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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백의 낚시여행]-갈치 아쉬움 뒤로 남해 돌문어를 찾아서

2016-07-28 18:21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하응백의 낚시 여행-남해 돌문어를 찾아서

하응백 휴먼앤북스 대표·문학박사

2016년 7월, 갑자기 전남 여수 해안에서 문어낚시가 붐을 이루고 있다. 갑자기 문어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주꾸미낚시처럼 계절이 오면 시작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주말이면 최신 시설의 20인승 대형 낚싯배들 100여 척이 문어를 잡으러 여수 인근 바다-돌산도, 금오도, 나로도-로 출조를 간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바로 갈치 때문이다. 정부가 올해부터 7월을 갈치 금어기로 정하자, 낚시꾼을 태우고 다녔던 갈치잡이 낚싯배들이 우러러 몰려든 것이다.

원래 여수, 통영, 완도 등에서 먼바다로 갈치를 잡으러 다니는 배들은 6월부터 12월 정도까지는 갈치잡이, 1월에서 4월 정도까지는 열기나 볼락, 5월에서 7월까지는 상황에 따라 한치나 오징어, 볼락, 우럭 등등을 잡으러 다녔는데, 갈치 시즌이 시작된 7월에 갈치를 잡지 못하자 마침 문어를 간판 대타로 내세워 출조하게 된 것이다. 금어기면 잡지 않으면 된다, 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낚싯배 선주들도 배가 생계수단이다 보니 한 달을 마냥 놀 수가 없어 경쟁적으로 문어잡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문어낚시는 동해나 남해안에서 간간히 해 왔었다. 동해안에서도 문어낚시가 이루어지지만 조과가 들쑥날쑥하고, 많이 잡아야 두어 마리여서 전문적인 낚시 대상어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남해는 이야기가 다르다. 흔히 동해에서 잡히는 문어를 피문어라 하고 남해에서 잡히는 문어를 돌문어라 한다(학술적으로는 문어와 왜문어로 나누지만 시장에서는 피문어와 돌문어다.

큰 녀석들은 대개 동해산 피문어이며, 피문어가 다리가 길다. 남해산 돌문어는 상대적으로 다리가 짧고 대개 1년생이라 한다). 남해의 문어낚시는 마릿수 재미가 있고, 낚시 기법이 점차로 개발되면서, 그리고 그 맛으로 인하여 금방 인기 낚시 대상어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7월 2일 장마철 한가운데에 여수로 출조하여 씨알은 작지만 25마리의 문어를 잡았다. 

잠시 비가 그친 틈. 여수 인근 바다에 문어 낚싯배들이 즐비하다.


여수 돌산도와 화태도를 잇는 화태대교 아래를 지나는 낚싯배. 요즘 연육교가 많이 생겨 섬과 섬이 만나 사랑을 나눈다.


문어 25마리면 적은 양이 아니다. 친구를 꼬드겨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된 7월 23일 다시 여수로 출조했다.

아침 5시 30분 여수 소호동을 출발한 배는 냅다 나로도 쪽으로 달린다. 1시간여를 갔을까? 선장의 신호에 따라 채비를 내린다. 문어 채비는 물때에 따라 다르지만 사리물 때는 30호 정도, 조금 물때는 20호 정도 봉돌에 에기 2개나 3개를 달아 바닥에 내리면 된다.

통통통 고패질을 하거나 물 흐름이 강할 때는 봉돌을 굴리듯이 흐름을 타게 하면 된다. 그러나 뭔가 걸렸다는 느낌이 들면 강하게 챈 다음, 일정한 속도로 릴링을 하면 된다. 이게 말은 쉽지만 정작 해보면 그렇게 쉽지는 않다. 11물이라 물 흐름도 강하고 물색이 탁해 문어가 잡힐 것 같지 않다. 여러 번 포인트를 옮겨도 배 전체에서 문어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배는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를 나로 2대교 밑으로 간다. 물살이 빠르다. 채비가 심하게 흘러가는 순간 뭔가 턱하고 걸린다. 힘차게 잡아챈다. 묵직한 녀석이 딸려 올라온다. 3주 전보다 많이 자라 있다. 문어 한 수를 하고 나니 또 입질이 없다. 내가 못 잡는 것도 그렇지만 같이 산 친구가 잡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한다.

천리 먼 길 왔는데 못 잡고 가면 서운할 것은 자명한 일. 그런 잡념에 빠져 있는데 친구가 채비를 끊어 먹는다. 원줄이 통째로 끊어졌다. 주꾸미를 잡으려고 감아 놓은 친구의 1.5호 합사 원줄이 문어 낚시에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4호 합사 원줄이 감긴 내 낚싯대를 주고 나는 예비로 가져온 좀 둔탁한 낚싯대를 새로 세팅한다. 그랬더니 친구가 한 마리를 올린다. 다행이다 싶은데 연거푸 두 마리를 올린다.

드디어 첫 수를 낚아 올린 친구 권재배 군.


나의 낚싯대에는 감도 오지 않는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더니 출출하다. 사무장에게 한 마리를 데쳐 달랐더니 점심 준비를 해야 되어서 안 된단다. 하는 수 없이 친구가 잡아 놓은 작은 문어 한 마리를 회를 친다. 문어숙회야 다들 먹어 보았겠지만 문어회는 못 드셔보았을 것이다. 그 맛도 상당했다. 다만 문어 흡판의 빨판 기능이 너무 강해 나무젓가락으로 임시 도마에 붙은 녀석을 떼기가 힘들었을 뿐이다.

문어회를 즐기는 두 잡인.


다시 낚시는 소강 상태에 들어간다. 옆에서 낚시하는 현지꾼이 무엇을 잡았는지 용을 쓴다. 5분여를 버티고 있는데도 올라오지를 않는다. 나는 그의 채비가 바닥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줄을 끊어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다. 대물 문어가 잡혔다는 것이다. “니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한 번 해 보자”를 선언하더니 계속 버틴다.

하지만 배낚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배를 이동시켜야 한다. 선장이 그에게 줄을 잡고 끌어 올리라고 한다. 현지꾼은 낚싯대를 잡고 나는 그를 도와 줄을 잡고 끌어 올린다. 묵직한 것이 달려 있다. 만약 이것이 문어라면 5킬로는 넘을 것이다. 그런데 채비에 달려 온 것은 통발이었다.

채비에 걸린 통발, 통발 속에 문어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현지꾼은 버틴 덕뿐으로 문어 한 마리를 간접적으로 잡았다. 폐통발 안에서 고립된 문어 녀석은 구조된 셈이기는 하지만 곧 꾼의 저녁 식탁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는 또 소식이 없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지루한 낚시가 계속 된다. 배는 여기저기를 옮겨 다닌다. 나로도를 벗어나 반대편 해안 쪽으로 간다. 멀리 고흥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문어 통발을 걷는 어부가 보인다. 그는 낚싯배들이 오건말건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잡업을 한다. 밧줄에 통발을 수십 개 달아 바다에 가라앉혀 놓았다가 배의 동력을 이용해 통발을 끌어올린 다음 통발 안에 문어가 있으면 잡는 어로 방식이다.

혼자서 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조업이란 생각이 들지만, 어부 본인은 생계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어부가 참 착하다. 자신의 어장에 대형 낚싯배 여러 척이 나타나 자신의 생계인 문어잡이를 하면 화를 낼만도 한데, 묵묵히 조업만 한다.

오히려 우리 배 선장에게 한 지점을 알려주면서 저쪽으로 가보라고까지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그쪽에서는 문어가 몇 마리 올라오기도 했다. 7월 갈치 금어기로 인해 나로도의 한 어부, 나아가 문어조업을 하는 남해의 많은 어부가 피해를 입는 것이지만 그들은 묵묵하게 자기 일만 한다. 체념인지 달관인지. 하기야 바다는 넉넉하고 화를 내어보아도 뾰족한 수도 없을 것 같다.
 

혼자서 문어 조업을 하고 있는 어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초기에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진상품 목록 중에 문어가 단골로 등장한다. 수십 차례 이상 마른 문어를, 많을 때는 1000 마리씩이나 바쳤다. 1430년(세종 12년) 1월4일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진헌하는 문어(文魚)가 정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감사 홍여방(弘汝方)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문어 때문에 종이품 벼슬이었던 감사(관찰사)가 파면된 것이다. 그러니 문어가 나는 각 지역의 수령들은 어부들을 얼마나 닦달했을까? 문어잡이는 어부들의 노역의 역사이기도 하다. 16세기에 들면 건문어를 중국에 더 이상 진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신 생문어를 궁중에 바쳐야 했다. 주로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의 피문어를 바쳤는데, 육로로 생문어를 수송하는 것이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1515년 중종 10년 좌의정 정광필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함경도의 진상이 모두 역로를 경유하여 수송되기 때문에 더욱 잔폐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폐해가 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생문어(生文魚)의 진상입니다. 겨울철에는 관계없지만 여름철에는 얼음에 채워 오더라도 부패하여 쓰지 못합니다. 청컨대 3월에서 8월까지는 견감함이 어떠하리까?

쉽게 설명하면 생문어는 여름철에 얼음에 채워 함경도에서 서울까지 수송을 해야 하는데 그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니 여름철에는 진상을 면제해달라는 말이었고, 임금은 이를 허락한다. 이래저래 문어 때문에 일반 백성의 고통은 극심했던 것이다.
 

과거야 어쨌건 낚시꾼은 문어를 잡는다.


배 전체가 조용하더니 물돌이 시간이 되자 여기저기서 문어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둔탁한 낚싯대를 초릿대가 예민한 참돔대로 바꾸어 다시 낚시를 시작한다. 연이어 두 마리를 올린다. 씨알이 상당히 좋다. 큰 녀석 두 머리를 잡으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눈을 들어 멀리 풍경을 본다. 바다 너머 고흥반도의 이어진 산들이 보인다. 섬에서 한 모퉁이만 돌면 나로도 우주센터이기도 한 섬에서 우주센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물론 없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 있는 곳이 고흥반도이다.


친구에게 인증샷을 부탁한다. 낚시는 모름지기 잡으면 즐겁고 못 잡으면 우울하다. 특히 남보다 못 잡으면 더 우울하다. 문어 두 마리가 뭐라고 이렇게 즐거워할까?

씨알 좋은 문어 두 마리를 잡고 희희낙락.


일찍이 문어 두 마리 때문에 고초를 치른 사람이 있었다. 세종 때 좌의정까지 지낸 신개(申槩)라는 분이 그 주인공이다. 세종 때 강원도 고성 수령을 지낸 최치(崔値)의 비리를 수사하다가 당시 대사헌이었던 신개에게 문어 두 마리를 주었다고 최치가 실토를 하는 바람에 난리가 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문어를 뇌물로 사용했던 것인데, 결국 신개는 받지 않았고 신개의 하인이 받은 것으로 판명이 나서 세종은 신개를 처벌하지 않았다.

문어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역사적으로 꽤 말썽 많았던 어족이었다. 모두 그 맛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날 문어는 조금밖에 잡히지 않았다. 친구가 네 마리, 내가 다섯 마리, 그것이 전부였다. 배에서 가장 많이 잡은 사람은 열 마리였다.

7월 한 달간 여수의 갈치배들이 워낙 많이 잡아내기도 했고, 또 사리 물때의 연장인 11물이어서 물색이 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섯 마리 그 귀한 그 문어에게, 미끼통에 바닷물을 담고 기포기를 달아 산소를 공급하여, 서울까지 살려서 가지고 왔다. 그 다음은? 아래 사진을 참조하시라. /하응백 휴먼앤북스 대표·문학박사
 
(500g 이하의 문어를 삶는 법. 바닥에 무나 양파를 깔고 물 없이 삶는다. 문어와 야채에서 나오는 물로 충분히 익는다.)

500g 이하의 문어를 삶는 법. 바닥에 무나 양파를 깔고 물 없이 삶는다. 문어와 야채에서 나오는 물로 충분히 익는다.


문어숙회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좋고.


참기름이나 들기름 소금에 찍어 먹어도 좋다.


[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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