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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별세…빈소에 '조문 행렬' 이어져

2016-05-09 14:08 | 이상일 기자 | mediapen@mediapen.com
[미디어펜=이상일 기자]9일 일민(逸民)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틀째 이어졌다.

방 상임고문은 전날 오전 숙환으로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빈소는 상주인 방성훈 스포츠조선 대표이사와 사위인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 정연욱 경남에너지 대표이사 부회장 등이 지켰다. 

추모객들은 방 상임고문의 생전 웃는 모습이 담긴 영정사진에 헌화하고 묵념했다.

이날 빈소에는 오전 8시 30분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조문한 데 이어 오전 9시 이후 한국일보 승명호 회장과 이준회 사장, 김성윤 삼성전자 IP법무 전무 등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오후 6시부터 조문객을 받기 시작한 전날에는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 이인호 KBS 이사장, 한민구 국방부장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용학 연세대 총장, 정재철 새누리당 전 국회의원,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원희룡 제주지사, 윤세영 SBS미디어그룹 회장, 윤석민 SBS미디어그룹 부회장,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 이홍구 전 국무총리 등이 방문해 고인을 기렸다.

9일 일민(逸民)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는 고인을 애도하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틀째 이어졌다./자료사진=조선일보 제공

생전에 고인은 ‘언론인’보다는 ‘신문인’을 자처했다. 언론의 자유 및 언론사의 ‘재정적 독립’에 대해 강한 신념을 피력했다.

회고록에서 방 상임고문은 이와 관련 “재정적 독립 없이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어려웠고 정치권력과 싸우지 않고는 신문을 지켜낼 수 없었다”며 “재정의 독립과 권력과의 투쟁이라는 양면의 전선에서 하루는 웃고 하루는 우는 그런 시절을 살았다”고 언급했다.

‘신문인’ 방 상임고문은 형 방일영과 함께 조선일보를 ‘한국 제일의 신문’으로 만든 인물이다. 방 상임고문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여겨지던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에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손자다.

방 상임고문은 한국언론연구원 초대 이사장, 신문협회 부회장, 연세대 재단이사장, 한독협회 회장, 대한골프협회 회장,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70년)과 무궁화장(92년), 금관문화훈장(98), 독일 1등십자공로훈장(2001년) 등을 받았다.

방 상임고문은 재벌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조선일보를 만들기 위해 신문인으로 최선을 다했고 결과를 얻었다. 

1952년으로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했던 그는 사회부 및 경제부 등에서 8년간 기자생활을 한 뒤 본격적으로 경영을 하기 시작했다. 1962년 상무, 1963년 발행인, 1964년 전무 대표이사, 1970년 대표이사를 역임하면서 조선일보를 키우게 된다.

그는 조선일보 지면 혁신과 더불어 '월간조선', '월간 산', '월간낚시', '스포츠조선' 등을 잇달아 창간하거나 인수했다. 조선일보는 1992년에 이르러 국내 신문사 최초로 전국 동시인쇄망을 구축하고, 신문제작 전산시스템(CTS) 개발을 완료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10만부를 밑돌던 조선일보 발행 부수는 고인이 사장이 된 1970년 35만부를 기록, 1979년 100만부, 1991년 200만부를 넘어섰다. 방 상임고문은 조선일보의 사세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인은 2008년 55년 언론계 생활을 정리한 팔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펴내기도 했다. 책에서 방 상임고문은 “밤새 전쟁 치르듯 만든 신문이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매일 아침 언제나 가슴이 떨렸다”고 회고했다.  

방 상임고문은 “신문사를 경영하면서 권력의 간섭과 탄압에서 한시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지만 정작 두려운 존재는 역사와 독자였다”고 신문 인생을 추억했다.

[미디어펜=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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