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기와 함께 나타난 인민민주주의…광장의 로망에 빠져
지대추구행위자들의 인민재판, 프랑스혁명과 2016년 대한민국

1. 프랑스혁명의 원인과 특징

유럽 역사에서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전환점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혁명의 본질적인 특성은 귀족 중심체제와 특권적인 봉건질서를 파괴하여 국민을 하나로 통일시켰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구체제를 지탱하던 귀족 계급은 특혜와 지배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와해되었고, 기존의 봉건제도는 공동체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었으며, 동업조합의 독점 체제를 허물고 국내 시장을 단일화를 이룬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봉건제도를 누르고 거둔 승리가 새로운 사회적 역학 관계의 즉각적인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이 구체제 사회 속에서 서서히 발전해 가는 단순하고 순조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구체제 사회라는 틀을 부술 정도로 강력해지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프랑스에서 확고하게 존재감을 나타내기까지는 혁명이후에도 오랜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1)

봉건적 토지 소유의 붕괴 및 동업조합 중심의 구체제 와해는 중소규모 직접 생산자들을 해방시켰다는 의미에서는 오늘날 까지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자본과 임금노동으로 사회가 양극화되는 현상 또한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자율성은 농업 부문에서뿐만 아니라 산업부문에서도 보장 되었으며, 생산과 유통 사이의 부르주아(생산자)적 관계로 나아가는 길 역시 열렸다고 할 수 있다.

2.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명예혁명

유럽의 근대사를 논할 때 항상 빠져서는 안 되는 사실이 11세기~18세기까지 프랑스는 영국과 대등한 국가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네 가지 사실에서 프랑스는 영국보다 월등해야했다. 첫째 프랑스는 강한 중앙집권적 정부와 고도로 체계화된 사법제도가 존재했다. 둘째 프랑스는 데카르트와 파스칼로 대변되는 계몽주의의 고향이다. 셋째 기술혁신 면에서 프랑스는 영국과 훗날 독일의 업적과 비교해 봐도 더 월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과 독일에 비교해도 전혀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넷째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전유럽 왕가들의 목표가 될 만큼 막강했다.

   
▲ 사진은 양영란이 옮긴 알베르 소불(Albert Marius Soboul 1914~1982)의 ‘프랑스 대혁명’. 그가 1964년 집필한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을 넘어 세계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평가하는 바이블로 쓰인다. 소불의 이론은 프랑스 혁명을 봉건질서를 벗어난 긍정적인 시기로 평가하는 한편, 가장 비판적으로도 정치-사회적 혼란기로의 프랑스혁명을 평가했다./사진=『프랑스 대혁명』 표지


영국의 경우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이 부르주아지와 토지 귀족들이 공동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선에서 사회적, 정치적 타협을 이루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에 일어난 최초의 혁명을 통해 이미 잠재적 절대왕정을 대의정부 체제로 바꿈으로써 박해를 일삼던 영국 국교의 배타적인 지배에 종지부를 찍으므로 자본주의 발전의 길이 열렸다면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는 자유라는 이름의 독재가 판을 쳤으며, 제3신분은 특유의(?)단결력으로 구질서를 파괴시켰지만, 그 이후에야말로 계급투쟁은 더 폭력적으로 지속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는 본인들이 말하는 대의를 위한 발걸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3. 혁명의 원인은 계급투쟁이 아닌 시장개입에 대한 반발

강대국을 논할 때 전통적으로 논의되는 강대국들이 있다. 미, 러, 중, 영, 프, 독, 일본과 같은 국가들, 즉 G-7국가들과 옵서버 자격의 러시아와 중국은 모두 자신들의 특징과 전통, 강대국이 지녀야할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만약 위의 9개국 중 3개를 제외시키라면? 패권과는 별로 상관없는 캐나다와 이탈리아를 포함 아마도 프랑스가 될 것이다. 프랑스는 훌륭한 나라이며 전통적으로 패권을 추구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언제라도 기회가 오면 헤게모니 국가를 제압하고 “부뚜막”을 차지하려는 교활함 역시 지닌 국가이다. 16세기부터 정착한 중앙집권왕조, 계몽주의를 통해 일찍 눈을 뜬 과학의 발전등 프랑스가 전파한 긍정적 유산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비슷한 규모의 전통적 경쟁국인 영국, 독일 보다는 왠지 한수 아래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비스마르크 이후 줄곧 독일에게 고전하는 프랑스의 모습(?)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막연하게나마 느끼는 부분이다. 이유가 뭘까?

프랑스는 역사적으로도 지대추구행위(Rent-Seeking Behavior)가 여타 유럽국가에 비해서도 유달리 팽배했다. 프랑스 하면 귀족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기업과 같은 길드(Guild)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길드의 품종별 감독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길드의 숫자대로 감독관이 존재했다. 10개의 품목에 100개의 길드가 있다면 당연히 감독관은 10명 혹은 그 이하로도 충분하지만 비대화된 지대추구행위는 100명의 감독관을 만들어 세부적인 사항에 까지 규제를 감독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추제조 길드의 경우 소의 뼈를 재료로 사용하는 단추를 다른 동물의 뼈로 제조한 것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감독관은 길드의 재봉사에게 벌금을 부과했고, 심지어 재봉사의 가정집까지 수색하여 밀매품을 입은 자들은 혹시라도(?) 없나 확인했다. 양모피를 제조하는 길드의 경우 양의 털은 5월과 6월에만 깎아야 했고, 검정색 양은 도살 할 수 없었고, 생산에 필요한 소모 장치는 허가받은 종류의 철물을 써야 했으며, 양을 도축할 때 사용하는 칼은 길이가 정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드에서 사용하는 톱의 날은 특정한 수의 톱날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정도로 모든 분야를 목적불명의 이유로 통제한 결과가 낳은 것이 곧 프랑스혁명(1789)이다

   
▲ 언론에서는 지속적으로 '200만의 촛불'이라는 검증하기 힘든 광장의 광기를 대한민국의 일반여론인양 보도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좌파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프랑스혁명의 모습은 과도하게 착취를 당하는 민중들에 의해 폭발한 긍정적 혁명으로 묘사되고 이건 일정부분 맞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되는 사실은 부르주아(Bourgeois) 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혁명의 본질은 열심히 경제활동으로 공정가격(Just Price)을 원하던 행위자들과 단체에 의해 주도된 분노한 시장의 폭발이다. 제3신분으로 불리던 평민계급에는 기업가와 노동자들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경제활동을 하면서 지대추구 행위의 위험성을 현장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던 계급이 제3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혁명이후에도 절대왕정과 왕권귀족이 행하던 고질적 지대추구행위의 못된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고, 봉건적 계급질서를 붕괴시키는데 앞장섰던 제3신분들이야말로 더 폭력적인 계급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프랑스의 모습은 레미제라블에서 묘사되는 암울한 모습이다. 17세기이전 청교도 혁명(1649)과 명예혁명(1688)을 끝낸 영국이 18세기 들어 산업혁명의 결과물을 속속들이 만들어냈다. 산업혁명은 과학적인 발견이기 이전 재산권의 확립이 유럽사회에 퍼져나가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을 비교할 때 프랑스의 절대왕정 체제가 성장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성장의 결과물에 대한 생산자들의 이해관계가 잘못 얽혔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지도 여실히 보여준다.

4. 대한민국 고도성장기와 함께 나타난 인민민주주의

1980년대가 되면서 대한민국의 가치는 공공연하게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원칙들을 지켜야 한다는 국민들의 열망에 이질적인 세력들이 편승하게 된 것이다. 이들 세력은 반미,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그 가운데 주체사상까지 받아들이는 세력까지 나타났다. 1990년대가 되어 이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 시작은 은밀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모아 지도부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문화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2)

2000년대가 되자 이들은 어느새 정치권력의 핵심까지 진출하였고, 이 힘을 배경으로 대한민국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흔들기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정치적인 목적을 뚜렷하게 가진 인사들이 이에 가담하여 모든 해석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가치를 파괴하려던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둔갑되는 일까지도 나타났다. 

민주화 운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재에 저항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자유민주주의 대신에 인민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까지 민주화로 보아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법적인 시위와 파업 그리고 폭력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세력들의 행위까지도 민주화운동이 되는가?

   
▲ 민주화 운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재에 저항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자유민주주의 대신에 인민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까지 민주화로 보아야 하는가./사진=미디어펜

5. 광장의 로망에 흠뻑 취한 2016년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지속적으로 “200만의 촛불”이라는 검증하기 힘든 광장의 광기를 대한민국의 일반여론인양 보도하고 있다. 지금 토론문의 결론을 작성하는 시간이 12월 09일 오후 9시니 대통령 탄핵 가결에 대한 평가, 향후전망 등 다양한 여론이 만들어져 끊임없이 대중에게 공급되고 있지만, 의식이 있는 개인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보복의 살풀이 내지는 맥락 없는 피의 열망인지 거북하게 느껴질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본질이 계급투쟁의 역사든 분노한 시장의 폭발이든, 학술적 논쟁거리로서 끊임없이 재해석 되고 회자되겠지만, 정작 구체제안에서 변화를 열망하고 필요했던(하는) 대상들이 혁명이후에 얻은 것은 굶주림과 빈곤, 광장이 주는 폭력의 달콤함에 취해 극단적 결정들에 대한 쾌감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자체는 근대사적인 틀로써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광화문 시위는 지대추구행위자들의 정치적 소모품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인들의 왜곡된 정서가 국제사회를 향한 냉소적 시각과 반응, 다국적기업을 향한 막연한 배타성, 프랑스식 부정과 복수의 정치를 오늘날 대한민국처럼 그대로 빼닮은 곳도 찾기 힘들다. 단두대에 목이 달아나는 권력자들을 향한 유아기적 배덕감에 흠뻑 취해 분노의 화살을 날렸듯 언론과 국민에게 자신의 거취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한 대통령에 대한 증오의 표출은 한국적 보복정치 안에서 대선을 염두에 둔 정치운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조선시대로의 회귀를 심심치 않게 주장하는 이유도 이러한 명분과 실리가 따로 움직이는 위선의 모습과 정치활동들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탓이 크다.

결국 이 모든 광장의 정서와 정치운동이 지향하는 종착점은 反자본주의와 전체주의적 인민독재라는 결과물 밖에 만들어 내지 못한 다는 것이 역사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입법기관에 의해 국가 최종결정권자로 권력을 박탈시켰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착실한 삼권 분립제도가 얼마나 정착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이젠 광장의 주체세력들이 증오를 거두고 성숙한 근대시민으로서 개인의 냉정함을 보여줄 때이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1) 알베르 소불 : 프랑스 대혁명 (양영란, 2016) 두레출판사

2) 권희영 : 가야만 사는 길, 역사는 안보다 2009, 글마당


(이 글은 14일 자유경제원이 마포 리버티홀에서 주최한 '세계사를 알면 한국의 갈 길이 보인다 4차 연속세미나: 프랑스혁명과 광장민주주의'에서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가 발표한 토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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