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 복거일 소설가 |
한 세기와 한 천년기(千年期, millennium)가 함께 끝나는 해인지라, 올해엔 지난 세기와 천년기를 요약하는 목록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런 목록들을 만드는 일은 과거를 살피고 평가하는 기회일 뿐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다듬는 계기이기도 한다.
과거를 살피고 평가하려면, 우리는 먼저 사건들과 업적들의 중요성을 재는 척도인 우리의 가치 체계를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게 다듬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목록들은 또한 우리의 가치 체계의 있는 편향과 굴절을 드러내서 우리 마음의 지형에 대해 흥미로운 단서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해방 뒤의 중요한 인물들을 뽑는 목록들에서,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는 언제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보다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1930년대 이후 임시정부를 거의 혼자 힘으로 이끌었지만 해방 뒤엔 한반도의 정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백범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주도했고 대통령으로 새 나라를 이끈 우남보다 중요한 인물로 여긴 것은 아무래도 공정한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 평가는 사람들의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한 사람의 인품의 그의 업적에 미치는 영향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올해도 거의 다 지난 지금, 그런 목록들을 압축해서 '2천년기를 가장 잘 대표할 인물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후보로 추천될 만한 인물은 물론 많을 터이다. 그러나 지난 천년기가 사람의 삶에서 과학이 중심적 자리를 차지했던 시대임을 생각하면, 대표적 인물로는 과학자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보다 근대 과학을 잘 상징하는 사람은 없다.
천 년 전 10세기엔 중국, 중동, 그리고 유럽처럼 발달된 기술을 가진 문명의 중심지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과학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초엽에 유럽에서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 일어나 현대 과학이 싹을 내밀었다.
두 세기 동안 이어진 그 혁명은 과학적 지식을 많이 낳았을 뿐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을 세워놓았다. 그래서 그뒤로 과학자들은 명료한 진술, 분류, 반복가능성,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동의를 통한 평가, 실험, 계측 및 인과법칙의 추구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과학적 방법을 따르게 됐다.
갈릴레이는 과학 혁명의 한 가운데를 살면서 그것의 정신을 구현했고 그것의 성공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두 가지 점들에서 위대했다. 먼저, 그는 많은 발견들로 과학의 발전에, 특히 천문학과 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막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해서 천체 연구에 처음 쓴 사람이었고, 자연히, 천문학 분야에서 많은 발견들을 했다.
특히 그는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지동설이 옳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을 발견했다. 천동설과 지동설을 공평하게 다루라는 교황의 엄명을 충실히 따르며, 그는 「두 주요 세계 체계들의 대화(Dialogo dei Massimi Sistemi」를 썼는데, 그의 지동설에 대한 설명이 하도 훌륭해서, 그책은 온 유럽에서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지동설의 전파에서 기득권을 지닌 세력들은 큰 위협을 느꼈고 그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특히 야소회(耶蘇會, Societas Jesu)의 공격은 거셌으니, 그들은 갈릴레이의 주장이 “루터와 칼뱅을 합친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결국 종교재판소의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지동설을 취소하도록 강요된 일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또한 그는 뒤에 뉴턴의 제1법칙과 제2법칙이 된 원칙들을 실질적으로 발견했고, 인력과 운동에 관한 그의 선구적 업적 덕분에 '현대 역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리고 실험과 수학적 분석을 결합한 그의 창조적 연구는 그에게 '실험 물리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천문학자들이 점성술로 생계를 꾸려가던 시대에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다는 것은 경이롭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의 분야에서 갈릴레이가 한 공헌은 그런 과학적 업적을 능가한다. 당시엔 아리스토텔레스를 본받아 논리적 진술에 의존하는 방법(logico-verbal approach)이 정통이었다.
그는 그런 정통에 맞서 실험, 계측, 그리고 수학적 분석을 중시하는 수학적 합리주의(mathematical rationalism)를 다시 도입했다. 그를 비판한 야소회 학자의 글에 반론을 펴면서 그가 한 “자연의 책은 수학적 문자들로 씌어진다”는 말은 과학의 본질에 관한 가장 심오한 발언들 가운데 하나다.
그 뒤의 역사가 잘 말해주듯, 과학 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고 2천년기에선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그 혁명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했고 그것의 성공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과학자였다. 그런 사정은 갈릴레이를 2천년기의 대표적 인물로 뽑을 충분한 근거가 되지만, 실은 또 하나의, 아주 시적인 이유도 있다.
새 천년기에 인류가 탐험하고 정착할 새로운 변경(Frontier)은 우주 공간이다. 그리고 3천년기를 대표할 인물은 아마도 우주 공간의 탐험에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쌓은 사람일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갈릴레이는 처음으로 망원경으로 우주 공간을 살핀 사람이다. 비록 그는 몰랐지만, 망원경으로 하늘을 본 순간, 그는 인류에게 열린 마지막 변경인 우주 공간의 탐험을 시작했던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