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소정 기자]“한미관계에서 한국은 미국에 가스라이팅(gaslighting)된 상태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최근 신간 ‘새로 읽은 한미 관계사-동맹이라는 역설’을 내면서 프롤로그에 이렇게 표현하자 논란이 일었다. 정부 차관급 인사가 할 소리는 아니란 지적이다.
하지만 김 원장은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한미동맹은 신화를 극복하고 국익 중심으로 세속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다시 한번 학자로서의 소신을 밝히고, “미국뿐 아니라 중국에도 철저하게 국익 차원에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그는 “비합리적인 압도 상태인 가스라이팅 현상은 최근까지 실제로 벌어졌다”면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국에서 방위비 분담금 받아내는 건 뉴욕에서 아파트 월세 받아내는 것보다 쉽다’라고 했던 발언, 한국의 모 의원이 미국 백악관 앞에 가서 문재인정부를 끌어내라는 시위를 벌이고, 또 다른 한국 의원은 북미 하노이회담 직전에 하노이에 가서 미국을 향해 절대로 북한과 타협하면 안 된다고 말한 사실이 그렇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미동맹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엄청난 자산인 것은 맞다. 하지만 때때로 미국정부나 한국 내부에서 동맹과 관련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이 나오고 동맹을 신화화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흔히 보수 정부는 미국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왔고, ‘반미·친북’이란 딱지가 붙은 진보 정부마저 자기규제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이젠 문재인정부와 바이든 정부니까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 (PG) 장현경 제작 일러스트./사진=연합뉴스
그는 “우리정부 인사가 미국에 갈 때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게 자체 조율해서 안건을 준비하더라”며 “바이든 정부는 불편해도 듣는 정부니까 지금 이 시기에 한미 간 쌓여있던 이견이 있다면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다.
김 원장은 “가스라이팅이라 표현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측과 얼마든지 논쟁할 수 있지만 책도 안 읽어보고 단어 자체만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아쉽다”고 했다. 오히려 한미관계에 가스라이팅이란 자극적인 단어를 감히 쓰면 안된다는 사고방식이 바로 가스라이팅의 증거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맹’인 미국은 물론 ‘전략적 협력 동반자’인 중국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 원장은 “흔히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한쪽은 동맹이고 한쪽은 경제 관계 때문에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고 표현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잘못된 전제”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는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하되 한중관계를 훼손해서도 안된다. 다만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은 좋지만 어느 정도 디커플링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원장은 “중국은 지난 한반도 사드 배치로 한국에 경제보복을 취했지만 당시 너무 강하게 한국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오히려 미국 쪽으로 떠밀었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중국은 이제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중립만 지켜줘도 고맙다고 말할 정도이다. 사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김 원장은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이 나오기 전 인권과 민주주의로 북한과 중국을 압박하는 것에 대해 “북미 대화가 성사되려면 북한은 물론 미국도 양보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미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으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원장은 “우리정부가 제시한 대로 북미 비핵화협상이 재개되려면 ‘싱가포르 선언’ 추인과 단계적 협상 원칙이 필요하다”면서 “그렇지 않고 북한이 비핵화할 때까지 제재 압박을 유지하겠다고 한다면 북핵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든 정부가 북핵 문제를 풀려면 늦어도 내년 초까지 개인적 인기에 연연해할 것이 아니라 북핵 해결 레거시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제일 좋은 시나리오는 북미 간 비공개 회담을 진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북미 대화를 공개적으로 진행하다 보면 세계의 이목이 쏠리면서 북한도 미국도 체면을 손상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이럴 경우 중간에 대화가 깨질 수 있다”며 “비공개적으로 북미 간 실무협상을 진행시켜서 어느 정도 타당한 교환 조건이 합의될 때 협상을 공개하고 정상회담으로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김 원장은 “오는 7월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북미 간 화해 제스처가 나오고, 올해 하반기에 실무 비공개 협상에 들어가서, 내년 초 하노이회담 3주년 시점에 북미가 지난 하노이에서 주고받으려고 했던 교환 조건을 조율해서 합의하면 '베스트 시나리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이럴 경우 북미는 이전보다 확대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 북한은 ‘영변 플러스’에다 핵동결을 더하고, 미국은 대북제재의 일부 해제에 더해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에 상응하는 ‘불가침 선언’이나 ‘종전선언’ ‘평화협정 개시’ 정도를 제시하면 최상의 협상 조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