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35)-임진왜란으로 찢긴 선비의 삶
강 항(1567~1618) 『간양록』
임진왜란은 조선 백성의 삶과 국토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궁궐과 가옥은 불타고 전답은 황폐해졌다. 왕후장상에서부터 이름 모를 백성에 이르기까지 자식과 생이별하거나 참혹한 죽음을 맞지 않으면, 깊은 산속에서 가혹한 피난살이를 하거나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이국땅을 정처 없이 떠돌아야만 했다. 환란의 고통은 다양했지만 왜적에게 침탈당한 백성이 겪은 수모와 치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양록(看羊錄)』은 왜군의 포로가 되어서 죽지도 못하고 일본 땅으로 끌려가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다가 생환된 전라도 선비 강항(姜沆) 선생의 환란 체험의 기록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선조 때인 1596년에 형조 좌랑을 지낸 후 고향 영광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 시 남원의 방어를 위한 군량미 운반 소임을 수행하다, 남원 함락이후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가 왜군의 포로가 됐다.
이 책에는 그가 일본에 끌려가서도 조선을 걱정하는 우국충정의 언행과 노고가 담겨있다. 그는 적진의 고통스런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일본의 정치 사회상과 국익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을 낱낱이 기록하여 비밀리에 조선 조정으로 보냈다. 강항은 잡혀있는 동안에도 수차례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포로생활 4년 만에 간신히 도망하여 대마도를 거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는 피왜(被倭)의 고난 속에서 늘 싸우다 죽지 못하고 포로가 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자책했다. 선조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도 살아있는 한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거듭 다짐하는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이 책은 본래 『건차록(巾車錄)』이라 이름 지었다. 죄인이 타는 수레를 뜻하는 '건차'로 책명을 짓게 된 것도 죄인을 자처한 그의 심정을 대신한 것 같다. 그가 왜국의 속사정을 성심으로 탐문하고 왜인들의 흉계를 간파하고자 했던 이유도 구차히 살아남은 죄를 조금이나마 덜고자 한 그의 애틋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강항은 일본 66주 전역의 지역별 특성을 상세히 기록하기도 하고, 군사의 규모와 주요 장수들의 특징적 이력과 군대의 통솔체계 등을 관찰하고 꼼꼼히 서술했다. 특히 조선과 달리 봉토를 가진 영주들이 자기 백성들을 직접 군사로 통솔함으로써 지역 방어에 애착을 갖도록 하여 수시로 일어난 전쟁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체계를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비해 당시 조선의 군대 운영 체계는 한심했다. 한 고을의 백성들이 절반은 순찰사에게 속하고, 절반은 절도사에게 속하기도 했다. 아침에는 순찰사에 소속되었다가 저녁에는 도원수를 따르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의 장수들에게는 자기 직속 군대가 없었고 졸병에게도 통솔자가 일정하지 않아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강항은 이러한 조선군대의 구조적 맹점을 예리하게 비교하여 지적하면서 군대의 편성과 지휘체계의 획기적 개선을 선조에게 건의했다.
그는 지방 수령과 지휘관들의 잦은 인사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뚜렷한 잘못이 없는 이순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원균으로 하여금 삼도수군을 통제케 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고 진언한다. 나아가 한산도가 무너져 호남지방이 유린당한 것도 무능력한 지휘관의 배치에 한 원인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호남과 영남의 변장(邊將)은 무신과 문신을 가리지 말고 왜군과의 실전에서 공을 세운 역량 있는 담대한 인물로 배치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왜군의 화평 요청을 거절하고 육군은 왜군의 퇴로를 끊고, 수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왜군을 괴롭히고, 빠져나가는 왜적을 대마도로 몰아세워 철저하게 소탕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의 성곽 특징과 방어 방식을 비교하여 조선의 산성을 활용한 전략의 제안이나, 일본 귀순병을 죽이지 말고 후하게 대우하고 회유하여 왜적의 정보를 취득하고 적진을 교란하는 데 활용하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책도 귀담아 들을만하다. 또한 국방정책에서 북쪽 변방만 중시하고, 영남과 호남을 소홀히 한 경남중북(輕南重北) 정책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조선 국방의 취약점을 잘 간파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강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백성의 코와 귀를 베어와 산더미같이 쌓아놓은 동포의 참변에 대해 분노한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변이 터질까 두려워 발상(發喪)을 꺼린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에 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배가 갈리고 소금으로 채워져 관복을 그대로 입혀 위장되었던 일을 기술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죄악이 그대로 자신에게 업보로 돌아간 일임을 상기시킨다.
한번은 강항이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전에 구경갔다가 왜승 남화(南化)가 문 위에 “대명일본에 일세를 떨친 호걸, 태평 길을 열었으니 바다는 넓고 산은 높다”라고 써 놓은 것을 보고, 붓으로 문질러 버리고 그 곁에다 조롱의 시를 써 놓는 일도 있었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十層金殿)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것인가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
강항이 적국의 심장부에서 대합의 총전(塚殿)을 능욕하는 기개를 통해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품은 적개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왜인들은 이런 강항을 흉노에 붙잡혀 굴욕을 받아 가면서도 절조를 굽히지 않았던 한나라 소중랑(蘇中郞)에 비유하여 칭송했다. 강항은 왜국에 붙잡혀 있는 동안 적국의 정세를 탐색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유학적 지식과 시재(詩材)로 많은 왜군 장수와 승려들을 감화시켰다. 또 붓글씨 작품을 팔아 은전을 벌어 은밀하게 탈출할 배를 구입하는 비용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강항의 환란 기록은 왜란 당시의 일본의 정세와 생활상을 폭넓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료다. 왜국의 내밀한 강점과 취약점을 포착하고 이에 대응한 조선의 국방 방책을 고민한 또 다른 징비록(懲毖錄)인 셈이다. 『간양록(看羊錄)』이 일제시대에 일본경찰에 의해 모조리 불태워지는 화를 당하고 역자인 이을호 선생이 간직해 온 원본이 유일본으로 남아 오늘날 번역되어 다시 살아난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간양록(看羊錄)』, 강항 지음, 이을호 옮김, 서해문집(2011, 3쇄), 236쪽.
[박경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