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21일 자유경제원 주최로 열린 자유주의 정책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이영훈 서울대경제학부 교수가 지난 21일 자유경제원이 개최한 <자유주의가 왜 경제성장을 가져 오는가>라는 정책토론회에서 <한국 자유주의 역사>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한국은 자유주의 이념이 아직 착근되지 못하고 있으며, 건국헌법에서부터 민족사회주의적인 이념이 강하게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건국헌법에 재산권을 보장한다고 해놓고선 공공복리등을 위해선 재산권을 제한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재산권 보장을 안했다는 것이다. 평등을 위해선 정부가 개인의 재산과 시장에 대해 규제와 개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당연한 도덕적 책무로 간주한 것도 국가우위의 시장경제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국가주의 시장경제는 87년 헌법에 경제와 시장에 대한 규제와 개입을 명문화한 경제민주화조항으로 이어졌다.
더욱 큰 문제는 초등학교에서 자유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점. 바른생활 근면 성싱 등 도덕적 생활을 강조할 뿐, 자유가 왜 중요한지, 국가라는 개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기술한 교과서는 전혀 없다. 철저하게 탈 정치적, 탈국가적이다. 통일문제도 심각하다. 남북한 대립을 가족간 대립처럼 보고, 민사상의 분쟁문제로 보고 어서 가족끼리 합쳐야 한다는 수준의 내용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반위에서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마저 전교조 등 좌파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러나 있다.
다음은 이영훈 교수의 주제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A. 이종은, 『평등·자유·권리』, 책세상, 2011.
근세 서유럽의 자연법은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그 원초적 자연 상태에서 자유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신체의 자유와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상이다. 동양에, 중국에 이 같은 사상은 있었는가.
서양의 중세에서 자연계를 관장하는 영구법과 인간사를 관장하는 자연법은 구분되지 않은 채 혼연일체로 통일되어 있었다. 근세 이래 영구법과 자연법은 분화되기 시작되기 시작하였다. “갈레노스, 울피아누스 및 데오도시우스 법전의 시대와 케플러, 보일 시대 사이에 만인에게 공통된 자연법의 개념과 비인간적인 사물 모두에 공통되는 일련의 자연법칙의 개념이 완전히 분화되었다”(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중국에서는 이러한 분화가 없었다. 애당초 중국에서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서양의 개념이 쓰인 적이 없었다. 중국의 사고체계에는 우주의 입법자가 상정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자연의 질서가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니다. 다만 어느 누구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사물의 창조에는 주인이 없고 모든 사물이 스스로를 창조한다”고 여겼을 뿐이다. 우주의 조화는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가 스스로의 내적 본성에 따라 일어나는 자발적 협동 작업에 의해 일으켜지는 것이다.
이렇게 창조된 것이 아니면서 자급자족적인 우주를 니덤은 우주에 대한 유기체적인 개념이라 칭하였다. 중국인은 이 개념에 의해 지배되었다. 요컨대 모든 존재는 우주적 형태를 형성하는 전체의 위계에서 부분을 이루고, 각 존재는 부분으로서 자신의 본성이 내리는 내적 명령에 복종하기 때문에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니덤은 중국인들이 숭상하는 예(禮)라는 것이 서양의 자연법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인들은 실정법의 엄격성보다 예가 지닌 유연하고 인간적인 관계에 더 호감을 가졌다. 권리를 보장해 주는 주된 방법은 실정법이라기보다 실정화되기 어려운 예나 도덕이었다. 요컨대 법으로 세세한 것을 규제하기보다는 좋은 관습, 즉 예라는 제방을 튼튼히 함으로써 제방이 물이 넘치지 않게 방지하는 것처럼 예가 백성을 타락에 빠지지 않게 방지해 준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예와 법은 구분되었으며, 자연법이란 것이 있었다면 예가 거기에 해당한다. 우주, 자연, 사회에 대한 질서 감각이 이러했던 한, 그 보편적 조화=위계의 체계에서 독립한 개인, 그의 자연법적 권리로서 자유라는 개념은 중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B. 존 킹 페어뱅크, 『신중국사』, 까치, 1994
서구에서 시민사회는 봉건제에서 독립하여 도시가 성장하면서 출현하고 발전한 민주적 형태의 사회이다. 그것은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적이고,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으며, 시민의 자유가 법의 우월성 아래 보호되는 다원주의적 사회이다. 이러한 시민사회는 이슬람사회에서도 전통시대의 중화제국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후기 중화제국에서는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난 제도, 기능, 직업이 창출되는 경향이 출현했다. 그것은 신사층의 활동이 사회의 공공영역에서 증대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율은 통일과 질서를 항상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배자들은 인민의 생활을 광범하게 국가가 감독함으로써만 통일과 질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개인적인 자율 또는 자유주의와, 국가가 강요하는 통일과 질서는 항상 대립하는 존재였다. 중국적 사고방식에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보다 큰 집단성을 위해서 엄격하게 제한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청조 말기 중국인들은 유교를 포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의 모델에서 과거의 중국적 가치를 재확인하려고 했던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유명한 장지동(張之洞)은 “중학(中學)을 예(體)로 삼고 서학(西學)을 용(用)으로 삼는다”(중체서용, 中體西用)고 했지만 이것은 조리가 맞는 말이 아니다. 체(실체)와 용(기능)은 어떤 단일한 실재의 서로 관련된 측면이다. 중학(中學)과 서학(西學)은 각기 다른 체용(體用)을 가졌다. 그럼에도 이 말은 널리 사용되었으며, 중국적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하면서 서구 학문을 단순한 도구로만 간주하게 만들었다.
▲ 대한민국 건국세력과 산업화세력을 긍정적으로 기술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
중국에 수입된 개인주의, 국가지지 수단으로 활용돼
중국에 수입된 개인주의의 개념도 마찬가지 변형을 겪었다. 개인주의를 중국에 소개한 중국의 개혁적 지식인들은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는 수단으로서 개인주의 사상을 옹호하였다. 가장 큰 영향력의 양계초(梁啓超)도 국가를 부유하고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 각 개인이 사심 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킨다는 개념을 권장했다. 이 같은 국가주의적 관점에 이어지는 것은 모든 종류의 권리가 국가에 의해서 허용된 것이라든가 아니면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그것을 제한할 수 있다는 관점이었다.
중국에서 서구적 형태의 자유주의는 결국 함께 왔던 불평등조약체제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았다. 중국적인 시민사회의 번영은 부분적으로는 서구적 제도를 모델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중국의 새로운 민족주의가 일어날 수 있도록 자극한 제국주의 바로 그 자체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근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권위주의적 집단주의와 시민사회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사이에서 중간점을 찾는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과업을 떠맡았다.
근대지식인, 집단주의와 시민사회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중간점 찾기 부심
중국적인 시민사회를 창출하려는 자유주의적 노력은 마치 생물 실험실 세균배양액의 넓은 표면에서 여기저기 생겨나는 포자(胞子)와 같은 성장점들 같았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여러 창조적 개혁가 집단 –사회, 과학, 의학, 대중교육-은 자신들의 작업을 대다수 중국 민중에까지 확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중의 문제는 너무나 거대한 것이었으므로 결국 국가만이 그것을 떠맡을 수 있었다.
C. 이영훈, 「20세기 대전환의 한국사적 조건」,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시대정신(時代精神)』46, 51, 2010, 2011.
조선성리학이 정치와 문화에 절대적 지배력을 행세한 17~19세기의 공사(公私) 관계를 검토하면 그것이 두드러지게 관념적이고 윤리적이었다는 특질을 발견한다. 예컨대 조선성리학의 세계에서 공은 공리(公理)로서 자연과 인간사회의 생성과 운동을 관통하는 근본 원리에 해당하였다. 반면 사라 함은 사욕(私慾)으로써 어디까지나 공리에 의해 억제되고 순치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설정되었다. 공이 선이라면 사는 악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성리학의 교의에서 인간 욕망의 자연성에 바탕을 둔 자립적 개체로서 사(私)의 존재는 끝까지 긍정되지 않았다. 공과 사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전자에 의해 후자는 소멸되어야 하는 이공멸사(以公滅私)의 관계였다.
19세기까지 조선성리학의 공사관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공과 사의 상하 위계질서이다. 공리를 터득하고 실천하여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군자로서 임금이고 양반이고 관료이고 어른이고 선배이다. 공의 질서나 권위는 이 사람들에 의해 담당된다. 반면 사욕에 사로 잡혀 도덕적으로 미완성이나 실패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신하이고 상놈이고 농민이고 어린이고 후배이다. 사에 속하는 이 부류의 사람들은 공을 섬기고 공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조선성리학의 공사관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공을 구성하는 권위가 상호 충돌하게 되면, 예컨대 부모에 대한 효와 임금에 대한 충이 우선순위를 다투는 갈등이 발생하면 언제나 효가 충보다 우선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17세기에 유명한 예송(禮訟)이 두 차례나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임금은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여부였는데, 그렇다고 주장한 쪽이 결국 패하여 나중에 사약까지 받고 말았다. 이후 효의 윤리가 충을 제압하면서 19세기말까지 부동의 헤게모니를 차지하였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1908년 조선왕조가 패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13도의병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이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그 합리성이 이해될 수 있다. 또 한 가지. 왕조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기호(畿湖)에 군림한 노론(老論)의 명문 송씨(宋氏) 가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 가문과 대립해 온 인근의 윤씨 가문에서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조상이 송씨 가문의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성리학의 사회·정치철학에서 자립적 개체로서 사의 존재는 끝까지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러했던 한, 개별 사의 총화로서 공의 세계는 끝까지 미출현이었다. 사를 규정한 최고 도덕으로서 효는 인간들을 가문 단위로 분립케 했다. 조선성리학의 세계에서 가문을 초월하는 더 크고 높은 공의 세계로서 사회나 국가는 닫혀 있었다. 사람들은 가문이나 동향이나 동학의 인연을 벗어난 이방의 세계에서는 마치 쟁반 위의 모래알처럼 분산하고 대립하였다.
D. 이나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 2001.
한국에서 자유주의 이념이 도입, 소개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독립협회 운동에서였다. 독립신문에 실린 여러 계몽적 논설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그들은 유교에서 경시되었던 이익의 개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상업의 중요한 역할을 재평가하고, 개인의 생명권, 재산권, 자유와 같은 기본 가치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양반제도에 의한 백성의 재산권과 생명권에 대한 자의적 침략에서 찾았다. 독립협회는 진정한 독립은 민족 독립에서 나아가 개인의 독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점에서 독립협회는 서유럽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매우 순수하게 수용하였다.
그렇게 성립한 초기의 자유주의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후 일제하에서 친일 인사가 되었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이념이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와 친화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이념은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의 요소를 안고 있다. 자유주의는 인간 이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세계사를 이성과 반이성, 문명과 야만의 대립적 기준으로 이해하고, 전자의 후자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그에 따라 초기의 자유주의자들은 일제의 지배라는 현실을 기꺼이 수용하고 그에 협조하였다. 예컨대 일본과 같은 문명화된 국가의 지배를 받는 것이 조선인에게는 보다 유익한 일이라고 간주하였다.
초기의 이러한 한국 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유산은 권위주의이다.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초기 자유주의의 반민중적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차이가 있다면,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을 가장 우선시하며, 박정희의 자유민주주의는 조국근대화를 위한 ‘의무와 책임’을 중시한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자유주의 역사는 반민족적, 반민중적, 권위주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과정이었다.
E. 박명규, 『국민, 인민, 시민 –개념사로 본 한국의 정치주체-』, 小花, 2009.
한국에서는 전근대시대부터 시민이란 개념이 사용되었고, 이 개념으로 지칭되는 특수한 사회집단이 존재했다. 이 단어는 시(市)의 민(民)이라는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곧 시의 각종 활동에 참여하는 특수한 직역의 사람들, 곧 서울의 상인층을 지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이라는 위계가 작동하였으며, 이에 시민은 그리 존경 받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시민은 종종 수탈과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점에서 서구의 부르주아적 성격, 즉 정치적 자립성과 자율성이라는 점에서 크게 미치지 못하는 속성을 지녔다.
동양에서 서구사상에 바탕을 둔 개념어로서 시민이 번역어로 처음 등장한 것은 1860년대의 일본이었다. 한국에서는 1894년 갑오경장을 전후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상인층이란 전통적 의미를 넘어 정치주체로서 시민의 개념은 그다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에 중요하게 대두된 개념들인 국민, 신민, 민족 등에 비추어 볼 때 시민 개념의 활용 빈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내용면에서 시민이라는 말은 적극적인 개념으로 활용되기보다는 서구의 역사나 현실을 단순히 서술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에서 수동적으로 사용되었다.
일제하에서 시민 개념은 전통적 의미와 새로운 의미가 혼합되어 사용되었지만, 정치적 주체성을 중심으로 하는 의미는 좀처럼 부각되지 않았다. 일제시대 내내 시민은 경성 시민, 대구 시민과 같이 행정구역의 주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장시의 시민을 지칭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주목할 점은 당시에 지식계층에 큰 영향을 미쳤던 마르크즈주의에서 사용되던 시민계급, 소시민층 등의 용어가 일정 정도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점에서 시민의 개념에는 자유주의적 의미보다는 계급적이고 경제적인 성격이 더욱 중시되었던 측면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일제시대에는 시민보다도 민족, 인민, 민중과 같은 개념이 힘을 얻었다. 이들 개념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자율성의 의미가 약하고 대신 집합적 범주로서 성격이 강하다.
▲ 보수시민단체 지도자들이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보급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힘을 얻은 개념은 시민이 아니라 민족과 국민이었다. 해방 직후 정치적 주체를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남한은 국민을, 북한은 인민을 핵심적 개념으로 활용했다. 1960, 1970년대를 거쳐 한국은 본격적으로 산업화, 민주화의 변화를 겪었으나 시민 개념은 정치적 함의를 확보하기 힘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5·16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민주시민교육이 강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민으로서 모든 규칙과 법률의 준수, 자치생활의 증진, 정치적으로는 반공적 신념으로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교양인이라는 뜻이었다.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에 시민 개념이 정치적 의미를 지지고 대두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였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은 시민들의 정치적 힘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시민은 경제적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적 성격보다 오히려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토앙의 의미가 강하였고 국가권력의 억압적 지배에 저항하는 정치적 주체, 공공성을 담보하는 사회세력으로서의 의미가 강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민 개념은 여러 갈래로 분화하였다. 한 갈래는 경제정의실천연합의 활동에서 보듯이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이미지가 강한 민중과는 스스로를 차별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보통사람으로서 중간층을 가리키는 의미로 자신의 정체성을 잡아가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참여연대의 활동으로 대표되는 진보주의적 시민운동이 대항세력으로 성립하여 시민운동의 헤게모니를 다투었다. 참여연대는 민주화시대 이후에도 시민의 참여를 통한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개혁하기 위해 진보적 민중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기득권 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법과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고 있다.
21세기 초 한국에서 시민과 시민사회를 둘러싼 논의는 상당기간 불일치, 대립, 다양성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소위 시민단체들 간의 이념 대립이 심화되고 시민운동과 정치운동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NGO가 반드시 정치적 참여 민주주의를 지향하는가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아마도 시민, 국민, 민중, 인민을 둘러싼 논의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개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속적인 긴장과 갈등의 소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F. 현행 초등학교 교과서에서의 인간상 (草)
1학년 1학기 『바른 생활』
1) 즐거운 학교생활: 규칙을 지키자.
2) 스스로 잘해요: 준비물 미리 챙기기, 내가 할 일은 스스로 합니다.
3) 가족은 소중해요: 바른 자세, 식사 도구 사용법, 골고루 먹기.
4) 바른 자세: 자세를 바르게 하면 건강해집니다.
5) 사이좋은 친구: 서로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2학년 1학기 『바른 생활』
1) 스스로 할 수 있어요: 가정에서, 학교에서 내일은 스스로 합니다.
2) 계획대로 실천하는 생활“ 계획을 세우면 알차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3) 단정한 모습: 단정한 옷차림은 다른 사람의 기본을 좋게 합니다.
4) 사이좋은 이웃: 이웃 간에는 예절을 지키면서, 서로 돕고, 피해를 주지 않고 다정하게 지내야 합니다.
5) 함께 사는 우리: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지닙니다.
6) 함께 지켜요: 공공장소 규칙 지키기
7) 컴퓨터를 바르게 사용해요
8) 아껴 쓰고 제자리에: 물건을 소중히 다루고 아껴습니다. 언제나 정리 정돈을 잘 합니다.
3학년 1학기 『생활의 길잡이』
1) 도덕 공부, 이렇게 해요: 도덕의 의미 (정직, 자주, 절제, 책임, 협동, 효도, 준법)
2) 정말 멋있는 내가 되기: 바른 몸가짐(자세), 고운 말, 다른 사람 소중히 여기기
3) 사랑이 가득한 우리 집: 다양한 가정(조손, 노인, 한부모, 다문화 가정)
4) 너희가 있어 행복해: 친구 사이의 우정, 진정한 친구
5)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우리나라의 상징 애국가, 태극기, 무궁화, 국경일
나라의 정의: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울타리“
나라를 빛낸 사람들: 남궁억, 김창숙
나라 사랑하는 방법: 애국가, 태극기, 무궁화를 아낀다. 외국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문화재를 소중하게 아끼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사랑한다. 다문화 가정 친구를 놀리지 않는다. 공공장소에서 예를 지킨다.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를 막는다.
‘국기에 대한 맹세’의 뜻을 알고 낭독해 봅시다.
4학년 1학기 『생활의 길잡이』
1) 바른 마음 곧은 마음: 정직, 용기, 성실
정직의 요소들: 바르다, 아름답다. 떳떳하다, 꾸밈이 없다, 양심, 솔직, 성실, 용기. 정직한 위인: 최영, 링컨
2) 내 일은 내가 하기: 스스로 하는 보람과 기쁨, 자주적 생활, 나쁜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은 것, 자주적 생활의 위인: 이순신, 신사임당, 도스토엡스키
3) 새끼손가락 고리 걸고: 친구와의 약속, 공연장·도서실에서 지켜야 할 약속.
4) 함께 하는 세상: 우리는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행복하게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중도덕을 잘 지켜야 합니다.
5)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나라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잘 잘 수 있고 또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가 나에게 해 주는 것,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준다. 필요한 시설물을 지어준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한다.
우리는 전통 지킴이, 자랑스러운 우리의 전통과 문화: 효 사상, 서로 돕기, 가족 간의 끈끈한 정
나라에 전쟁이 나면 우리는 불행해진다.
나라사랑 실천: 국경일 태극기 게양, 태극기 바로 그리기, 애국가 4절까지, 8월 15일이 무슨 날인지 알기, 국가에 대한 맹세 알기, 나라꽃이 무엇인지 알기, 외국어보다 우리말, 우리나라의 세계유산 알기, 나라 위해 희생하신 분 알기, 우리나라 지도 그리기
5학년 『생활의 길잡이』
1) 최선을 다하는 삶: 성실의 의미. 정직과 성실을 벗으로 삼아라(프랭클린)
2) 감정, 내 안에 있는 친구: 감정을 바르게 조절하고 표현하는 방법,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느끼는 방법
3) 갈등을 대화로 풀어가는 삶: 사람마다 상이한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 갈등을 함께 해결하기
4) 밝고 건전한 인터넷 세상: 지켜야 할 정보 통신 윤리, 게임 중독 예방 지킴이
5) 우리는 하나: 하나이면서 둘, 북한 동포의 가정, 학교, 사회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진정한 통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진정한 통일이란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면서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가져야 할 마음가짐: 첫째 서로를 아끼고 이해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키우는 길이다. 둘째, 강한 정신력을 키워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습관은 자신을 약하게 만든다. 셋째, 주인 정신을 길러야 한다. 통일은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통일을 이루는 데 적극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6) 돌아보고 거듭나고: 반성, 계획, 실천, 다함께 더 성숙하게
7) 참된 아름다움: 우정, 봉사, 화해, 양보, 질서.
8) 이웃과 더불어: 이웃사촌, 이웃과 화목하려면.
9) 서로 돕고 힘을 모아: 협동의 의미와 중요성.
10) 우리는 자랑스러운 한인: 재외 동포, 우리의 뿌리는 하나.
6학년 『생활의 길잡이』
1) 귀중한 나, 참다운 꿈: 자긍심, 나의 재능과 장점.
진정한 자긍심의 요소들: 꿈, 성실, 정성, 근면, 희망, 도전, 책임, 용기 등.
2) 책임을 다하는 삶: 책임의 대상, 자신, 타인, 가정, 학교, 사회
책임을 다한 숭고한 삶 한준호 준위: 2010년 3월 서해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 피격사격이 발생하자(하략).
3) 우리 함께 지켜요: 법과 규칙의 의미
준법의 기초: 절제, 책임, 용기, 배려, 정의
4) 서로 배려하고 봉사하며: 너를 나처럼, 서로의 마음이 되어, 같은 마음으로 함께 하기
5) 통일 한국을 향하여: 바람직한 통일의 과정. 전쟁과 힘으로 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들 사이의 일이나 생활방식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자. 백범 김구 선생이 통일을 위해 노력한 일을 조사해 봅시다.
6) 용기, 내 안의 위대한 힘: 진정한 용기
7) 다양한 문화 행복한 세계: 문화의 의미, 다양한 문화, 편견의 극복.
8) 공정한 생활: 각자에게 그 몫을, 공정한 판단과 선택, 공정한 사회·나라 만들기
9)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평화, 비폭력
10) 참되고 숭고한 사랑: 사랑, 자비, 용서
G. 결론
정부가 초등학교 6년간의 공교육을 통해 육성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은 가정, 학교, 이웃, 사회에서 예절을 지키고, 자기 책임을 다하고, 이웃에 봉사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그와 협동하는, 그를 위해 꿈, 성실, 정성, 근면, 도전, 책임, 용기, 평화의 가치를 함양하는 도덕적 존재이다. 달리 표현하여 철저하게 탈정치적, 탈국민적이다. 초등교육에서 상정되는 나라의 실체는 자랑스러운 전통문화로서 민족과 등치되고 있다. 국가라는 표현은 쓰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어떠한 이념의 나라인지, 언제 어떻게 건립되었는지,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교육은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자유 또는 정의라는 용어는 전후 맥락에서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급조차 회피되고 있다. 교과서가 자유라는 개념을 정면에서 교육하는 대목은 한 군데도 없다. 그리하여 자유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신체의 자유, 노동과 직업의 신성함, 재산의 절대성, 사회적 분업으로서 시장 등에 대해서는 하등의 언급이 없다. 현행 초등교육이 자유주의 이념과 얼마나 먼 거리를 지니는지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완벽하게 탈국가적인, 가족주의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도덕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리자면, 수입의 역사가 채 120년이 되지 않은 자유주의 이념은 아직 한국인의 정신생활에서 그 뿌리를 튼튼하게 내렸다고 하기 어렵다. 끝으로 사족 하나. 초등 5학년부터 등장하는 통일 교육은 남·북한의 체제와 이념의 대립을 가족주의의 관점에서 통합할 수 있는 민사상의 분쟁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무책임한 관념성을 드러내고 있다. 통일교육이 강조하는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 강한 정신력, 주인 정신은 의도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을 연상시킨다. 신중한 재검토가 요망된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