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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단장 고전특강(172)-감성을 필치로 그리스 문명을 재해석하다

2017-06-17 09:1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72)-그리스 문명의 발흥과 융성, 그리고 그림자
앙드레 보나르(1888~1959) 『그리스인 이야기 1』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1888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난 앙드레 보나르는 로잔 대학의 교수로 평생을 그리스 연구에 천착하면서 그리스 문학과 문명을 조명하는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리스인 이야기>는 그리스의 역사, 신화, 문학, 건축, 과학, 종교, 철학, 정치를 예리한 통찰과 따뜻한 감성으로 집대성한 책이자, 그리스 문명사 분야의 세계적인 현대 고전이다.  

로마 역사를 편년체로 흥미롭게 엮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시리즈도 재미있지만, 그리스 문명의 전 분야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격과 깊이가 다르다. 이제부터 3권으로 묶인 1,500여 페이지 갈피갈피에 숨겨진 보물찾기에 나서자. 

앙드레 보나르는 간결하면서 스피디한 문장으로 고대 그리스 세계를 생동감 있게 살려낸다. 문학교수답게 다양한 인문적 통찰로 그리스 문화와 역사, 정치 속에 숨은 의미를 정확히 포착해 낸다. 대중을 위한 문명 비평서로 더 없이 탁월한 저작이다. 제1권은 그리스 문명의 시원이 되는 기원전 2천년 경부터 5세기 말기의 대정치가 페리클레스가 활약하던 시대까지 다룬다.   

앙드레 보나르는 호메로스의 불멸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깃든 휴머니즘을 해석하고, 아르킬로코스와 사포 등 시인들의 작품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의 교감과 서정을 읽어낸다. 또 정치가 솔론의 정치 개혁과 그의 철학을 소개하고, 이어 아테네의 영광과 제국화의 암운을 동시에 만든 페리클레스의 정치 역정을 그린다.   

또한 그리스 세계에서의 노예제와 노예와 다름없던 여자들의 억압된 삶에서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그늘을 이야기한다. 아울러 그리스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그리스 신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신과 인간의 대결과 교감을 다룬 비극의 탄생을 추적한다.  

앙드레 보나르는 그리스 문화에 스민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인에게 항상 우호적인 것도 아니다. 그는 그리스 문명의 핵심에 깊숙이 들어갔으면서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하여 독자로 하여금 일상으로 굳어져 온 그리스에 대한 맹목적 의식이나 통설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스인 역시 먼 고대엔 원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맞다. 그리스 문명 역시 야만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하나하나 만들어 낸 문명의 모습은 사실 자연에 맞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의 소산이다. 저자가 그리스 문명의 목적을 "자연에 맞서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것,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한 이유다.   

그리스인들은 본디 우랄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의 평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인도유럽어족의 종족이었다. 그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이들 중 일부가 그리스 땅과 동지중해 지역으로 남하해 온 것이다. 바위투성이의 척박한 땅과 농사라고는 몰랐던 낙후된 기술을 가진 그들은 생존을 위해 바다로 나아갔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에게 해의 점점이 흩어진 섬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 지방과 시켈리아 등 지중해를 안마당 삼아 누비면서 여러 지역에 식민도시를 만들며 거대한 그리스 문명 세계를 만들어냈다.
 
저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역시 그리스인들끼리의 약탈적 생존 경쟁의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아테네 등 그리스 본토에 있던 도시들이 밀 등 식량을 구하기 위해 흑해로 진출해야 했고, 트로이는 흑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다른 국가들의 통행을 제약하고 약탈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이 왕으로 있던 미케네와 본토의 도시국가들이 뭉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다시 말해 트로이 전쟁이 단지 파리스와 헬레네의 스캔들에서 비롯된 것만은 의미다. 오히려 헬레네의 로맨스는 그리스 남성들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명분을 위한 장치인지도 모르겠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호메로스는 구전되어온 여러 일화를 수집하여 풍성한 형용사와 생생한 운율로 신과 인간이 어우러져 싸운 전쟁을 아름다운 서사시로 재탄생시켰다.   

저자는 <오뒷세이아> 또한 그리스 세계의 전래동화의 모티브를 차용한 작품으로 본다. 그리스인들이 바다를 개척하면서 겪게 되는 도전과 좌절의 역사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뒷세우스가 보여준 모험은 그리스인의 생존의 터전이었던 바다에 대한 꿈과 투쟁의 기록이었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바다의 유혹과 혹독한 위험을 이겨낸 오뒷세우스의 모습에서 유목민에서 뱃사람으로 운명이 바뀐 낯설고 미약한 자신들의 역할 모델로 여기지 않았을까. 저자가 파악한 <오뒷세이아>의 함축적 의미가 그리스인들이 왜 그렇게 <오뒷세이아>를 애독했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오뒷세이아>는 그리스인들의 꿈이자, 희구하는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오뒷세이아>는 이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한 뱃사람들의 이야기다.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헤엄치는 법을 배우는 그리스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오뒷세이아>다. 아이들은 글도 <오뒷세이아>로 배운다. 읽고 암송하면서 저절로 글을 읽힌다.  

<오뒷세이아>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민족의 시다. 바다를 처음으로 알게 되기까지 그들이 겪었던 일들의 기록이다. 꿈과 투쟁의 기록이고, 지침서다. 호기심에 가득 찬 용감한 사람들은 오뒷세우스를 흉내 내며 바다로 떠났다. <오뒷세이아>라는 안내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고 나서 불과 몇 백 년 안에 지중해는 그리스 민족의 호수가 되었다. 요지를 장악했고 중요한 길목도 죄다 확보했다. 그렇다. 그리스 민족의 시는 읊조리고 마는 시가 아니다. 시 자체가 하나의 생생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던 자들도 들썩이게 하는 힘으로 가득하다."   

그리스인들은 유달리 신을 경배했다. 그들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모든 현상과 물체에서 신을 보았다. 그리스 종교는 인간의 초자연적인 경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필멸의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신을 인식하고, 삶의 모든 여정에서 신의 가호를 기대했다.   

호메로스는 서사시를 통해 신과 신을 닮으려는 영웅을 노래하고, 아이스퀼로스는 비극을 통해 신과 인간의 대결과 교감을 보여주려 했다. 비극이 비극인 이유는 인간이 신에게 무모하게 대항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에게 한계를 재인식시키고, 인과법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의 초월적 힘을 절감하게 만든다.   

앙드레 보나르는 그리스 비극이 관객들에게 비극의 주인공들이 운명에 대적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으로 대변되는 운명에 맞서도록 고무한다는 점에서, "시민을 더 나은 사람으로 교육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해석한다.   

특히 정치적 평등과 사회 정의를 위해 억압과 싸우라고 부추긴다는 점에서 단순히 드라마를 넘어 혁명적 자세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의 해석을 곱씹어보면, 왜 그리스 시민이 그리스 비극 경연대회에 그토록 열광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민주주의적 발상과 이념을 꺼지지 않게 한 풀무였던 셈이다.  

앙드레 보나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그리스의 영광과 모순,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그는 독자들을 아름다운 서정시를 읊은 인류 최고의 여류시인 사포에게 인도하다가,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그리스 여성들의 암울했던 삶과 마주치게 한다.  

그는 그리스 노예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그리스 노예제도를 "암 덩어리"라고 표현했다. 인류에게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물려주었지만, 그리스 세계를 실질적으로 떠받친 노예와 여성이 소외된 불완전한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당시 지구상의 어떤 종족도 상상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를 고안해 냈다는 점에서 그들의 위대성은 결코 폄훼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현대 국가가 보편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씨앗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리스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스 사회가 풍족해지면서 나타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계급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솔론은 아테네의 정치체제와 사회제도를 혁신했다. 솔론은 못가진 자에 대한 인간애와 중용의 인격을 갖추었고, 시민과 귀족들 양쪽으로부터의 비판에도 굴하지 않을 만큼 뚝심도 있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선의에 기대지 않고 합리적 제도로 사회를 재설계하려 했다. 솔론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토대를 확고하게 정립했다. 이는 훗날 페리클레스가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빛낸 그리스의 영광 속에는 몰락을 예비한 허점 또한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지능과 웅변, 애국심, 성실성 같은 탁월한 덕목으로 아테네를 그리스 최고의 번성한 도시국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애국심은 다른 도시국가에 제국주의 행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페리클레스가 부모 모두 아테네 시민일 경우에만 그 자식에게 시민권을 주도록 입법함으로써 극소수의 시민권자에 의한 민주주의라는 근본적 제약을 낳았고, 이 점이 도리어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를 통일된 대 제국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이유가 바로 아테네의 편협한 국수주의에 의한 제국적 행태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가 국력을 확장하면서 시민권 부여를 통해 이탈리아의 다른 부족과 이민족을 포용해 나감으로써 궁벽한 소도시에서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점과 대비된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그리스인 이야기』제1권, 앙드레 보나르 지음, 김희균 옮김, 강대진 감수, 책과 함께(2011, 2쇄), 363쪽.




[박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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