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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롤링스톤스·비치보이스…'경쟁'이 빚은 별들

2015-05-04 07:12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예술에 있어서는 저마다의 취향과 해석이 있으므로 경쟁의 공정한 룰을 부르짖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다면 예술인들은 경쟁을 악으로 규정할까? 오히려 경쟁이야말로 예술의 질을 높이고 예술가의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인들이 뭉쳤다.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2015년 4월 27일 화요일 오후 2시, '예술인이 본 경쟁, 경쟁은 왜 아름다운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차라리 죽지 그래> 의 저자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미디어펜 이원우 기자,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각자의 시선에서 예술 분야의 '경쟁'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고 시장경제제도연구소 김이석 소장과 경희대 경제학과 안재욱 교수가 발제문에 대해 코멘트 했다. 본 행사를 통해 수렴된 내용들은 올해 중 책으로도 발간될 예정이다.

아래는 60년대 미국 팝음악과 경쟁의 관계를 흥미롭게 밝혀낸 남정욱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

1964년 2월 7일 1시 35분, 비틀즈를 태운 비행기가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영국 대중음악의 미국 침공이 시작된다. 재기발랄하고(기자 회견장에서 노래를 청하자 존 레논은 돈을 먼저 달라고 받아쳤다) 기상천외하며(베토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링고 스타는 대단히 멋진 분이며 특히 그 분의 시가 마음에 든다고 답변) 무엇보다 수년에 걸친 가혹한 음악적인 트레이닝을 거친(이들은 주정뱅이들이 떠들어 대는 클럽에서 밤새도록 연주했다) 이들은 거대한 해일처럼 미국 시장을 강타했다.

2월 9일 밤 비틀즈는 TV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다. 7천 3백만 명이 시청했고 쇼가 방영되는 동안 미국 전역에서 십대가 일으킨 주요 범죄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며칠 뒤 이들이 두 번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을 때 시청률은 72%까지 치솟았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이들을 보기 위한 2천 여 소녀 팬들이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렸고 대중음악 최초의 카네기홀 공연에는 록펠러 여사까지 관중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해 4월 4일 빌보드 차트 1위부터 5위까지가 비틀즈의 곡이었다. 미국 음반 전체 판매량의 60%가 비틀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그저 소녀들에게 인기 있는 보이 그룹이었을 뿐 뮤지션은 아니었다.

미국에 도착한 비틀즈는 두 명의 미국 음악인을 만난다. 라스베이거스 전속 가수였던 엘비스는 비틀즈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또 하나는 미국 포크의 제왕이었던 밥 딜런이었다. 존 레논을 제외한 세 명의 비틀은 별 느낌이 없었지만 존 레논은 달랐다.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서야 존 레논은 자신들이 불러대고 있는 노래의 가사가 얼마나 치졸한 것인지 실감했다.

앞의 ‘She loves you’가 비틀즈, 두 번째 ‘Blowing in the wind’가 밥 딜런의 것이다.

난 네가 실연당했다고 생각하지 근데 난 어제 그녀를 봤어
그녀는 네 생각을 하고 있더라 내게 뭐라고 했거든
그녀는 너를 사랑한대 너도 그게 좋다는 걸 알지?
그래, 그녀는 너를 사랑해 넌 틀림없이 기뻐할 거야
그녀는 너를 사랑해 예 예 예 그녀는 너를 사랑해 예 예 예
- ‘She loves you’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하나
너무나 많은 죽음이 있다는 걸 알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나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날려가지 바람에 날려가
- ‘Blowing in the wind’

물론 팝과 포크라는 장르적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영국 노동자 계급의 반항아들이 지어낸 가사가 미국의 저항적 대학생들이 만들어 낸 노랫말을 넘어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서 그러한 특수성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존 레논은 그 차이를 읽었고 다행히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다.

1965년 비틀즈는 초기 명반 중의 하나인 ‘Rubber soul’을 발매한다. 일단 비틀즈는 이 앨범에서 단 한 곡의 싱글 커트(이른바 도너스 판)도 하지 않았다. 팬들에게 앨범 전체를 하나의 음악으로 받아 들여 달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뭘 해도 예쁠 때였으므로 소녀 팬들은 기꺼이 이들의 요청을 수용한다.

가사를 보자. 처음의 가사는 64년 2월의 미국 데뷔곡이고 뒤의 두 곡은 ‘Rubber soul’의 수록곡이다.

난 무언가 얘길 할 거야 너도 이해하겠지
그럼 그걸 말할 거야 나는 네 손을 잡고 싶어
- ‘I want to hold your hand'

지나간 사람들과 일에 애정을 잃지 않고 나는 가끔 멈추어 그들을 생각할 거야
삶 속에서 너희들을 더 사랑할거야
- ‘In my life’

그녀가 젊었을 때 명성이 쾌락을 가져온다는 얘기를 들었을까
남자가 여가 시간을 갖기 위해 부서지게 일해야 한다고 할 때 그 말을 이해했을까
그가 죽었을 때도 여전히 그 얘기를 믿을까
- ‘Girl’

이제 비틀즈는 사랑 대신에 사람을 이야기 했고 일상 대신에 인생을 이야기했으며 사랑 이야기를 하더라도 다의적으로 풀어갔다. 그들의 노래가 단순히 틴에이저의 파티용이 아니라 어른들이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감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 선 것이다.

화학반응은 비틀즈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밥 딜런 역시 자신의 한계와 대중들이 만들어 놓고 소비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질리던 참이었다. 비틀즈를 만나고 밥 딜런은 음악에서의 ‘사운드’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랫말을 담기에 프로테스트 포크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맨 처음 비틀즈의 노래를 들었을 때 그들이 앞으로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밥 딜런은 65년 다섯 번째 앨범인 ‘Bring It All Back Home’에 일렉트릭 사운드를 도입한다. 사운드는 강렬해졌고 노랫말은 더욱 거칠게 살아났다. 같은 해 7월 25일 밥 딜런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일렉트릭 기타를 매고 관중들 앞에 선다. 야유와 계란이 동시에 날아왔다.

밥 딜런은 그렇게 침몰했을까. 아니다. 얼마 후 있은 포리스트 힐스 공연에서는 정반대의 광경이 연출되었다. 관객들은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밥 딜런에게 열광했고 더 이상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기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포크의 시대가 끝나고 록의 시대가 왔다는 그의 판단에 대중들이 동의를 한 것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포크의 노랫말이 일렉트릭 사운드에 실리자 그것은 전혀 다른 음악이 되었다. 저항과 주장에서 벗어나 풍자와 냉소 그리고 자기 연민이 담긴 밥 딜런의 가사는 더욱 힘을 얻었다. 수많은 후배들, 특히 지미 헨드릭스의 리메이크로 유명한 곡이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는 법이야
이제 넌 겉으로 드러낼 것도 감출 비밀도 없어
자 그만 홀로 서는 게 어때? 갈 곳도 없고 완전히 무명인 채로
구르는 돌처럼 사는 거 말이야
- ‘Like a rolling stone(65)’

2.

밥 딜런 뿐이 아니었다. ‘Rubber soul’로 비틀즈가 한 차원 높은 영역에 진입하자 경쟁자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원래 예술에서는 문제적 개인이자 작품이 등장하면 그때부터는 그게 기준이 되는 법이다).

하나는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의 후발 주자였던 롤링 스톤즈다. 비틀즈가 해맑은 미소로 ‘네 손을 잡고 싶어’를 외칠 때 그들은 ‘만족할 수 없어’하며 이죽거렸다.

난 만족할 수 없어 어떤 아가씨로도 난 만족할 수 없어
아 노력해 봐 그래 시도해 봐 해 보는 거야
난 지금 어떤 소녀를 트라이하는 중이지
난 노력해 노력한다고
- ‘Satisfacton(65)’

손만 잡고 자겠다는 비틀즈와 달리 노골적으로 ‘자빠뜨리고 싶다’며 야욕을 불태우는 롤링 스톤즈에게 기성세대는 경악을 했다. 우려와 공격이 이어졌지만 롤링 스톤즈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이런 노래로 답변을 대신했다.

난 너의 벌집 주위를 날고 있어
우리 같이 달콤한 꿀을 만들자고
날 안으로 들여보내줘
- ‘King bee’

기성세대는 롤링 스톤즈를 포기했다. 대신 자신들의 자녀가 그들의 음반을 듣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콘서트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수동적인 통제로 나섰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재미있는 건 반항을 앞세운 이들의 이미지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정말 불량했던 건 비틀즈였다. 롤링 스톤즈는 멤버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성장했고 대학 교육까지 받은 인텔리들이었다. 그들은 세치 혀로 이슈만 만들어내는 어설픈 그룹이 아니었다.

‘Rubber soul’을 듣고 정신이 확 든 이들은 그때까지 해왔던 리듬 앤 블루스의 리메이크를 중단하고 처음으로 앨범 전체를 자신들의 곡으로 채웠다. 그게 이들의 초기 명반인 ‘Aftermath’다. 일단 레논 -메카트니 콤비에 맞먹을 수준의 작사 작곡 역량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믹 재거 - 키스 리처드 콤비의 곡들은 말랑말랑하지 않은 대신 시큼하고 끈적거리는 멜로디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기타를 맡은 브라이언 존스는 악기 연주에 시타르, 덜시머, 마림바를 도입했다. 사운드는 훨씬 풍족해졌고 다채로운 음색은 예전의 어떤 밴드의 어떤 앨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신선한 것이었다. 앨범에는 11분짜리 대곡인 ‘Going Home’도 수록되어 있는데 비틀즈보다 뭐 하나라도 더 낫게 만들자는 과욕이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앨범으로 롤링 스톤즈는 카피곡을 부르는 사악한 악동들에서 리듬 앤 블루스를 기반으로 하는 정통 록 밴드로 올라선다. 여성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가사는 여전했지만.

내 손에 잡혔지 전엔 날 거부하던 여자
내 손에 쥐었지 전엔 날 깔보던 여자
바뀌었지 그녀는 이제 내 맘대로야
- ‘Under my thumb’


저 한심스러운 인간을 봐
그녀가 머리를 물들이든 어떤 색깔의 옷을 입든 중요치 않아
그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족속이야
- ‘Stupid girl’

3.

‘Rubber soul’에 한 방 먹은 또 한 팀은 미국 밴드 비치 보이스였다. 미국 서쪽 끝의 캘리포니아는 축복받은 땅이다. 일 년 내내 화창한 날씨와 끝없는 여름은 젊은이들이 놀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들에게 해변은 항상 파티가 열리는 공간이었고 여기서 탄생한 음악이 서프(surf) 뮤직이다.

   
▲ 비틀즈의 문제작 'Rubber Soul'

비치 보이스는 이 서프 사운드의 절정이었다. 비치 보이스는 악기 위주였던 서프 사운드를 보컬 중심으로 바꿔 놓았다. 최대의 히트곡인 이 노래를 통해 비치 보이스는 서프 사운드의 제왕으로 등극한다.

우리는 서프 보드를 닦죠
6월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 모두는 벌써 여름으로 가 있어요
사파리도 하구요
선생님께 우리가 파도타기를 하고 있다고 말해 주세요
서핀 USA
- ‘Surfin' USA(63)’

도대체 고민이라는 게 안 느껴지는 가사다. 50년대 로큰롤처럼 불순한 구석도 없었다. 반항하지 않을 테니 그냥 해변에서 놀게 내버려 두세요, 라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듣던 것이 당시 캘리포니아의 바닷가 풍경이다. 균열이 왔다. 비틀즈의 ‘Rubber soul’은 비치 보이스의 리더였던 브라이언 윌슨을 충격에 빠뜨린다.

이제까지 자기들이 해왔던 음악을 아이들의 장난질로 만들어버린 비틀즈를 듣고 브라이언은 ‘Rubber soul’ 타도를 이마에 둘러맨다. 66년 5월에 발매된 ‘Pet sounds’는 이런 브라이언의 야심찬 기획이 탄생시킨 걸작이다. 거의 브라이언의 개인기로 채워진 이 앨범에는 수록곡 어떤 곡에서도 이전의 비치 보이스의 음색을 찾아 볼 수 없다.

노래들은 확실히 느려졌고 전문 작사가인 토니 애서에게 의뢰한 노랫말은 자기 성찰로 가득 차 있었다. 소외를 다뤘고 쓸쓸했으며 후회와 번민이 넘쳐흘렀다. 이름만 같지 완전히 다른 밴드였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발전은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른바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라는, 소리를 계속 쌓아올리는 레코딩 기법은 더빙의 무한 반복으로 말 그대로 사운드의 벽을 쌓았고 이것은 나중에 레코딩 업계에 일렉트로닉 물결의 유행을 가져온다. 가사부터 보자.

만일 당신이 나를 떠나게 된다면
그래도 삶은 계속 흘러가겠지만, 나를 믿으세요.
세상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할 거에요
사는 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God only knows’

여전히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파도타기가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일취월장한 가사다. 서프 사운드와 전혀 무관한, 프렌치 호른과 썰매방울 소리를 깔며 노래한 이 복잡하고 사이키델릭한 곡으로 브라이언은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폴 메카트니가 “이제까지 쓰여진 노래 가운데 최고의 곡”이라는 찬사를 보내 온 것이다.

경쟁자를 타도하려고 만든 앨범이 경쟁자로부터 찬탄을 끌어냈으니 제대로 성공을 거둔 셈이다. 평단은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Pet sounds’는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갔던 것이다. 당연히 이 앨범의 진가는 세월이 흐른 한참 뒤에야 나타난다. 레코딩 업계 종사자들은 ‘Pet sounds’를 통해 스튜디오가 단순히 녹음실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음악 도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한 장의 앨범으로 비치 보이스는 그저 그런 서프 밴드 중의 하나가 아닌 록의 전설 중 하나에 그 이름을 새길 수 있었다. ‘Rubber soul’에서 시작하여 ‘Aftermath’와 ‘Pet sounds’로 전개된 60년대 후반의 르네상스는 밥 딜런에게 자극을 받은 한 장의 앨범이 주변을 선동하여 연달아 명반을 출연시킨 음악적 경쟁의 산물이었다.

4.

1967년 비틀즈는 ‘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하 페퍼 상사)’를 발매한다. 이 앨범으로 비틀즈의 라이브 시대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끝난다.

비틀즈의 음악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것은 투어 시절과 투어가 중단된 시절로 나누는 것인데 즉 스타디움에서 ‘네 손을 잡고 싶어’ 같은 노래를 불러 소녀 팬들을 떼로 기 절시키던 시절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이다(‘I want to hold your hand’와 이 앨범의 수록곡 ‘A day in the life’는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도 결코 같은 밴드의 노래가 아니다).

대중과 평론가들은 열광했고 학자들까지 논의에 가세했다. 스탠포드대의 데이비 네이피어 교수는 “고독의 시대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과 끔찍함의 표현”이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앨범을 평가했고 심리학자 톰 르렌드는 “존재의 무의미함을 실존적으로 이야기 했다”며 모호함에 한 겹을 덧입혔다.

서구 문명이 하나의 사건을 놓고 이처럼 단일한 견해를 내놓은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서구 문명사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누군가의 촌평처럼 비틀즈는 이 한 장의 음반으로 록 음악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 넘었고 대중음악을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시켰다.

알려진 대로 ‘페퍼 상사’는 ‘콘셉트 앨범’이다. 중추 개념(central concept)을 가지고 수록곡을 이어가는 것이 콘셉트 앨범의 제작 방식인데 재미있는 것은 폴 메카트니가 이 힌트를 비치 보이스의 ‘Pet sounds’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Rubber soul’에서 ‘Pet sounds’를 거쳐 다시 ‘페퍼 상사’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를 밟은 셈이다.

‘페퍼 상사’의 곡들은 한 두곡을 제외하면 존과 폴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둘은 가사와 멜로디를 서로 주고받으며 곡을 완성했다. 한 사람이 이건 어때? 하면서 가사를 한 줄 던지면 다른 한 사람이 단어를 빼거나 더했으며 멜로디의 보정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수록곡 중의 하나인 ‘It's getting better’는 그 대표적인 경우다.

한 사람이 느슨하게 작업을 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이 시대의 걸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존과 폴의 경쟁이 비틀즈를 비틀즈처럼 만들었다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비치 보이스가 ‘Pet sounds’를 끝으로 음악적인 성장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부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 ‘Rubber soul’ 때와 마찬가지로 벌어졌을까. 아니다. 시도는 있었으나 ‘페퍼 상사’에 필적할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롤링 스톤즈는 67년 11월, 누가 봐도 ‘페퍼 상사’에 대한 의식이 틀림없는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를 발매했지만 사이키델릭은 롤링 스톤즈의 영역이 아니라는 평론가들의 쓰라린 평가만 들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스튜디오에서 700시간을 투입한 ‘페퍼 상사’를 넘어서는 노력이 롤링 스톤즈에게는 없었다. 비틀즈는 ‘It's getting better’를 녹음할 당시 하루에 백 번을 연주했으며 노래 부분은 천 번을 넘게 불렀다.

경쟁심만으로 모든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페퍼 상사’와 비틀즈는 이제 경쟁이 없는 단계로 들어선 것일까. 그렇지 않다. 비틀즈의 경쟁 상대는 항상 비틀즈였다. 팬들은 언제나 더 높고 새로운 단계를 원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들이 ‘White Album’ 그리고 ‘Abbey Road’다(더 높다는 표현에는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나을 듯).

비틀즈의 후기 걸작 세 작품인 ‘페퍼 상사’와 ‘White Album’ 그리고 ‘Abbey Road’는 표방하는 세계관이 다르고 아예 팬 층도 다르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틀즈는 그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장르에 가깝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경쟁자로 타자화(他者化)시키게 되는 경로는 음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 경쟁이 유난히 피 마르고 고달프다는 공통점까지도 포함해서.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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