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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준의 골프탐험(37)- 찻잔의 물을 비운 듯 마음의 눈으로 쳐라

2014-12-25 19:49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방민준의 골프탐험(37)- 찻잔의 물을 비운 경지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세 사람의 선사가 함께 차를 달이는데 마침 밝은 달이 찻잔의 물에 비쳤다.
“물이 맑으니 달이 비치는구나!”
한 선사가 감흥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선사가 말했다.
“맑은 물이 없으면 달이 비치지 않습니다.”
이에 세 번째 선사가 찻잔의 물을 쏟아버리고 말했다.
“물과 달이 어디에 있는가?”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밥 호프는 골프광으로 소문난 사람이다. 밥 호프가 어느 날 맹인골퍼 찰리 보즈웰을 만났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골프를 그렇게 잘 칠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나하고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골프대회(Bob Hope Classic)를 주최할 정도의 골프광인 밥 호프는 지는 사람이 1,000달러를 내자고 말했다. 컨디션만 좋으면 싱글도 자주 치는 그로서는 맹인과의 내기골프에서 지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비록 캐디의 도움과 지시를 받지만 역시 싱글도 치고 보통 80대를 치던 찰리 보즈웰은 밥 호프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 좋은 골프장, 좋은 클럽, 기막힌 날씨, 훌륭한 동반자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좋고 나쁨의 가림이 없는 골퍼에게는 모든 게 한결같을 따름이다. /삽화=방민준
호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 그럼 티업 시간을 정해야지. 보즈웰 자네가 편리한 시간을 선택하게.”
그러자 보즈웰이 말했다.
“좋습니다, 내일 새벽 2시가 어떻습니까?”
“뭐, 아니 새벽 2시라고? 내가 졌네!”
밥 호프는 그 자리에서 1,000달러를 찰리 보즈웰에게 주었다.

이 에피소드는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들리지만 고차원의 선(禪)문답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맹인에게는 찻잔의 물도 없고 물에 비칠 달도 보이지 않는다. 찻잔의 물을 비워버린 경지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밥 호프는 어떤가. 두 눈이 멀쩡하다는 이유로 그는 모든 사물을 분별하고 이 분별심에 따라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인다. 환한 대낮에만 골프를 쳐온 밥 호프로서는 칠흑 같은 밤에 골프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찻잔에 물을 채우고 거기에 비친 달을 두고 찻잔과 물과 달의 존재를 파악하는 밥 호프와 아예 찻잔의 물을 비워버린 맹인 찰리 보즈웰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경지에 있는 것이다.
좋은 골프장, 좋은 클럽, 기막힌 날씨, 훌륭한 동반자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좋고 나쁨의 가림이 없는 골퍼에게는 모든 게 한결같을 따름이다.

찰리 보즈웰을 흉내 내어 아놀드 파머를 물리친 맹인골퍼 사이먼의 얘기도 유명하다. 시카고의 골프계에서 제법 알려진 그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거리를 알려주고 클럽의 타격면을 볼에 맞추어주기만 하면 혼자 스윙을 했는데 80대를 자주 쳤다고 한다.
그가 어느 날 아놀드 파머를 만나 “당대의 대 프로골퍼와 한번 맞서보고 싶습니다.”라며 대결을 제의했다.
이에 파머가 “좋소, 한번 겨룹시다.”하고 말했다.
이 말에 사이먼은 파머를 껴안으며 “최고의 골퍼와 겨룰 기회를 주어 정말 고맙습니다.”며 기뻐했다.
“자 그럼 언제 하지요? 핸디캡은 얼마나 드릴까요?”하고 파머가 묻자 사이먼은 “스크래치로 하지요, 그리고 티업 시간은 내일 하오 10시로 하지요.”라고 대답했다. 유명한 맹인골퍼 찰리 보즈웰을 흉내 낸 것이다.
순간 파머는 호인의 웃음을 터뜨리며 사이먼의 두 손을 잡고 “게임은 당신이 이겼소. 깊은 밤에는 내가 이길 확률이 1%도 안 될 테니까…”라며 사이먼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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