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익' 개념은 왜 오해를 주어 왔던가?
▲ 김행범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
②개인주의에는 이타주의(altruism)에 대한 반대 의미, 즉 이기주의(egoism)라는 개념 차원도 있다. 이 차원에서 사익을 본다면 사익이란 곧 “남의 희생에 개의치 않고 나 혼자만 누리려는 이익”이다.
포퍼의 추론을 원용하면 인간의 이익을 다음 도표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획득하고자 하는 이익은 이기적(selfish) 이익과 이타적(vicarious) 이익으로 구분할 수 있다. 둘째,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개인의 선택의 결과가 본인에게만 미치는 개인 이익(사익)과, 그것이 개인의 영역을 벗어난 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집단이익(공적 이익, 사회 이익, 공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차원을 함께 적용하면 인간의 경제 활동에 관련된 이익이란 다음과 같이 4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따라서 사익에는 이기적인 것(a)과 이타적인 것(c)이 있으며, 공익(사회이익)에도 이기적인 것(b)과 이타적인 것(d)이 있을 수 있다. b는 흔히 ‘집단 이기주의’에서 잘 나타나는 이익이며, c는 개인이 자선행위를 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2. 사익은 왜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던가?
사익은 이기적인 것(a)으로만, 그리고 공익은 곧 이타적인 것(d)으로만 오해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익이란 당연히 이기적이며 이웃에게는 냉혹한 것이므로 나쁜(bad) 것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이익에 대한 이러한 정확한 해석에 이르기까지 2,500년이 걸렸다.
사익을 나쁘고 추한 것으로 보는 그릇된 인식은 사실 플라톤에서 이미 비롯된 것이다. 그는 사익이란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이며, 이 때문에 공익이 더 우월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집단의 이익은 다 이타적인 것인가? 예컨대, 소나 물고기 떼는 이타적인 존재인가?
이러한 미신은 오늘도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우리는 기업인이 자신의 이익(사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에서 즉각 a를 연상하고, 국회의원이 만들어 내는 공공정책이나 법률에 대해서는 전혀 이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d일 것이라고 믿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 미신은 플라톤을 넘어 오늘날 국가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및 현대 복지주의자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다.
3. 서구 발전의 도덕적 기반은 집단주의이었던가? 개인주의였던가?
서구문명을 발전시켜온 원동력은 플라톤적인 집단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와 결합된 이기주의”였다. 기독교는 “너의 이웃(플라톤적 관념인 ‘종족’이 아니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칸트의 실천 윤리(‘인간 개인이 목적임을 인식하고 그들을 너의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삼지마라’)에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이타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이기주의적 이익 관념이 서구 역사 발전의 동인이었던 것이지 부족국가를 염두에 둔 플라톤적 집단주의 이익관념이 결코 아닌 것이다.
4. 사익은 이타성과는 거리가 먼 것인가?
사익이 이기적인 것만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이기적 사익이 이타적인 공익 상태를 진화해낸다. 애덤 스미드가 말했듯이 개인이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에도 유익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개인들을 초월한 제 3의 조정자인 국가 없이도 이루어진다. 죄수의 딜렘마 게임이 장기 게임(super-game)으로 이어질 때에도 이기적 개인들 간에는 이타적 행동이 진화되어 나타난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이익적 이익을 추구하던 개인은 이러한 이타적 공익적 행위를 도출해 내는 능력이 있다.
5. 공익이라고 정부가 내 세우는 것들은 진정 ‘공공의 이익’인가?
공공선택론 학자들의 위대한 발견은 공익을 내 세우는 정치인, 관료, 투표자들 역시 이기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진실을 까 발겨 낸 점이다. 공익이라 표방된 것도 실상은 이기적 이익(b)이거나 (이익집단의 이익 등, 관료집단의 이익, 정치인 집단의 이익...), 심지어 아예 사적 이익(a)에 불과한 것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공익이란 으레 d만을 포함한다고 본 픞라톤, 웨버의 시각은 이래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6. 사익보다 더 정의롭고 우아한 도덕성을 갖춘 다르다는 소위 ‘공익’이란 것의 실체가 존재하는가? ⇨ 그런 건 없다.
▲ 국민권익위원회(위원장 이성보)가 4일 개최한 ‘공공재정 허위·부정청구 등 방지법' 토론회에 참석한 학계와 시민단체, 부처 등 각계 전문가들이 법안과 관련한 주제토론을 하고 있다. /뉴시스
첫째, 공공 의지(public will)의 모호함이다. 국민의 뜻, 다수의 뜻. 공공의지란 결국 과반수(majority)로 확정적인 것이 되지만 이 과반수가 여러 모습으로 형성될 수 있고 이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식으로 공공의지라는 게 가변적이라면 그것은 공동체의 독자적인 인격 실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둘째, 본래 의미의 공익(public interest)이란 적어도 규범적으로는 “국민 전체”의 이익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개의 정책이란 과반수를 형성하는 집단의 이익을 공익으로 입법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공익의 본래 의미에 부합되지 않으며 공익은커녕 과반수의 사익, 집단의 사익일 뿐이다. 그러고도 이를 공익으로 호도하여 내세웠을 뿐이다.
셋째, 사익을 초월한 공익이 따로 존재하는 예의 대표적인 것이 헌법상의 기본권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현실의 정책 과정에서 여러 사익들을 조정, 합산, 비교, 타협에 좌우되어 집행될 뿐이다.
넷째, 공익은 공동체 의지나 그 구현과정의 사적 이익 개입 없이도 그 자체로 자연법적으로, 즉 ‘정치와 무관한’(apolitical)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 실현 과정에는 여러 사익들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7. 민주적 정책과정에서 공익은 실제로 어떻게 형성되는가?
공익이란 사익을 초월하여 존재함이 아니라 결국 “사익으로부터” 변환 및 조정되어 만들어질 뿐이다. 그것이 형성되는 현실적 과정에는 세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① 다원주의적 정책결정 구조를 확립하면 특정 사익에 매이지 않고 여러 사익들로부터 공익이 바람직하게 형성될 것으로 보는 낙관적 입장이 있다(다원주의적 이익집단론). 그러나 대개 정치행정구조란 충분히 다원적이지 못하다.
② 현실 정책결정에서 이익집단-국회-행정부가 서로 담합하여 이기적 이익을 챙기는 철의 삼각형”(iron triangle)과 같은 비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공익 수호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 된다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라고 자신의 이기적 이익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을까?
③ 행정 관료의 전문성, 중립성 및 적극적 역할을 통해 공익을 형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적법절차(Administrative Due Process)와 대표관료제(Representative Bureaucracy)의 확립을 강조한다. 그러나 관료들이 이기주의를 포기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어느 것이든 정치 현실은 공익이란 사익으로부터 불완전하게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함을 가장 정확히 보여 준다.
8. 공익이란 허구로 사익을 억압함을 멈추자.
지금까지 사익의 억제 논리로 남용되어 온 ‘공익’의 신비로움은 허구에 불과하다. 그저 다수에 관련된 이익이므로 개인의 이익보다 당연히 우월하다는 모호한 근거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정부가 사익을 불가피하게 제한하려면, 본질상 또 다른 사익에 불과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소위 ‘공익’이 왜 그 사익을 변경, 제한, 침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더 설득력있는 정당한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9. 사익 없이는? ⇨ 공익도 없다!
정부가 공익이라고 표방하는 많은 가치는 실상 사익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정부를 구성하는 집단의 사익에 불과하거나, 설령 기본권 가치처럼 개인의 사익을 떠나 존재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도 그것은 구체화되는 정책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사익들을 통해서 실현될 뿐이다.
사익들로부터 공익이 형성된다는 논리 및 그것이 실제로 작동되는 현실의 정책과정의 검토에서 보았듯이 사익이야 말로 모든 개인행동의 근본 동기이며 정부가 내세우는 공익이란 것도 여기에서 연원할 뿐이다. 공익을 높이려면 개인의 이익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 공익은 없다. 공익이란 사익의 다른 얼굴이며 사익으로부터 만들어질 뿐이다.
(이 글은 자유경제원의 시장경제에 대한 그릇된 통념깨기 연속토론회 '공익이 아니라 사익으로 인해 세상은 발전한다'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김행범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가 발표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