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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과 증오…프랑스 혁명과 광장 민주주의의 종말
피로 물든 '프랑스 대혁명' 모델로 삼는 분노와 분풀이는 해결책 아냐
승인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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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 2016-12-15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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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초대형 살상극, 프랑스 대혁명

피로 만든 민주주의
                                                   
지식채널e에서 만든 3분 48초짜리 다큐멘터리 ‘프랑스 혁명’의 소제목은 ‘피로 만든 민주주의’다. 다큐는 루이 14세 이후 구제도의 모순, 인구 2%밖에 안 되는 1, 2신분(귀족과 성직자)이 무려 40%의 토지를 독점한 것과 외부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반영  反英 미국 혁명 지원(20억 리브르는 700만 명의 국민들에게 집과 식량을 제공할 수 있는 금액)으로 인한 국가 재정 적자를 나열한 뒤 이를 해결하기 위한 3부회 소집을 혁명의 뒤 그림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선언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발표 그리고 입헌군주제, 권력분립, 제한선거를 담은 헌법 제정, 헌법에 따른 입법의회 소집,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침공 등등을 나열한 뒤 루이 16세의 체포와 처형으로 첫 번째 단락을 마무리 짓는다. 드디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가 등장하지만 그러나 공포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혁명을 거부한 민중들에 대한 처형도 살짝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다큐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프랑스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었으며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혼란도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내건 ‘자유와 평등 박애’ 이념은 오늘날까지도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남아있다”로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주구장창 ‘민주주의’만 등장할 뿐 그 어디에도 ‘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없다. 괴리로 인한 ‘혼란’도 빠져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역사가 수십 년 정체에 빠져들었고 나폴레옹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도 빠져있다. 역사의 일부분만 강조한 이 다큐가 참고한 것은 교학사 교과서다. 김광동 박사의 발제 중 이 빠져있는 ‘피’가 등장하는 대목을 보자.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斷頭臺로 보내면서 자신은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로베스피에르는 淸廉志士청렴지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확신이 강했던 그는 다른 사람들의 과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다. 50만 명이 체포됐고, 단두대에서의 처형, 혁명파와 왕당파王黨派간의 충돌, 농민폭동 등으로 17만 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1 년여의 공포정치 끝에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1794년 7월28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 만들어 놓은 것을 부정하기는 쉽지만, 다시 만들어 내거나 더 잘 만든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분노와 분풀이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잘못은 끌어내리기와 보복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사진=연합뉴스


증오의 싹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혁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명망가 수준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조부가 중소 상인과 중견 관료를 지냈던 것을 이유로 그는 자신의 이름에 항상 de를 넣기를 고집했다. 1769년 10월 주교의 추천으로 로베스피에르는 파리의 르 그랑 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철학과 역사학, 윤리, 법률 등을 공부했으며 성적은 좋았다.

이 시기 그는 루소를 접한다. 정확히는 빠져든다. 로베스피에르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고 음주,  흡연 학생들을 경멸했다. 졸업한 후에도 그는 음주, 흡연 동창들을 만나면 인사도 하지 않고 외면했다. 루이 16세는 대관식 직후 르 그랑 학교를 방문한다. 어린 아내를 동반한 최초의 파리 여행이었다. 당시 열일곱이던 로베스피에르는 학생 대표로 선출되어 라틴어로 된 환영사를 읽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연설 당일 로베스피에르와 군중들은 빗속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로베스피에르는 진흙탕에 무릎을 꿇고 환영사를 했다. 왕은 로베스피에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념식 직후 바로 학교를 떠났고 축사에 답례도, 국왕 내외를 기다리느라 오랫동안 기다렸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도 한마디 인사도 남기지 않았다.

아침부터 학교 청소를 했던 학생들은 분개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 내외를 사려가 부족한 지도자라고 질타했다. 자칫하면 칼이 될 수 있는 계몽주의에 사감이 끼어든 것이다. 계몽주의의 핵심어는 ‘권위를 믿지 말라’이다. 루이 16세의 처형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에서 로베스피에르는 11회의 연설 모두 사형을 요구했다. 그는 부르주아 층과 중소 지식인들에게 경고하는 차원에서라도 국왕과 그의 사치스러운 아내는 죽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독 국왕에게만 가혹하다는 비판에도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처형의 날들, 기요틴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나는 망했다 외치며 온갖 주접은 다 떨었다.’ 루이 16세의 처형 날인 1793년 1월 21일 기요틴 앞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사실과 다르다. 기요틴 앞에서 루이 16세는 담담하고 당당했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죽음에 대해 죄 있는 자를 용서하노라. 진정으로 말하건대 이 피는 프랑스로서는 흘릴 이유가 없는 피다.”

장 폴 마라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급진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로 잘 알려진 내과 의사, 철학자, 정치 이론가, 과학자이다.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정부를 비판하고 하층민을 지지했다. 반혁명 세력이 준동한다는 소문에 그는 반혁명 음모자 이름을 신문에 게제하고 200명의 처형을 요구했다.

이 숫자는 얼마 후 200만 명으로 늘어난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몇 명의 목만 자르면 일은 잘 풀리게 되어 있다. 그래도 안 되면 몇 명 더 치면 된다.” 그에게 혁명은 ‘죽이는 일’이었다. 이 논리는 나중에 세기를 건너뛰어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도 재연된다. 200만 명을 죽여야 혁명이 완수된다고 믿었던 이들은 프랑스 유학생 인텔리들로서 혁명이 인간성 자체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정신병자들이었다.

피부병으로 집에서 요양 중이던 그를 암살한 것은 지롱드파였던 평범한 여성 샤를로트 코르테다. 암살 후 그녀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재판정에서 그녀는 “(마라의 암살로)당신은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평화입니다. 그가 죽었으므로 조국에도 평화가 올 것입니다.” 1793년 7월 13일 암살당한 마라는 그 드라마틱한 죽음으로 혁명의 성자가 되었다. 과격한 공화국에서 신의 상징이 된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주는 것이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편집광의 말로치고는 평화롭고 우아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3년 1월 21일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며 범죄와 약탈, 도적질을 엄하게 다스렸다. 그는 무기를 소지하고 약탈, 강간을 한 자와 뇌물을 수수한 부패 관료는 무조건 교수형에 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범죄자뿐만이 아니었다.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추방하고 최고 권력을 장악한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이용, 공포 정치를 단행하면서 반대파를 모조리 단두대로 보냈다. 실각 직후 그는 스스로 자신의 턱에 권총을 쏴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중상으로 끝나고 콩시에르주리 감옥에 수감된다.

1794년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라 목이 잘린다. 그의 정적들의 목이 떨어져 나간 그 장소, 그 칼날이었다. 그의 동료와 친지 22인이 함께 살해됐다. 108명이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지지한 죄로 사형 당했고 수백 명이 투옥되었다. 그의 별명은 ‘루소의 피로 물든 손’이었다. 

처음에는 이유를 달아 죽였고 나중에는 죽이기 위해 죽였다. 프랑스에서는 여타의 혁명과 구별하기 위해 앞에 ‘대’ 자를 붙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죽인 사람의 규모로도 프랑스 대혁명은 가장 윗길에 속한다. 로베스피에르의  절제적인 삶은 이상주의자,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호치민, 피델 카스트로는 그를 이상적인 혁명가의 전형으로 받들어 모셨다. 이들의 공통점은 ‘학살자’라는 것이다.  

   
▲ 우리 정치의 최대과제란 프랑스혁명을 모델을 삼아 롤러코스터를 타자는 세력과 함께, ‘청산, 부역자, 민족정기, 민중, 역사바로세우기, 인민재판, 부관참시, 두고 보자’와 같은 무책임하고도 선동만 남는 광장정치를 극복하는 것이다./사진=연합뉴스

유언비어들

이런 피의 축전에는 항상 유언비어가 떠돌고 퍼져나간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으로 오래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최초로 언급되는 것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생, 고백록은 1760년에 출간된 책이다. 

바스티유 감옥은 음습한 감옥이 아니었다. 바스티유에 투옥된 이들은 주로 귀족 출신의 범죄자들이었고 비록 갇힌 몸이기는 했지만 죄수들은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누렸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왕의 사법권 독점에 대한 상징적인 항거였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발제자 김광동 박사의 결론은 명료하다. 

부정의 역사에는 성공이 없고, 계승의 역사에만 성공이 있다. 역사든, 건물이든 건설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파괴하기는 쉬운 것이다. 한 시대를 성공적으로 만드는 것은 극히 예외적 국가와 국민들만이 해내는 것이지만 과거를 잘못이라 규정하고 역사청산(淸算)을 자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늘 실패하는 나라에서 반복되는 일이다.

만들어 놓은 것을 부정하기는 쉽지만, 다시 만들어 내거나 더 잘 만든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중략) 분노와 분풀이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잘못은 끌어내리기와 보복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중략) 사람 대신 제도를 믿고, 제도를 통해 문제가 발생한 가능성을 점차 최소화시키는 방법을 찾는 계승과 보수개혁의 정치가 필요하다.

시행착오와 실수는 모든 일에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기에 잘못과 실수를 가지고 인물, 집단, 기관을 부정한다면 굳이 비판대상이 될 일을 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중략) 만드는 사람이 없으면 실수도 없겠지만, 함께 나눌 것도 없는 사회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정치의 최대과제란 프랑스혁명을 모델을 삼아 롤러코스터를 타자는 세력과 함께, ‘청산, 부역자, 민족정기, 민중, 역사바로세우기, 인민재판, 부관참시, 두고 보자’와 같은 무책임하고도 선동만 남는 광장정치를 극복하는 것이다. 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민중의 선택은?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이 글은 14일 자유경제원이 마포 리버티홀에서 주최한 '세계사를 알면 한국의 갈 길이 보인다 4차 연속세미나: 프랑스혁명과 광장민주주의'에서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가 발표한 토론문입니다.)
[남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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