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 충격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고 있는 재계의 시름이 다시 깊어지고 있다. 야당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법’ 개정안이 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노믹스’ ‘중국의 사드 경제 보복’ ‘소비절벽’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재계는 좌불안석이다.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이달 임시국회에서 통과할 경우 기업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다. 이에 경제단체들와 재계는 정치권의 합리적인 법안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정치권이 ‘포퓰리즘’으로 졸속 입법을 강행할 경우 되돌리기 어려운 파장이 예상된다. 미디어펜은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이 불러올 영향을 4회에 걸쳐 심층 분석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상법, 잘못 건드리면 ‘메가톤급 폭탄’
②삼성·현대 '핵심기업' 외국자본 놀이터 되나
③공정거래법, 기업 체력보강·체질 개선부터 고려해야
④포퓰리즘에 새카맣게 속타는 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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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에 강추위가 몰아친 지난 10일 오전 서울 도심의 빌딩에서 난방용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연합 |
[미디어펜=조한진 기자]'최순실 게이트'로 위축된 재계의 시선이 ‘2월 임시국회’로 향하고 있다. 상법개정안의 통과 여부가 기업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에 연루된 재계는 숨을 죽이고 있다. 반(反)기업 정서까지 확산되면서 숨소리 내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재계와 경제단체가 상법개정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기업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기업 때리기를 통한 포퓰리즘으로 상법개정안이 졸속 처리될 경우 시장·기업가치 훼손은 물론, 기업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가 될 수 있다는 비관론까지 대두되고 있다.
15일 재계와 경제단체에 따르면 상법개정안 가운데 △감사위원 분리선임 △집중투표제 의무화 △근로자대표 등 추천자 사외이사 의무선임 △다중대표소송 도입 △전자투표제 의무화 △자사주 처분규제 부활 등이 독소 조항으로 꼽히고 있다.
개정안 입법 시 곳곳에서 부작용 불가피
상법개정안이 입법될 경우 여러 곳에서 파열음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재계는 우선 시장경제의 기본원칙 훼손을 우려하고 있다. 또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힘든 환경이 되고, 해외 투기자본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걱정도 나온다.
여기에 모험투자와 혁신 등 기업가정신을 발휘하기 어렵고, 정책(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자사주 활용)을 믿고 따르기 힘들어 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상법개정안에 대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강력한 규제들과 시장경제 기본원칙을 훼손하는 조항들이 다수 포함됐다”며 “이대로 입법이 되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주주 의결권 행사 방법과 이사회 구성을 규제하는 사례는 선진국에서도 찾기 어렵다. 감사위원을 분리선임하고,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나라도 전무한 상황이다.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곳도 러시아, 칠레, 멕시코 등 3개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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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항 신항 부두에 접안한 컨테이너선에서 분주하게 화물을 선적하고 있다. /연합 |
재계, 의결권 훼손 우려 증폭
특히 재계는 의결권의 훼손을 우려하고 있다. 이는 주식 제도의 근간인 '1주 1의결권' 원칙에도 어긋난다며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상법개정안에서는 ‘일반 이사’와 감사위원회 위원이 될 이사‘를 별도 주주총회에서 분리선임하도록 하고 있다. 감사위원이 될 이사를 선임할 때 대주주가 아무리 많은 지분을 갖고 있어도 의결권이 3%로 제한된다.
현행 일괄선임제와 달리 감사위원이 될 이사를 선임하는 첫 단계부터 대주주 의결권이 제한되는 셈이다. 현행 상법에서는 이사를 주주총회에서 일괄선임하고 이들 중 감사위원회 위원이 될 이사를 별도의 주주총회에서 다시 선임한다. 이때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하고 있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며 “분리선임을 강제해 제한을 더욱 강화하는 개정안은 주주의 이사선임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주식회사 제도의 본질에 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투표제는 소수 주주들이 선호하는 이사의 선출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1998년 개정상법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집중투표제를 원하지 않는 기업은 정관을 변경해 도입을 배제시킬 수 있다.
개정안과 같이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할 경우 투기세력의 이사회 장악할 수 있고, 사익추구로 제2, 3 대주주만 이익을 얻는 등 경영 효율의 저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현재 미국, 일본 등 20여 개국에서 집중투표제를 도입했으나 실시 여부는 기업 자율에 맡기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40년대 22개주에서 집중투표제를 강제했지만 적대적 인수합병의 부작용을 경험하면서 대부분 임의규정으로 전환했다.
법률 강화보다는 시장 자율규범 확립이 효율적
재계도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입법취지에는 공감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이 상장사를 개인회사처럼 운영하거나, 분식회계와 편법상속, 회사기회 유용 등 구시대적 관행이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된다는 부분에서도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현행 기업지배구조 관련제도가 이미 선진국 수준이라는 점을 재계의 시각이다. 관련 제도를 지속적으로 강화해도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재계에서는 규제 강화보다는 시장의 감시 기능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선진국에서 기업지배구조가 정착된 비결은 규제 보다는 기관투자가들의 감시 역할이 컸다는 이유다.
이 가운데 스튜어드십코드(Stewardship Code)의 활용이 규제 강화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주요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자율지침이다. 기관들이 고객 재산을 선량하게 관리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뜻에서 생긴 용어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기관투자자들의 시장감시역할이 활성화되면 주총에서 의혹이 있는 안건들마저 일사천리로 통과되는 모습은 사라질 것”이라며 “상장기업들도 주주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기관투자자들과 더 많이 소통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디어펜=조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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