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중국의 외교정책을 이끄는 양제츠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이 22일 부산에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오찬을 포함해 6시간 가까이 진행된 회담에 대해 중국 관영 매체 신화통신은 “양 위원이 ‘중국은 한국과 함께 다자 영역의 국제협력을 강화하고,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수호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은 트럼프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를 견제한 말로 해석되면서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화웨이 제재, 탈 중국 공급망 네트워크(EPN), 홍콩보안법과 남중국해 문제와 같은 미중 갈등 현안에서 최소한 한국의 중립 입장을 요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는 회담 이후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의 서면 브리핑을 내고 “양 위원이 최근 미중 관계에 대한 현황과 중국측 입장을 설명했다”고 밝히면서 이에 대해 서 실장이 “미중 간 공영과 우호협력 관계가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당초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아니라 양제츠 위원의 방한 계획이 나오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논의에 앞서 미중 갈등과 관련한 외교 청구서가 전달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더구나 회담 장소가 부산으로 정해지면서 양 위원이 미중 관계와 관련된 중국의 명확한 입장을 전달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해석됐다.
이날 회담 결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일정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사후 브리핑을 통해 “한중 양측은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되어 여건이 갖추어지는 대로 시진핑 주석의 방한을 조기에 성사시키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청와대가 시 주석의 방한과 관련해 꼬리표처럼 말해온 ‘연내’라는 말도 사라진 것이다.
외교가에선 중국이 시 주석의 방한을 지렛대 삼아 미중 사이에 놓인 한국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12월부터 거론되어온 시 주석의 방한은 2016년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로 내려진 ‘한한령’을 완전히 해제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해왔다.
서훈 국가안보실장이 22일 오후 부산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양제츠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과 회담을 마친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청와대
청와대는 한중 양측이 코로나19 대응 협력, 고위급 교류 등 한중 관심 현안, 한반도 문제와 국제 정세 등 폭넓은 이슈에 대해 허심탄회하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특히 서훈 실장은 미국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북미 대화가 중단된 가운데 최근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데 중국당국의 협조를 요청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대해 양 위원이나 중국 매체의 구체적인 전언은 없으나 앞서 지난 19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을 만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남북 교착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정국정부의 협조 요청에 “우리는 계속해서 남북 화해와 관계개선에 도움이 될 일만 하겠다”며 다만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에 서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아울러 청와대는 서 실장과 양 위원이 △한중 FTA 2단계 협상 가속화 △RCEP 연내 서명 △제3국 시장 공동진출 △신남방·신북방정책과 ‘일대일로’의 연계협력 시범사업 발굴 △인문 교류 확대 △지역 공동방역 협력 △WTO 사무총장 선거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면서 폭넓은 공감대를 이뤘다고 전했다.
논의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관측되는 화웨이나 EPN 문제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역시 양측의 논의는 주로 경제와 관련한 것으로 미중 갈등 속 한중 간 경제 관계를 더욱 끈끈히 하려는 중국 측의 의도도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최근 미중 간 패권 갈등에 대해 경제‧군사를 넘어 이념의 영역까지 전방위적으로 노골화되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또 미중 전략경쟁이 생각보다 빠르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임시방편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을 넘어 우리의 원칙과 방향을 담은 대응 방안을 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흥규 아주대 중국정책연구소장은 “미중 전략경쟁에서 한국과 싱가포르는 동아시아의 린치핀(linchpin·핵심축) 같은 중요한 거점”이라며 “중국이 두 나라의 태도나 향배에 대단히 많은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고 싶어 방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현재 세계는 미중 양 진영간의 냉전이라기보다는 미중 양국의 냉전과 나머지 이를 우려하는 국가들간의 복합적 구도”라며 “우리는 후자와 공감대를 확대하면서 신중하게 미중 간의 제2차 냉전시대에 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미중 갈등에서 한국이 선제적으로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상황이 도래했을 때 그때 판단해도 충분하다”며 “국익 차원에서 중국과의 관계에서 풀어간 것은 풀어가고, 미국과의 문제는 미국과 풀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