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서울-부산간)는 당시 폭 22.4m(4차선) 총연장 428km로 완공됐고 연인원 890만명, 연장비 165만대, 공사비 429억 7300만원을 쏟아부은 대역사였다./사진=미디어펜
[미디어펜=김규태 기자]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만든 고속도로. 우리나라 고속국도 1호선으로 건설업 시초기술의 상징. 한 해 국가 예산의 23.6%가 쓰인 대역사. 공사기간 2년 5개월 동안 연인원 890만명을 투입해 총길이 428km, 4차로로 완공한 경제대동맥.
경부고속도로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기자는 오는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50주년을 맞아 마련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고속도로 탐방에 동행했다.
당시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정치권 반대는 들끓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그럴 예산이 있으면 농촌에 주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들은 무관심에 가까웠다.
1968년 2월 기공식을 단 9일 앞두고는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전쟁이 나지 않는 한 공사를 진행하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자동차도 전혀 만들지 못했던 후진국의 한 대통령. 서울 한복판에 자동차도 몇대 다니지 않는게 현실인데 고속도로라니. 그는 어떻게 경부고속도로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까.
경부고속도로는 기자가 알아볼수록 의문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2년 반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동안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주파하는 고속도로를 놓는다는게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목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사(史)에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낸 것으로 기록된 충북 옥천군 '당재터널 사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69년 9월 상행선 590m, 하행선 530m 길이의 당재터널 구간은 석질이 물러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7명의 희생자를 냈다. 당시 문제의 구간만 해도 공사 시작 전부터 난공사 구간으로 알려져 있었고, 공사 도중 낙반 사고가 13차례 일어났다.
이뿐 아니다. 터널 희생자를 비롯해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에서 공사 중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77명에 달했다. 이들(77명)을 추모하기 위해 금강휴게소에 위령탑을 세웠고 1971년 7월 7일 제막식이 치러졌다. 이 행사를 계기로 현장감독자 30여명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일과 함께 이들 77인의 희생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77회'를 만들었다. 매년 7월7일이면 위령제를 지낸다.
추풍령에 위치한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사진=미디어펜
이번 탐방에서 처음으로 방문했던 곳은 서울-부산간 고속도로의 중간에 있고 가장 높은 지대인 추풍령이었다.
햇살이 따가운 가운데 30.8m 높이의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은 따로 마련된 기념공원에 우뚝 서 있었다.
기념탑에는 준공식이 열린 1970년 7월 7일 박 대통령이 언급했던 한마디와 '고속도로의 노래'가 새겨있었다.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박 대통령의 한마디(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에의 길이다) 보다 '고속도로의 노래' 가사의 일부다.
'꿈도 기적도 아닌 현실의 개척자로 영광의 자서전을 새기는 오늘.'
'뒷날의 역사는 증언하리. 나약과 빈곤을 불사르고.'
'달려라 자주의 길 달려라 부강의 길 달려라 자유의 길 달려라 평화의 길.'
'달려라 승리의 길 달려라 통일의 길. 역사를 창조하는 고속도로.'
뒷날의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50년 뒤인 2020년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와 지금도 이 길을 오가는 수십 수백만 대의 차량이 경부고속도로의 의미를 증명한다.
자주 부강 자유 평화 승리까지 통일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역사가 이 도로를 통해 이뤄졌다.
기자가 지난 1일 탐방에서 두번째로 들린 곳은 금강휴게소 인근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순직자(산업전사 77위) 위령탑이다. 이날 기자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임직원과 함께 헌화하고 추모했다.
조용한 산 중턱에 추모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위령탑에는 "여기 이 서울부산간 고속도로야말로 피와 땀의 결정"이라며 "피를 흘려 생명을 바치신 이가 77명이었다. 우리 어찌 그들의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라고 쓰여있다.
추도문은 "여기 그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정성들여 탑을 세우고 이 앞을 지날 적마다 누구나 옷깃 여미고 묵도를 올리리니 혼들이여 내려와 편안히 깃드옵소서. 웃으옵소서"라고 쓰였다.
준공기념탑에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사 한마디가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사진=미디어펜
본론으로 돌아가, 어떻게 그토록 강한 의지를 갖고 단기간 내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할 수 있었을까.
기자가 앞서 가졌던 의문은 이날 탐방에서 가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좌승희 이사장과의 인터뷰에서 풀렸다.
좌 이사장은 "당시 일본이 동경-나고야간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7년 걸렸다. 경부고속도로는 1km당 1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는데 일본에 비하면 비용대비 1/7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이는 싸우면서 건설하자와 꼭 같은 원리"라고 설명했다.
좌 이사장은 "당시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격이 많았고 남한이 북한을 막아서 견딜 방안이 녹록치 않았다. 박정희 입장에선 경제를 일으킬 시간이 촉박했던 것"이라며 "고속도로 건설을 최대한 빨리 만드는게 급선무였다"고 말했다.
그는 "길은 우선 뚫어놓고 미흡하면 고쳐나가자는게 박정희 대통령 생각"이라며 "이걸 완벽하게 하겠다고 완공에 5년, 10년 걸리면 물류 차단은 물론이고 시장경제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일단 만들어놓고 쓰면서 문제가 생기면 고쳐나간다는 게 얼마나 실용적인 발상이냐. 1960년대 수출에 애썼지만 수송 문제에 부딪힌걸 피부로 느껴 더 절박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7월 1일 금강휴게소 인근 순직자(산업전사 77위) 위령탑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임직원 일동은 함께 헌화하고 추모했다./사진=미디어펜
물류는 사람이다. 인천항과 부산항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항만과 생산기지, 도시와 지역을 잇는 고속도로가 이 경부고속도로에서 시작하고 이어졌다. 기자가 기념공원에서 내려다본 고속도로에서는 1분동안 수십대의 화물차량과 승용차가 오가기도 했다.
지난해 6월 공학한림원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촉진제가 된 11대 산업의 시초기술과 제품을 선정했다. 건설 분야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꼽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원래 15시간 이상 걸리던 길이 4시간으로 당겨지면서 경제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게 가장 큰 선정 이유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첫 삽을 뜬 후 1970년 7월 7일 완공될 때까지 2년 5개월 동안 890만명이 투입됐다. 공사비만 당시 한 해 국가 예산의 23.6%인 429억 7300만원이 쓰였다.
한국도로교통연구원에 따르면,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해 지역간 통행시간 절감 및 물류비용 감소 등 직간접 효과가 연간 최소 13조 50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총길이 428km, 4차로의 경제대동맥이 완공되면서 전국은 일일생활권으로 압축됐다. 지역별로 단절되어 멀고 먼 길을 오가던 전 국토가 하나의 경제권역으로 통합된 것이다.
더욱이 경부를 시작으로 호남, 남해, 중부고속도로 등이 잇달아 개통됐고 2000년 이후에는 도로교통이 전국의 여객화물수송에서 90%에 달할 정도로 전 국토의 혈맥을 이었다.
50년전 개통 당시 하루 평균 만대에 불과했던 경부고속도로 통행량은 현재 하루 92만대 이상(2019년 평균일교통량 기준 92만 6558대)의 차량이 다니고 있고, 고속도로 건설은 자동차산업도 발전시켜 개통 당시 12만 대에 그쳤던 자동차 등록 대수는 2368만대에 이른다(2019년 2월 기준).
경부고속도로는 오는 7일 개통 50주년을 맞는다. 훗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의 토대가 된 경부고속도로. 오늘도 수십만대의 차량이 달리면서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