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88)-소크라테스에 씌운 소피스트의 오명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5?~385?)의 『구름』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민주주의를 창안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청소년 교육과 시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높았다. 민주주의는 곧 각성된 시민들의 참여가 있을 때 가장 잘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작위 추첨에 의해 선발된 시민이 공직의 여러 직위를 웬만큼이라도 수행해 내려면 보편적 수준의 지식과 공동체의 현안은 물론, 국가 제도와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요구되었다.
비극(Tragoidia)과 희극(Komoidia)이 아테네에서 탄생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 교육을 필요로 했고, 이런 바탕에서 그리스 세계의 신화와 역사를 다룬 비극과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은 희극은 요긴한 교육 대안의 하나로 떠올랐다. 그리스 비극과 희극은 시인들의 문학 작품을 넘어 효과적인 시민 교육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특히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정서를 담고 있는 비극은 시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희극 또한 고단한 삶과 시름을 덜어주는 해학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희극을 뜻하는 희랍어 ‘Komoidia(코모이디아)’는 원래 행렬을 뜻하는 ‘Komos(코모스)’와 노래를 의미하는 ‘oide(오이데)’가 합쳐서 만들어진 말이다. 희극은 아테네에서 열리던 디오뉘소스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춤을 추며 무리를 지어 행진하면서 부르던 노래에서 유래되었다. 아마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서로 속된 만담을 주고받았던 데에서 희극이 싹트지 않았나싶다.
그리스 희극은 아테네가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민주주의를 만개시키면서 번영을 구가하던 5세기에 창안되고, 또 그 세기에 절정을 구가했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함으로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희극 또한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렇다면 희극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운명을 같이한 셈이다.
아테네 사회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들었을 때, 희극은 한바탕 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다. 또 오랜 동안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 사회가 극도로 불안해지고 시민의 삶이 피폐해지자, 희극은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마음껏 발산하는 또 다른 불만의 배출구 역할을 했을 듯싶다.
그런 점에서 기나긴 내전과 함께 아테네가 쇠락의 조짐을 보일 그 시기에 활동했던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5~385)는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희극의 풍부한 소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테네의 퇴조를 최대한 저지하고 다시 부흥시키고자 하는 애국적 소명에서 자신의 희곡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악폐에 대해 거침없고 날카로운 풍자를 하게 된다. 아마 시민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당대의 유명 정치인, 철학자와 명사들을 실명으로 비판하고 조롱하는 희극을 쓰고 공연하는 데 몰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 아리스토파네스 흉상 |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파네스가 만들어내는 웃음과 해학 속에는 언제나 톡톡 쏘는 쓴웃음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그는 시민들을 계몽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 때때로 무모하고 과도한 비판과 풍자를 가하기도 했다. <구름> 또한 그런 측면이 다분하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마음껏 조롱하고 비판한 사람은 바로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였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와 함께 등장할 만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사이다. 그런데도 그는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무신론자이자 궤변론자로 비판하면서 허황된 이론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대놓고 비판할 수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아테네의 언론 자유의 수준은 꽤나 높았다. 플라톤이 <국가(Politeia)>에서 “이 나라는 자유(eleutheria)와 언론 자유(parrhesia)로 가득 차 있어서, 이 나라에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exousia)’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한탄했던 것도 이런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심각할 정도의 비판과 조롱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스를 명예훼손죄로 소송을 제기할 만도 한 데 그런 기록은 없다. 소크라테스도 어지간히 무던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이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공연됨으로써 시민들에게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사형을 판결한 재판의 변론에서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편견과 오해를 심어준 주범 가운데 한 명으로 아리스토파네스를 지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 이제 이 작품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본격적으로 이 작품의 감상으로 들어가 보자. 주인공 스트레프시아데스는 빚에 시달리는 소시민이다. 게다가 그는 전차 경주에 빠진 아들 때문에 집안 살림이 거덜 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는 고민 끝에 소크라테스의 사색소를 찾아 남의 빚을 떼어먹는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다. 이 작품에서 소크라테스는 사론(邪論)으로 정론(正論)을 물리치는 교묘한 논리를 가르치는 궤변론자로 그려지고 조롱받는다.
게다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로 그려진다. 천둥과 번개를 제우스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소크라테스를 무신론자로 몰아세운 것이다. 스트레프시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문답은 진리를 깨우쳐 나가는 방법이 아니라 사악한 생각이나 터무니없는 꼼수를 도출하는 방법으로 묘사되어 비판받는다.
빌린 돈의 이자를 갚지 않기 위해 마녀를 사서 달을 끌어내려 투구함에 가두어 버리겠다거나,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하면 화경(火鏡)으로 고소장을 녹여 없애버린다는 등 엉뚱한 해법을 내면 소크라테스가 그에 동의해주는 식으로 묘사된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해답을 주지 않고 질문자가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방법을 교묘한 방법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 좌상, ⓒ박경귀 |
소크라테스에게 쫓겨난 스트레프시아데스가 채권자들을 조롱하며 돈을 갚지 않겠다고 속임수의 말을 하며 뻗대는 대목은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궤변의 악영향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채권자와 문답하며 하늘의 현상을 모른다고 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면박주거나, “‘반죽통 양(孃)’을 ‘반죽통’이라고 부르는 자에게는 한 푼도 갚을 수 없소”라는 대목에서는 쓴웃음이 나온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의 궤변이 사람들을 이렇게 황당하게 변화시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작품에서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말들은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들이 아님을 물론이다. 당연히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다.
소크라테스에게 덧씌워지는 오명은 스트레프시아데스의 아들 페이디피데스의 패륜적 행동에서 절정을 이룬다. 스트레프시아데스는 자기 대신 아들을 소크라테스에게 보내 교육을 받게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페이디피데스는 아버지를 폭행하고는 어른이 아이를 염려하여 때리는 것처럼 자식도 아비를 염려하여 때릴 수 있다는 억지 논리를 편다. 스트레프시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저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아들을 타락시켰다는 분노에 의해 소크라테스의 집에 불을 지르고 만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작품에서 당시 소피스트들에 의해 잘못된 궤변이 횡행하던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의 희생양으로 애꿎은 소크라테스를 골랐지만 사실 소크라테스야말로 소피스트들을 가장 경계하고 비판했던 진정한 철학자였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마저 이런 부류로 싸잡아 비난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 작품 제목 '구름'이 의미하듯 소크라테스를 허황된 자연학의 이치를 좇는 비현실적인 소피스트로 매도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과도하리만큼 소크라테스에 대한 인신공격에 나선 것은 당시의 소피스트들의 폐해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도 소크라테스가 당시의 소피스트들과 질적으로 다른 철학자였음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비판의 칼날을 그에게 겨눈 것은 아마 ‘악화(惡貨)’와 같은 소피스트를 구축에 앞서야 할 소중한 ‘양화(良貨)’인 소크라테스를 더 격동시켜 소피스트를 몰아세우는 일에 매진해 주길 희망했던 것은 아닐까.
아리스토파네스가 청년들의 교육 문제의 맹점을 비판적으로 그린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페이디피데스의 악행을 예를 들어, 당시 청년들이 사회 질서와 규범을 무너뜨리고 있는 현상을 소크라테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이 오도한 영향인 것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풍자와 조롱에 어느 정도 공감했을까.
이 공연을 본 아테네 시민들은 두 가지 반응이 있었을 듯싶다. 먼저 소피스트들에 대해 반감이 높아가던 시대적 상황에서 정말 소크라테스도 사회를 타락시키는 소피스트의 부류에 속하지 않을까 의구심을 갖게 된 시민도 생겨났을 듯싶다. 한편으로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오해하고 지나치게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전 423년 디오니소스제에서 공연된 이 작품이 3등, 즉 꼴찌를 한 것을 보면 당시 시민들이 이 작품의 비판 기조에 크게 공감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반감을 부추긴 측면이 전혀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당시 연극이 시민들의 의식과 행동에 미친 영향력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수백만 관객들이 관람하는 흥행 영화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연극은 당시 거의 유일한 공개 매체였기 때문에 여기서 다루어진 테마는 자연히 시민들의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론(邪論)이 횡행하여 올바른 시민 교육이 무너져 가고 있던 안타까운 상황을 되돌려보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충정어린 풍자극 <구름>이 아테네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 측면도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가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고 결국 독배를 마시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이 작품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구름>,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출판부(2008, 4쇄), 38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