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2일 “야권 통합”을 제의해 나름의 출구전략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벌여온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발언대에 오른 이종걸 원내대표는 “정말 죄송하다. 정말 죽을죄를 졌다”고 했다. 앞서 발언을 한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총선 결과에 따라 테러방지법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영선 의원은 “국회에서 과반의석을 갖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눈물로 표를 호소했다.
9일째 이어온 필리버스터가 결국 ‘표 호소’로 종말을 예고하자 즉각적인 네티즌들의 반응도 이어졌다. 인터넷상에서 네티즌들은 박 의원의 발언과 관련해 “거짓 눈물”이라면서 ‘울면서도 칼같이 원고를 넘겼다’ ‘카메라 앵글이 옆으로 잡히자 짝발로 구두를 신었다’는 등 지적들을 쏟아냈다.
필리버스터가 큰 관심을 모았던 만큼 날카로운 평가가 잇따르자 야당 지도부는 필리버스터 정국 이후에 자칫 역풍을 맞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지난달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자 이에 반발한 야당의원들이 필리버스터에 나서 2일까지 모두 38명의 야당의원들이 무제한 토론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들은 테러방지법을 저지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주장하던 독소 조항 하나도 고치지 못했다.
야당이 ‘민의의 전당’에서 무려 9일간이나 국회 일정을 마비시키면서 선거운동을 한 셈이라는 비난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야당 지지자들의 표만 결집시킨 결과는 안철수 신당의 떨어진 지지율이 반영했으며, 생뚱맞게도 김종인의 ‘야권통합 카드’를 불러왔다.
지난달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자 이에 반발한 야당의원들이 필리버스터에 나서 2일까지 모두 38명의 야당의원들이 무제한 토론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들은 테러방지법을 저지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주장하던 독소 조항 하나도 고치지 못했다. 사진은 필리버스터 마지막 주자인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ㅐ표./사진=미디어펜
지난 필리버스터 여론몰이는 야당의원들의 ‘기록 깨기’ 경쟁으로 시작됐다. 연단에서 10여 시간씩 초인적으로 버티던 의원들이 내려와 눈물까지 쏟으니 각종 포털사이트에 동영상이 도배됐다. 국회방송이 국민방송이 되고, 본회의장에 방청객도 크게 늘어났다.
공천에서 배제된 한 남성의원은 긴 발언 끝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주저앉아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다. 당내에서 공천 구제설이 나왔고, 일부 의원들의 후원계좌도 두둑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국회에는 테러방지법뿐 아니라 4.13총선 선거구 획정안을 반영한 공직선거법 처리가 시급하다. 이 외 여야가 합의해 본회의에 부의될 수순만 남겨놓은 법안이 북한인권법 등 37건이다. 또 여야 간 쟁점없이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는 법안도 67건에 달한다.
20대 총선을 불과 한달여 앞두고 9일 동안이나 국회를 마비시킨 필리버스터는 그 취지가 빈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여당이 조목조목 '테러방지법 Q&A'까지 준비해 진실 알리기에 나선 반면 야당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도 많다.
사실 필리버스터를 반대하는 야당 주장의 핵심을 요약해보면 ‘국가정보원에게 지휘권을 넘길 수 없다’이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해온 ‘무차별·무제한 감청’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지금 테러방지법안에는 국정원에 감청설비를 주는 통신비밀보호법을 바꾸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단지 ‘국정원장이 테러 관련 감청자료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대목이 들어갔을 뿐이다.
진정성 없는 여론몰이가 가져온 결과는 누가 말 안 해도 오는 20대 총선에서 가려질 것이다. 하지만 야당이 47년만에 부활시킨 필리버스터에서 나온 발언들은 또다시 ‘유령’이 되어 우리 사회를 떠돌 지경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 필리버스터가 야당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냈을지는 몰라도 상대편의 표를 가져오거나 중도의 표심까지 움직일 정도의 결과는 못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달 22~26일간 닷새 동안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25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더민주의 지지율은 26.7%로 그 전 주(26.7%)와 같았다. 새누리당이 1.8%포인트 오른 43.5%, 국민의당이 0.4%포인트 오른 12.1%, 정의당이 1.2%포인트 오른 4.7%를 기록한 것과 대비된다.
부동층의 표심도 못 움직인 데다가 오히려 여당 지지층들을 결집시키는 효과까지 낳았으니 국민 대다수는 총선을 불과 한달여 남겨놓고 여야 간 합의마저 깨는 야당의원들을 우려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리버스터의 타당성이 인정 안된 결과이다.
야당은 필리버스터 중단 선언마저 해프닝으로 이어갔다. 당초 이종걸 원내대표가 29일 밤 갑작스럽게 언급, ‘1일 중대발표’로 전해졌다. 하지만 1일 오전9시로 예정된 이 원내대표의 기자회견은 돌연 취소됐다. 이날은 97돌을 맞는 3.1절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후 야당은 3시간여의 격렬한 의원총회 끝에 2일을 마지막으로 필리버스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무도 자르지 못했다’는 야권 내 반발에 부딪친 이 원내대표는 마지막 주자가 되어 자신의 말처럼 “지쳐 쓰러지는 순간까지” 필리버스터를 끝낼 수 없었다.
그동안 필리버스터를 우려하는 여론 가운데에는 ‘그나마 장외투쟁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있었다. 이번에도 더민주당은 제1야당으로서 공신력 있는 대안 제시에 또 실패했고, 보기에 그저 그런 한편의 ‘감성몰이 이벤트’를 무사히 끝낸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