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서우 기자] 신라면 신화를 일구며 ‘라면왕’으로 불리던 농심 창업주 율촌(栗村) 신춘호 회장이 27일 별세했다. 향년 92세다.
농심은 “신 회장이 오늘 오전 3시 38분께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신춘호 회장의 마지막 작품은 옥수수깡이다. 그는 “원재료를 강조한 새우깡이나, 감자깡, 고구마깡 등이 있고, 이 제품도 다르지 않으니 옥수수깡이 좋겠다”고 했다. 옥수수깡은 2020년 10월 출시됐고, 품절대란을 일으킬 만큼 화제가 됐었다.
신춘호 회장은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뒀지만, 쉼 없이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특히 ‘깡’ 시리즈의 시작인 새우깡은 신춘호 회장이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었다. 새우깡과 같은 농심의 역대 히트작품에는 신춘호 회장의 천재성이 반영됐다고 내부 직원들은 회고했다.
◆“한국 라면은 일본과 달라야 한다”
율촌 신춘호 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 공과 모친 김필순 여사의 5남 5녀중 셋째 아들이다.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부회장), 신동윤(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아모레퍼시픽 서경배회장 부인) 3남 2녀를 두었다.
1958년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故신격호회장을 도와 제과사업을 시작했으나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했다. 신춘호 회장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따라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춘호 회장의 브랜드 철학은 확고하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해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적인 맛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라면쟁이, 스낵쟁이라 부르며 직원들에게도 장인정신을 주문하곤 했다.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면 제품 개발이 수월했겠지만, 농심만의 특징을 담아낼 수도, 나아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성공장 설립때에도 신춘호 회장의 고집은 여실히 드러난다. 신춘호 회장은 국물맛에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선진국의 관련 제조설비를 검토하되, 한국적인 맛을 구현할 수 있도록 턴키방식의 일괄 도입을 반대했다. 선진 설비지만 서양인에게 적합하도록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농심이 축적해 온 노하우가 잘 구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주문한 것이다.
◆‘신라면’ 한국 라면신화의 시작
신춘호 회장은 브랜드 전문가로도 이름 높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등이 있다.
신춘호 회장의 대표작은 역시 신라면이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출시 당시에는 파격적인 이름이었다. 당시 브랜드는 대부분 회사명이 중심으로 돼있었고,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춘호 회장이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시장을 석권하는 국민라면으로 등극했고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신춘호 회장은 해외진출 초기부터 신라면의 세계화를 꿈꿨다. ‘한국시장에서 파는 신라면을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는 것이다. 한국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 고급의 이미지도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제품인데, 나라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품질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실제로 신라면은 미국시장에서 일본라면보다 대부분 3~4배 비싸다. 월마트 등 미국 주요유통채널에서는 물론이고, 주요 정부시설에 라면최초로 입점돼 판매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한국 특유의 얼큰한 맛으로 소비자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참 어렵게 꾸려왔다.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고 한여름 가마솥 옆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내 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같다.”
생전에 그가 남긴 말들이다. 신춘호 회장은, 2018년 중국의 인민일보가 신라면을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명품’으로 선정했을 때 그리고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가 신라면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했을 때,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고 전해진다.
[미디어펜=이서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