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3일(현지시간) 출간하는 회고록 ‘그것이 일어났던 방’은 갑작스럽게 이뤄진 비핵화 대화에서 톱다운 식 협상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볼턴의 회고록은 협상 자체에 대한 평가부터 남북미 3국 정상에 대한 뒷얘기까지 모두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기술됐다. 하지만 그가 묘사한 3국 정상의 즉흥적이거나, 낙관적이거나, 정교한 전략이 없었던 태도에서 협상 실패의 원인도 찾을 수 있었다.
볼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정상외교를 대하는 태도를 회고하면서 즉흥적이고 보여주기 식 이벤트로 끌고온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2018년 6월12일 1차 북미정상회담 합의안과 관련해 “나는 폼페이오 장관과 함께 종전선언을 대가로 핵‧미사일 신고를 공동성명에 포함하는 방안을 마련했다”고 밝히면서 “트럼프 대통령도 회담 1주일 전까지 종전선언을 ‘언론의 점수를 딸 기회’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고 했다.
종전선언은 1차 북미 정상 공동성명에서 결국 빠졌다. 이에 대해 볼턴은 “종전선언이 북한의 아이디어인 줄 알았는데 문 대통령의 통일 의제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했다”고 말했다.
또 폼페이오 장관이 회담 준비 브리핑을 할 때 트럼프 대통령은 “이건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핵심 내용이 빠진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기자회견을 열어서 승리를 선포하고, 이곳을 빨리 뜰 준비가 됐다. 이후에 북한을 제재하면 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던 베트남 하노이에서 김 위원장에게 “만찬을 취소하고 북한까지 비행기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웃으며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재차 “대단한 그림이 될 것”이라며 권유한 사실도 이번에 밝혀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6월30일 판문점 자유의집 앞에서 역사적인 남북미 정상 회동을 하고 있다./청와대
볼턴의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과장되면서도 즉흥적인 발언에 따라 김 위원장은 다소 낙관적으로 협상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이 “한미훈련을 줄이기를 원한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즉시 “한미훈련은 돈과 시간 낭비다. 불만스럽다”며 한미훈련 취소를 결정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김 위원장이 미국에 많은 돈을 절약해줬다”는 말까지 했으며, 김 위원장과 활짝 미소를 짓고 동석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함께 껄껄 웃었다고 볼턴은 전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은 “유엔 제재 해제가 다음 주제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 논의에 열려있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볼턴은 “하노이에서 김 위원장은 마지막까지 합의가 없더라도 ‘하노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를 원했다”며 하지만 이마저도 없이 2차 회담은 결렬로 막을 내렸다”고 이번에 밝혔다. 볼턴은 또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노딜’ 이후 한달쯤 지난 뒤부터 하노이에서 자신이 너무 강하게 나갔던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3월22일 트위터에 “기존 제재에 대규모 제재가 추가될 것이라고 재무부가 발표했다. 나는 오늘 그러한 추가 제재들의 철회를 지시했다”고 올렸다. 볼턴은 “이에 대해 언론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했던 샌더스 대변인에게 트럼프가 ‘나는 김정은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제재는 불필요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볼턴의 회고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톱다운 식 협상에 지나친 기대를 걸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상 최고지도자 외에는 결정권이 없는 북한의 통치 구도를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문 대통령이 스스로 해온 말처럼 ‘다시 오기 힘든 기회’로 보고 성급하게 밀어붙인 측면이 있어 보인다.
볼턴은 문 대통령은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3차 북미정상회담을 요구한 점을 부각시켰다. 문 대통령은 2019년 4월1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판문점 또는 해군 군함 위에서의 만남을 제안하며 극적인 결과를 이끌 수 있는 시각, 장소, 형식에 대한 극적인 접근법이 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또 문 대통령은 이 회담 말미에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북측에 6.12와 7.27 사이에 3차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북측에 제안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엉겁결에 이뤄진 북미대화가 실패한 첫 번째 원인은 문재인정부의 정상간 케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정교하지 못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미행정부에 “김정은 위원장이 1년 안에 비핵화를 하겠다고 했다”고 밀어붙였는데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대표 ‘매파’ 볼턴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핵 문제에 대한 이해 부족과 볼턴의 ‘발목 잡기’로 미 행정부가 제대로 된 전략을 수립할 새도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미 간 비핵화 정의도 일치시키지 못한 점이 대표적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6월30일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직후 ‘핵 동결’로 북핵 협상을 종결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는 사실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묵인하는 것이다.
세 번째 원인은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보여주기 식 행동에 낙관적으로 대처한 점이다. 하노이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대북제재 해제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트럼프가 영변 폐기 외 추가로 가능한 조치를 물으며 부분적 제재 완화를 시사했을 때 이 제안을 받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정의용 안보실장은 미국측에 “김 위원장이 (영변 핵시설 포기와 모든 제재 해제라는) 한 가지 전략만 가져왔다. 플랜 B가 없어 놀랐다”고 말했다고 볼턴은 주장했다.
한편, 청와대는 볼턴 전 보좌관의 회고록에 대해 왜곡됐다고 발표하면서 미국 정부에 시정 조치를 요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미 백악관은 볼턴 측에 협상 과정 등 400여 곳에 대한 수정과 삭제를 요구했다. 다만 백악관이 볼턴의 책이 국가기밀을 다수 포함하고 있어 출판을 막아야 한다며 제기한 소송은 법원에서 기각된 상태이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