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윤석열(尹錫悅) 정부의 첫 국무총리 후보자로, 한덕수(韓悳洙) 전 국무총리가 낙점됐다.
윤 당선인이 한 전 총리를 선택한 것은 다소 의외로 받아 들여진다.
자신의 최대 약점을 상쇄시켜 줄 수 있는 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함께, 대선에서 패배한 진영까지 아우를 수 있는 ‘통합형’ 인물이라는 점에서, 인사청문회 통과 가능성까지 고려한 ‘다목적 포석’으로 읽힌다.
한 후보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박사를 거친, 대표적인 관료 출신 ‘경제통’이다.
또 주미대사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를 거쳐, 국제 경제와 통상에 밝은 ‘미국통’이다.
특히 고(考)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국무총리였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주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사람이었던 데다, 출신지도 전주여서,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도 쉽사리 ‘발목’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총리 후보자 지명 직후 발표한 소감에서도 ‘소통과 협치, 통합’을 강조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뿐’일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사진=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제공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사실상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을 포함, 언론 등에서 거론되고 있는 장관 후보자들은 하나 같이 국민의힘 또는 보수진영 사람들 ‘일색’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국회를 지배하고 ‘입법권’을 쥔 민주당의 협조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게 분명하다.
벌써부터 민주당은 윤 당선인의 기대와 달리, 한 총리 후보자에게 조차 '송곳 검증’의 칼을 들이대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러니 다른 장관 후보자들은 대거 ‘낙마 위기’에 빠질 것은 자명하다.
물론 당선인도 챙겨줘야 할 ‘공신’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속된 말로, 정권이 바뀌면 ‘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줄을 선다고 한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소통과 협치다. 진정한 협치(協治) 인사(人事)가 시급한 이유다.
문재인 정권이 ‘끼리끼리’ 인사로 국정을 망치고, ‘내로남불’ 인사로 정권을 내 준 것을 윤 당선인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또 하나, 더욱 각성할 것이 있다.
윤 당선인은 당내 경선 및 대선 과정에서, 세금제도를 뜯어 고치겠다고 누차 공약했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관련 세제다.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에 대한 각종 지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 세제의 가장 큰 대상자는 ‘월급쟁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다수’이고, 월급쟁이들이 낸 소득세가 이 나라의 가장 큰 ‘돈 줄’이다. 이들이 낸 세금으로 정부는 자영업자에 ‘선심’도 쓰고, 안보도 강화할 수 있다.
올해 초 ‘연말정산’을 한 봉급생활자는 대략 2000만 명으로, 총 인구의 40% 정도다. 자영업자의 세 배가 넘는다.
그런데 이 거대한 ‘보통 사람들'은 항상 정부 정책, 특히 세제에서 ‘홀대’와 ‘푸대접’을 당해 왔다. 목소리가 크지 않은, ‘조용한 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월급 탈 때 마다 근로소득세를 아예 먼저 떼고 받는다. ‘유리 지갑’이다.
정부 입장에선 ‘만만한’ 집단이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요긴하게 호주머니를 털어 갈 수 있는, 그야말로 ‘호구’인 셈이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도, 지난해 걷힌 근로소득세는 무려 47조 2000억원으로, 1년 새 6조 3000억원이나 늘었다. 지난 10년 간 근소세는 28조 8000억원 늘어, 증가 폭이 전체 세목(稅目) 중 단연 1등이다.
근소세가 이렇게 많이 늘어난 원인은 따로 있다.
당장 ‘1200만-4600만-8800만원’을 기본 틀로 하는 소득세 구간이, 15년 째 그대로다. 해마다 물가가 오르고 화폐 가치는 떨어진다, 세율과 구간을 그대로 두면, 봉급생활자는 가만히 앉아서 세금을 더 물어야 한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조금씩이라도 세율과 구간을 조정, 근소세 부담을 낮춰줬다. 그러나 박근혜, 문재인 정부는 월급쟁이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더욱이 박근혜 정권은 지난 2013년 재정 보강을 위해 ‘비과세·감면’을 줄인다며,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면서, 공제액을 확 줄여버렸고, 그만큼 봉급생활자들의 세 부담은 급증했다.
사실상의 ‘증세’였다.
증세는 복지를 내세우는 진보정권의 ‘아이콘’이다. 그런데 보수정권이 증세를 감행한 것이다.
당시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게, ‘깃털’을 살짝 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증세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2015년 연말정산 때, 월급쟁이들이 집단 반발했다. 특히 정부를 움직인 것은 '조용하지 않은 월급쟁이'인 언론사 기자들이었다. 이에 당황한 정권은 급히 보완책을 발표했지만, 저소득층 세금을 조금 깎아주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결국 증세는 고스란히 중산층의 부담으로 남았다. 깃털을 뺀 게 아니라, 해마다 뭉텅이로 뽑아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가렴주구(苛斂誅求) 수준이다.
그 결과는 어찌 됐을까?
누구나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의 ‘압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당은 이른바 ‘옥새 파동’을 겪으며, 민주당에 ‘참패’했다. 이어진 지방선거, 대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만해 보이는 ‘호구’들의 민심(民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실패도 표면적으로는 부동산 때문인 것 같지만, 사실은 월급쟁이들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소득세 구간도, 세액공제도 그대로 뒀던 것이다.
윤 당선인의 근소세 관련 공약은 뭔가?
1인 당 기본공제 200만원 인상, 공제 부양가족 25세 상향 정도가 있다. ‘땜질’ 수준이다.
박근혜, 문재인처럼 정권을 잃지 않으려면, 윤 당선인은 정말로 정신 차려야 한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수의 사람들만 생각할 게 아니다. 곳간은 다수 월급쟁이들한테서 나온다.
당장 5월 지방선거가 있다. '의회 권력'을 빼앗긴 상황에서 '지방 권력'마저 내 준다면, 윤 정부는 시작부터 식물정권(植物政權)으로 전락한다.
지금은 보수 진영이 ‘승리감’에 도취돼 있지만, 표 차이는 그야말로 ‘초 박빙’이었다. ‘단 한 발’만 삐끗하면, 정권이 날아간다는 사실을, 윤 당선인도 잘 알 것이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