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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 라면' 구로공단서 한국경제 DNA를 찾다

2015-05-20 09:09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 김소미 용화여고 교사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뿌리를 찾기 위한 프로젝트는 ‘파독 광부 이야기’에서 ‘구로공단 드라마’로 이어졌다. 두 이야기 속에서는 선진국 대열로 진화시킨 대한민국의 경제 DNA가 살아 있다. 현대 인류의 뇌가 파충류의 뇌에서 진화해온 것이 사실이듯, 21세기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파독 광부와 구로공단이라는 튼튼한 이중나선 위에서 변이하고 적응하고 번성했으리라. 오늘날 3D 업종으로 전락한 산업이 모여 있던 곳. 일자리와 미래가 없어 시골 고향을 버리고 올라와 청춘을 바쳤던 곳. 구로 공단 속으로 들어가 보자.

6·25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1960년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삶을 살아갔다. 보릿고개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도시와 농촌을 괴롭혔다. 별 다른 에너지가 없었던 사람들은 나무란 나무는 죄다 베어 쓴 탓에 주변 산은 모두 벌거숭이였다. 그야말로 가난이 가난을 부르던 시절이었다. 1964년의 여름, 허허벌판이던 서울시 영등포구 구로동에 한국 최초의 공업 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전국의 농촌과 어촌에서 생산성이 낮은,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던 젊은이들이 ‘기회’를 찾아 집을 나서 구로동으로 모여 들었다. 영국 산업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은 고향이 좋은데도 강제로 구로동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시골에선 일 할 것이 없어서, 너무 못 살아서 도시로 왔다. 구로동 삶이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편안하고 쾌적한 일자리는 당시 대한민국엔 없었다.

   
▲ 서울 구로동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설치된 '수출의 여인상' 정식 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근로여인상’으로 1974년 8월 12일 수출 100억불 돌파를 기념하여 건립됐다.
이들에게 허락된 기숙사 공간은 30%, 인근 지역은 시골에서 모여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벌집(외딴방)이 형성됐다. 달동네였다. 당시 서울시 인구 200만 명의 5%가 넘는 11만여 명이 구로동 산업단지에 몰렸으니 달동네의 애환은 당연했다. 그 만큼 대한민국에 임금을 주는 일자리가 없었다는 반증이다.

식모살이도 줄줄이 서울로 올라왔다. 삼시세끼 먹기도 어려웠던 시절 가난한 집 딸들은 식모살이를 하면서 끼니를 때웠다. 가족이 굶지 않기 위해선 한 입이라도 덜어야 했다. 그러던 중에 구로공단에 기술도 배워주고 임금도 주는 ‘재봉틀 돌리는 직업’이 나타난 것이다. 입 소문을 타고 구로동 재봉틀 이야기는 번져 갔다. 이들은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맞은 듯했고, 서둘러 보따리를 싸고 서울로 향했다. 밥 외에 임금이 든 월급봉투를 받았을 때 이들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 1960년대 구로공단 여공들이 묵었던 하숙집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중에 있는 가리봉오거리전에 전시되어 있다.
물론 월급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월급 2만2000원(1970년 기준) 중 사글세로 5000원과 식비, 교통비를 제하면 손에 쥐어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들은 일을 하면 돈이 더 들어온다는 생각에 잔업과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돈을 부모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로 송금했다. 밤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못 다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야학도 했다. 그래도 남의 집 식모살이하고 일자리가 없는 시골 보다 기회가 있는 구로동이 나았다.

그렇게 가리봉 오거리는 “오가는 사람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1960~70년대 서울시 최대의 번화가, 역동적인 공간으로 변해갔다. 공단에서 생산된 섬유·의류·봉제, 전기·전자조립, 가발과 잡화는 해외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이들의 피와 땀 덕분에 한국은 10년 만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진심을 몰라줬다. 이들 이름 앞엔 어느 순간 공순이, 공돌이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다. 식모를 벗어났더니 공순이라니…. 고향 집 동생을 만날 때면 “언니처럼 12시간, 14시간 일만 하는 공순이 되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하라”는 푸념까지 기꺼이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 지난 5월 15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자유경제원 주최 한국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 구로공단 속으로 토크콘서트가 개최됐다.
결코 창피해 하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대망의 1980년대가 되면 모두가 자가용을 탈 수 있고, 우리는 당당한 산업 역군의 주인공이 된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일을 시켜 주지 않을까봐 나이를 서너 살 올려 성년인 척한 미성년자, 학력이 모자라 졸업장까지 변조한 이들이 주인공이었다. 남들이 외딴방이라 불렸던 달동네 쪽방촌은 꿈을 이루기 위한 소중한 공간이었다. ‘하루 세끼를 보통 라면으로 때운다’하여 ‘라보때’ 인생이라는 말도 생겼다.

대한민국 면적 9만9720㎢의 0.05%에 불과한 구로동에서 나타난 이 에너지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성장에 대한 개인의지의 표출이었다. 도시와 공장은 개인의 발견을 이뤘다. 이들은 스스로 열심히 살면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공장에서 깨달은 이들이었다. 먼지와 소음으로 뒤덮힌 구로공단에서 12시간씩 재봉틀을 돌린 이유도 그것이었다. 더 잘 살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

   
▲ 자유경제원이 지난 5월 1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개최한 한국경제발전의 뿌리를 찾아 구로공단 속으로 행사 참여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열악한 근무 환경, 출퇴근 시 소지품 검사를 우리는 지금의 눈으로 평가하려 한다. 그들이 구로공단에 오기 전의 삶이 마치 천국의 삶이었던 것처럼 구로공단 삶을 폄하한다. 이들에게 구로공단은 빈곤 탈출을 위한 해방구였다. 그리고 꿈을 꾸는 곳이었다. 가난으로 찌들어 있던 나라의 ‘운명’까지 바꾸었다.

결코 환경 탓을 하지 않았던 이들로부터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배워야 할까? 40~50년 전 구로공단이라는 좁은 장소는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성장을 향한 개인들의 치열한 삶. 구로공단은 그런 삶을 대표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자신의 DNA가 어디서 왔는지 잊었다.

젊은이들은 기회가 널려 있는 세계화의 시대를 가져온 삶의 원류를 모른다. 남 탓, 나라 탓 할 때가 아니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남겨준 소중한 성장의 메시지를 곱씹어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지를 고민해야 한다. /김소미 용화여자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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