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노래방에서는 노래 잘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고 댄스홀에서는 춤을 잘 춰야 인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골프장에서는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이 왕이다.
나 역시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최근 이런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경험을 했다. 골프를 잘못 쳐도 멋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골프를 잘못 치면서도 최선을 다하며 골프를 즐기는 자세는 존경심을 자아냈다.
친구가 대동한 동반자는 50대 초반으로 골프를 배운지 5년 정도 된다고 했다. 잘 하면 보기플레이를 한다고 털어놨다. 그의 스윙은 부드러웠으나 임팩트가 부족해 비거리는 짧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방향성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다운스윙이 일정한 궤도를 그리지 못함에 따라 짧은 어프로치도 실수하는 경우도 잦았다.
고수에 눈에 짚이는 여러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골프를 하는 강점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 샷이 나오면 스스로 박수를 치며 결과를 자축했다. 다음 샷을 할 때까지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 결과를 되새김질 하듯 음미하는 모습이 역연했다.
그렇다고 미스 샷을 했다고 태도가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잠시 계면쩍은 듯 씨익 미소를 지어보이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아무 거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해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집중했다.
신경 쓰는 것이라곤 혹시 자신의 플레이가 동반자들의 경기 진행에 방해를 주는 것은 아닐까 살피는 정도였다. 볼이 러프에라도 들어가면 캐디보다 먼저 달려가 볼을 찾고 볼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미련 없이 로스트 볼을 선언하는 등 경기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동반자의 플레이에 방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무엇보다도 그는 스코어에 정직했다. 그는 어느 홀에서 한참 헤맨 뒤 캐디가 적은 스코어카드를 보곤 “두 타가 날아갔다”며 정확히 기재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캐디가 스코어를 적기 전에 자신의 스코어를 신고했다.
▲ 스코어는 가장 나빠도 골프에 임하는 자세와 즐기는 자세, 그리고 동반자를 배려하는 자세 가 진정 골퍼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삽화=방민준 |
일행은 어느새 최선을 다해 게임을 풀어가면서 라운드 자체를 즐기는 그의 자세에 전염이 되어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드러내는 일 없이 전혀 새로운 차원의 골프를 할 수 있었다.
이날 라운드의 백미는 후반전에 들어가기 직전 나타났다.
그는 일행 3명이 그늘집에서 꽤 긴 시간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는데도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늘집에서 막 일어서려는데 그가 헐떡거리며 나타났다.
“이거 한번 발라보시고 이 밴드로 꽉 조여보세요.”
그는 라운드 중에 손목의 통증을 호소했던 동반자에게 약봉지를 내어놓았다.
골프장 입구 근처에 약국이 있어 금방 차를 운전해 갔다 왔다고 했다.
일행은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손목 통증을 호소했던 친구는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넋을 잃고 그가 권하는 대로 손목에 연고를 바르고 꽉 조이는 압박붕대를 감았다.
“한결 좋아지는 것 같은데요!”
이 말을 들은 그의 표정이 그렇게 행복해보일 수가 없었다.
후반 들어 일행은 그의 스코어와는 상관없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스코어에 매달려 신경전을 벌여온 자신들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이날 라운드의 주인공은 단연코 그였다. 스코어는 가장 나빴으나 골프에 임하는 자세와 즐기는 자세, 그리고 동반자를 배려하는 자세 등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골프를 못 쳐도 얼마든지 우아한 골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라운드였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