 등을 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이 여섯 개 조항 중 1, 5, 6 항은 즉각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강조했다. 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위의 여섯 개의 조항들은 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상황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역사상 전쟁의 실제 사례의 원인을 유형화 한다면 대부분 여섯 개 항의 위반 사례에 근접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전제조건이다.
▲ 칸트의 초상 |
칸트는 전쟁을 야기할 조건이 형성되지 않도록 유의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탐색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이런 취지에서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확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세 개 항목을 도출했다. 영구 평화를 위한 확정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1의 확정 조건은 “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치 체제는 공화 정체이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화 정체’는 지배 형식(군주제, 귀족제, 민주제)이 아니라 통치의 형식이다. 즉 공화 정체는 실질적으로 입법부로부터 행정권이 분리된 체제로서 국가가 입법과 행정을 전제적으로 지배하는 전제 정체와 대척점에 있다.
공화 정체에서는 전쟁 선포가 국민적 동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쟁 억제에 유리한 반면, 전제 정체는 지배자의 독단적 전쟁 결정이 지극히 손쉽다는 점에서 영구 평화를 위해서는 공화 정체의 구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현대 국제정치학에서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 국가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를 "칸트적 평화(Kantian Peace)"라고 부르는 것도 이 같은 취지를 반영한 것이다.
영구 평화를 위한 제2의 확정 조건은 국가 사이를 규율할 법적 조건의 구비다. 즉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 체제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악함을 규제하기 위해 정부의 공법이 필요하듯, 국가 간의 전쟁 도발을 억제시키는 법적 구속력으로서의 국제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칸트는 국제법을 준수토록 요구할 수 있는 법률 제도를 갖추지 않으면 어떠한 평화도 정착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유로운 국가들의 상위에 특별한 종류의 연맹을 두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평화 연맹(foedus pacificum)’이다.
다만 칸트는 개별적 국가들이 자유로운 상태를 잃게 될 수 있는 단일의 세계 국가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개별의 국가들이 느슨하게 연합된 연맹의 구성을 권고했다. 지나친 강제력을 가진 단일의 국제 국가의 탄생은 개별 국가의 자유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한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국가적 연맹의 이념은 후일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태동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영구 평화를 위한 제3의 확정 조건은 “세계 시민법은 보편적 우호의 조건들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호의 조건이란 이방인이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이런 우호의 조건을 수용할 때 세계의 각 지역이 서로 평화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고, 이런 평화로운 관계가 공법으로 뒷받침되면 인류는 세계 시민적 체제에 점차 다가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세계 시민법이 “공적인 인간의 권리와 영원한 평화의 유지를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국경과 이념, 종족과 종교를 초월한 세계 시민법을 만들어낸다는 일은 지난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칸트의 제3의 확정 조건은 과거 서구의 문명국가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지의 정복 과정에서 보여준 전쟁과 폭력의 죄악상에 대한 자성에서 나온 것이다. “인류에게 공동으로 귀속되는 지구의 표면에 대한 공통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제약하는 어떤 작위적 공법이 있다면 이는 필시 약탈과 전쟁, 억압과 반목을 야기할 것임에 틀림없다. 즉 영구 평화를 확정할 수 없게 된다.
칸트가 구상한 영구 평화를 위한 예비 조건과 확정 조건은 영구적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통찰과 이성적 기획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칸트가 구상한 영구 평화를 어떻게 보증할 것인가는 미완의 숙제다.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보증해 주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인 자연이다”라고 말한다. 이때의 ‘자연’은 인간 사이의 화합을 창출해 내려는 합목적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이성적 의지와 도덕적 본능과 같은 ‘섭리’를 뜻하기도 하고, 실존적 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이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인간들이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준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평화지향적인 자연적 메커니즘이 국가 간에 전쟁의 위험이 고조될 때 협상과 중재를 통해서 전쟁을 방지하도록 강제되어 결국 이 자연적 섭리가 영구 평화를 보증하도록 이끌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섭리에 대한 기대만으로 영구 평화를 담보하기에는 너무 취약하지 않은가. 이 점이 칸트의 낙관적 인간관에 기초한 영구 평화론의 허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점이 칸트의 희구와 통찰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국제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의 강제력을 동원한 강압적 평화의 보증이 초래할 자유의 위축보다, 차라리 불완전 하지만 인간 이성과 자연적 섭리에 기대는 편이 해악을 더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영원한 평화를 향한 거대한 철학적 이상이다. 특히 칸트는 평화를 만들어 낼 기본 조건으로 공화적 정부와 계몽된 시민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평화의 달성을 인간의 도덕적 책무로까지 확대하고자 한 듯싶다. 그의 영구 평화에 대한 열망은 세계를 계몽시켰고, 불완전하게나마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이라는 ‘평화 연맹(foedus pacificum)’체제를 만들어 낸 중요한 철학적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전 세계에는 평화를 위협하는 전제적 국가가 수없이 많다. 또한 이념과 종교의 갈등과 반목이 가시지 않고 있고, 영토의 쟁탈을 둘러싼 국가 간 대립과 충돌도 중단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악조건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섭리를 시험하고 있다. 영구 평화를 위한 도덕적 동기와 이성을 자극하고 명예로운 평화를 추구해 나가도록 현명한 설계도를 제시한 칸트의 영구 평화론의 참뜻을 끊임없이 반추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읽으며, 한반도의 영구 평화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칸트의 영구 평화의 전제조건과 확정조건이 지금의 한반도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주장하는 미군 철수와 평화협정은 전쟁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위장 평화전략이라는 점, 특히 북한이 적대적 도발과 협박을 중단하지 않는 상황은 영구 평화의 예비조건들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
더구나 북한은 전체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보편적 국제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공화 정체에 기초한 영구 평화의 확정 조건을 결정적으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반도의 영구 평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게다가 우리는 기존 패권국인 미국과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이 ‘투키디데스 함정’에 끊임없이 유혹 당할 수 있는 지정학적 중심에 놓여 있다.
특히 칸트가 통찰해 낸 영구 평화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맞서 있는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쟁의 위협성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한반도의 영구 평화와 통일의 제1의 조건은 북한 공산당 일당지배의 전체주의가 소멸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칸트가 영구 평화의 조건으로 주문한 것처럼 우리가 북한 체제의 변동을 위해 폭력적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비추어 보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책의 범위는 협소해진다.
북한에 스스로 자유로운 공화정체로 거듭나는 환경과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칸트적 평화(Kantian Peace)’와 자유통일은 요원하다. 그렇다면 북한에 자유민주주의의 훈풍을 어떻게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인가는 한반도의 영구평화를 위한 예비조건이자 확정조건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헌정 가치를 바로 세우고 남남갈등을 극복하여 국민통합을 이루는 작은 일부터 나서야 할 것 같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추천도서: 『영구 평화론』,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서광사(2010), 11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