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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세계사] 왕안석의 실패한 개혁이 주는 교훈은?

2015-05-03 10:08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한 사회의 구조와 제도들은, 아무리 좋은 것들이라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 사회의 성격과 환경이 바뀌면, 효율이 떨어지거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들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개혁은 무척 어렵다.

개혁은 물론 큰 변화를 뜻하고, 변화는, 비록 좋은 경우에도,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물질적 및 심리적 비용을 강요한다. 특히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저항은 으레 거세다. 개혁의 시도들이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은 그래서 이상하지 않다.

동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개혁의 시도들은 11세기 중국 송왕조의 "신법"과 19세기 일본의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이다. 전자는 실패했고 후자는 성공했다. 그 두 시도들은 개혁에 관해서 소중한 교훈들을 말해준다. 실패한 경우는 실패의 까닭들에 대해서, 성공한 경우는 성공의 요인들에 대해서.

당 초기에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중국은 당 말기에 큰 혼란으로 국력이 약해졌다. 907년 당이 망하자 60년 동안 중국 중심부에선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왕조들이 번갈아 서고, 변두리에선 열나라들이 서로 다투는 오대십국의 혼란기가 나왔다. 그런 혼란은 후주의 권신 조광윤이 송을 창건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오랜 혼란과 분열로 중국 사회는 크게 피폐했다. 자연히 송은 힘이 아주 약해서 한번도 기세를 떨치지 못했다. 게다가 후진시대에 국방의 요충인 동북부를 굴안족 왕조인 요에게 내준 탓에, 좋은 자연적 경계를 잃고 늘 요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태조 조광윤이 세운 기본정책도 사정을 악화시켰다. 오대엔 지방의 절도사들이 큰 힘을 가졌고, 왕조들마다 힘센 절도사들의 배반으로 망했다. 그리고 무인들이 나라를 다스려서, 갖가지 폐단들이 나왔다. 그런 사정을 바꾸려고, 태조는 줄기인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가지들인 지방조직들을 약화하는 "강간약지"를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국경의 군신들을 폐쇄하고 중앙의 금군을 강화했으며, 문인들을 중용해서 군내의 지휘관들도 대부분 문인들을 임명했다.

당시엔 그런 정책이 자연스러웠고 태조가 기대한 효과들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이 그 정책을 바뀌는 환경에 맞게 다듬지 못해서 치명적 문제가 나왔다. 바로 군사력의 약화였다. 송이 건국한 10세기엔 요가 흥륭하고 있었다. 그리고 11세기엔 서쪽에서 서하가 일어났다. 송은 그 두나라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막대한 세폐를 바치기로 하고 화의를 맺었다. 크게 늘어난 군비와 막대한 세폐로 송의 재정은 점점 어려워졌고 송은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런 위기는 당연히 개혁의 움직임을 불렀다. 1043년 인종은 대신들에게 개혁의 방안을 내놓도록 요구했고 범중엄은 개혁의 원칙들을 기술한 "십사소"를 올렸다. 그 글에서 그는 외적을 물리치려면 먼저 나라가 안정되어야 하고, 나라가 안정되려면 관리들이 깨끗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설파했다.

인종은 그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특권을 누리던 사대부 계급은 그의 주장에 반대했고 협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별다른 준비도 없이 시작한 범중엄의 개혁은 겨우 한햇동안 추진되다가 그의 면직과 함께 끝났다.

1067년 신종이 즉위하면서 개혁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종은 영명하고 과감한 임금으로 일찍이 개혁의 포부를 밝혔던 왕안석을 중용했다. 왕안석은 신종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조치들을 잇따라 시행했다. "신법"이라고 불린 이 조치들은 주로 경제발전, 군사력 증강, 그리고 교육의 확대를 도모했다.

신법에 포함된 조치들은 모두 적절했다. 그러나 신법은 범중엄의 개혁과 마찬가지로 이내 보수세력의 거센 저항을 만났다. "구당"이라고 불린 그들은 사마광, 한기, 구양수, 정호, 소식과 같은 이들로 명망이 높은 북부출신 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은 왕안석을 현실을 모르는 인물로 폄하하고 협력을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왕안석은 주로 남부출신 사대부들을 기용해서 신법을 추진했다. 왕안석 자신이 남부출신이었으므로 두 세력의 반목엔 지역주의적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이런저런 요인들로 개혁이 진행되면서 두 세력들 사이엔 극심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문제를 악화시킨 것은 너그럽지 못한 왕안석의 성격이었다. 그는 반대파들을 포용하려고 애쓰지 않고 모두 속류로 몰아붙였다. 그래서 신법은 넓고 단단한 인적 기반을 얻지 못했다.

개혁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왕안석이 제도들을 바꾸는데만 마음을 쓰고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엔 별로 마음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의 둘레엔 능력은 있으나 도량이나 신의는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실제로 신법을 반대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법 자체보다는 그것을 추진한 사람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왕안석 자신은 과감했고 깨끗했지만 신법을 추진하는 관리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부정으로 인민들은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1074년 심한 가뭄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자 신법에 대한 비난이 부쩍 거세어졌다. 마침내 신종은 왕안석을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간청으로 신당의 여혜경이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서 신법은 계속 시행되었다. 왕안석은 이듬해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그를 시기한 여혜경의 간계로 1076년에 다시 면직되었다.

왕안석이 자신이 키운 인물에 의해 쫓겨났다는 사실은 그가 쓴 사람들의 됨됨이를 잘 말해준다. 1085년에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이내 구당이 득세하고 신법들은 하나씩 폐지되었다. 그래서 어려운 재정을 회복시키는데 다소 공헌을 한 것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신법은 끝났다.

왕안석은 1021년에 중국 남부 강서성에서 태어났다. 1042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중앙정부로 나아가지 않고 지방관에 자원했다. 1052년엔 인종에게 정치적 포부와 구체적 정책들을 밝힌 "만언서"를 올려 정치가로서 이름을 얻었다.

신종의 부름을 받아 한림학사가 되었고, 1069년엔 부재상인 참지정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었다. 그 뒤로 두차례에 걸쳐 도합 7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엔 남쪽에서 평민으로 소박하게 살다가 철종의 즉위와 함께 신법들이 하나씩 폐지되는 것을 보면서 1086년에 죽었다.

그는 정치적 식견만 갖춘 것이 아니라 시문에도 능해서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무릉도원의 옛일을 빌어서 치란흥망이 덧없고 폭정이 끊이지 않는 것을 개탄한 "도원행"과 힘이 약한 한 황실이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낸 궁녀 왕소군의 처지를 그린 "명비곡" 두 수가 널리 알려졌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그것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도 훌륭해야 한다. 그것이 왕안석의 포부와 좌절이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나라가 큰 어려움을 맞은 지금, 한때 자주 들리던 "인사가 만사다"라는 말은 우리 가슴에 얼마나 쓸쓸하게 울리는가.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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